道之所一者는 德이 不能同也오 知之所不能知者는 辯이 不能擧也라
是故로 生無爵하며 死無諡하며 實不聚하며 名不立하나니 此之謂大人이니라
狗를 不以善吠로 爲良하고 人을 不以善言으로 爲賢이온
중니仲尼가 초楚나라에 갔는데, 초나라 왕이 중니를 위해 주연을 베풀었다.
〈환영하는 쪽에서〉 재상인 손숙오孫叔敖는 잔을 잡고 섰는데 용감한 사람으로 이름이 났던 시남의료市南宜僚는 술을 받아 땅에 부어 신에게 제사 지냈다.
〈이렇게 주연이 시작되었는데〉 초나라 왕이 말했다.
“옛사람이라면 이런 때에 무엇인가 좋은 말을 했을 것입니다.”
“저는 말하지 않는 말(不言之言)이야말로 참다운 말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 번도 아는 체하고 입을 열어 이야기한 일이 없었습니다만, 지금처럼 좋은 때가 되었으니 한 마디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 있는 시남의료市南宜僚 같은 이는 〈일찍이 백공승白公勝이 모반을 일으켜 영윤令尹 자서子西를 죽일 것을 강요하였을 때〉 구슬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보여주어 〈그들의 요구에 겁을 먹지 않고 그들을 깨우쳐〉 백공白公과 자서子西 두 집안의 재난災難을 해결하였고, 손숙오孫叔敖 같은 이는 마음 편히 잠을 자거나 우선羽扇을 잡고 여유작작하는 무위無爲를 실천하여 초나라 서울 영郢 땅의 사람들이 무기를 내던져버리고 평화를 즐기게 했다고 들었습니다.
이처럼 훌륭한 분들 앞이기는 하나, 저도 길이가 세 척이나 되는 긴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시남의료市南宜僚의 행동은 ‘도道라고 말하지 않는 도道’라 할 수 있고 손숙오孫叔敖의 행동은 ‘말하지 않는 말’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덕은 도道가 가지런히 하는 대상 속에 통합되고 말은 인간의 지知로는 더 이상 알 수 없는 한계에 멈추는 것이 최상입니다.
도道가 가지런히 하는 대상은 덕德으로는 통합할 수 없고, 인간의 지知로는 알 수 없는 한계는 말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재주로 이름이 알려지기를 유가儒家나 묵가墨家처럼 한다면 흉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다가 동쪽으로 흐르는 하천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은 대大의 극치이니 〈이와 마찬가지로〉 성인은 천지를 아울러 싸안고 은택이 천하에 미치더라도 〈인민은〉 그가 누구인지조차도 알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성인은〉 살아서는 존작尊爵이 없고 사후에도 시호가 없으며 실리實利(財貨)가 몸에 모이지 아니하며 명성도 확립되지 아니하나니 이런 사람을 일러 대인大人이라 합니다.
개가 잘 짖는다고 해서 훌륭한 개라고 평가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람도 말을 잘한다고 해서 현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무릇 대인이 되려고 노력하는 한 오히려 대인이라 하기에 부족한데, 하물며 유덕자有德者가 되려고 노력하는 경우이겠습니까.
무릇 모든 것을 완전히 갖추고 있는 것으로는 천지에 미칠 만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어찌 천지가 무엇인가를 구해서 그렇게 크게 갖추어진 것이겠습니까.
크게 갖추어짐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달리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잃어버리거나 내다버리지도 아니하여, 외물에 이끌려서 자기 본성을 변질시키는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 자기 본성으로 돌아감에 다함이 없으며 옛날 소박한 도道를 따라 그것을 훼손시키지 않으니, 이 같은 ‘삶’이 바로 대인의 진실된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