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墨子閒詁(2)

묵자간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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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간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18-5-4 次注林하여 出於冥隘之徑하며
左傳定四年 할새 舍舟於淮汭하고 自豫章與楚夾漢하다
左司馬戌謂子常曰 我悉方城外하여 以毁其舟하고 還塞大隧直轅冥阨하리라한대
釋文 云 阨 本或作隘라하고 杜注 云 三者 漢東之隘道라하다
案 此冥隘 卽左傳之冥阨 史記蘇秦傳 云 塞鄳阨 亦卽此
集解 引徐廣云 鄳 江夏鄳縣이라 注林 地無考 以左傳校之컨대 疑當作淮汭
淮注 形近하고 篆文作 與林으로 亦相近하여 因而致誤
畢云 淮南子地形訓 作澠阸한대 高誘曰 澠阸農澠池 是也라하니 則在今河南永寧縣이라
史記魏世家 云 秦攻冥阸之塞이라한대 集解 云 徐廣曰 或以爲江夏鄳縣라하다
又杜預注左傳 云 漢東之隘道라하고 括地志 云 石城山 在申州鐘山縣東南二十一里 魏攻冥阸 卽此山이라하다
呂氏春秋淮南子九塞 此其一也 玉海 在信陽軍東南五十里라하니 今在河南信陽州東南九十里라하다


注林에 주둔하여 冥隘의 지름길에서 출동하며
春秋左氏傳定公 4년에 “나라가 나라를 征伐할 때 淮水 물굽이에 배를 멈추고서 뭍으로 올라가 豫章에서부터 漢水를 사이에 두고 楚軍과 대치하였다.
나라〉 左司馬 子常에게 말하기를 ‘나는 方城 밖의 군대를 다 동원하여 저들의 배를 부수고, 돌아와 大隧直轅冥阨를 막을 것입니다.’ 하였다.”라 하였는데,
이 구절에 대해 陸德明의 ≪經傳釋文≫에 “는 본래 혹 라고 한다.”라 하였고, 杜預에 “이 세 지역은 漢東隘道이다.”라 하였다.
살펴보건대 이곳의 冥隘는 곧 ≪春秋左氏傳≫의 冥阨이다. ≪史記≫ 〈蘇秦傳〉에 “鄳阨를 틀어막았다.”라고 한 것도 바로 이곳이니,
史記集解≫에 徐廣의 말을 인용하여 “江夏鄳縣이다.”라 하였다. 注林에 대해서는 어느 지방인지 고찰할 수 없다. ≪春秋左氏傳≫의 기사로 비교하건대 응당 ‘淮汭’라고 해야 할 듯하다.
’와 ‘’는 字形이 비슷하고, ‘’는 篆文으로 ‘’라고 쓰니, ‘’과 또한 字形이 서로 비슷하여 이 때문에 잘못된 것이다.
畢沅:≪淮南子≫ 〈地形訓〉에는 ‘澠阸’라고 되어 있는데, 高誘가 말하기를 “澠阸는 지금의 弘農 澠池가 이곳이다.”라 하니, 곧 지금의 河南省 永寧縣이다.
史記≫ 〈魏世家〉에 “나라가 冥阸要塞를 공격했다.”라 하였는데, 이 구절에 대해 ≪史記集解≫에 “徐廣이 말하기를 ‘혹 江夏鄳縣이라고 한다.’라 하였다.”라 하였다.
杜預가 ≪春秋左氏傳≫을 주석하면서 “漢東隘道”라 하였고, ≪括地志≫에 “石城山申州 鐘山縣 동남쪽 21리에 있으니, 나라가 冥阸를 공격한 곳이 바로 이 이다.”라 하였다.
呂氏春秋≫ 및 ≪淮南子≫의 九塞는 이곳과 같은 곳이다. ≪玉海≫에 “信陽軍 동남쪽 50리에 있다.”라 하였으니, 오늘날 河南省 信陽州 동남쪽 90리에 있다.


역주
역주1 吳伐楚 : 魯 定公 4년 겨울 11월에 蔡侯‧吳子‧唐侯가 연합하여 楚나라를 토벌할 때의 일이다.
역주2 (宏)[弘] : 저본에는 ‘宏’으로 되어 있으나, ≪淮南子≫ 高誘의 주에 의거하여 ‘弘’으로 바로잡았다. ‘宏’은 靑나라 乾隆帝의 이름 愛新覺羅弘曆의 ‘弘’을 피휘한 것이다.

묵자간고(2) 책은 2020.12.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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