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集評] ○ 錢牧齋集釋杜子美寄韓諫議詩 謂以諫爲職 望其薦李鄴侯於朝者 得之
又引外傳泌居衡山 羨門安期降之 羽車幢節照耀山谷 證玉京群帝 則未然也
鴻飛冥冥日月白 靑楓葉赤天雨霜 謂其脫略世禍 無所繫累 雖有天霜凋物 無奈鴻飛何也
此下四句謂輔國等群小居大臣之位 左右昏君 詭毁罔極 搖撼至於高踏之地 以其擅弄主威 故指之爲帝也
星宮對北斗言指南內也 南方朱鳥七宿而星居最中 故徵其文稱南內之拘囚也
玄宗方在憂愁鬱悒 麯蘖爲半 理必有之 而親信高力士又被斥去 卽羽人稀少不在傍也
因泝前而述泌之成績 爲其好仙 故以赤松爲比 其功不減張良之定關中也 運籌之帷幄尙在而避詭遠逃 則神之所以慘傷也
然則國家成敗已非與知者 故於腥腐則色難而不食 於楓香則甘焉 謂不肯與群小同歸而飄然高擧也
然周南留滯如太史公者 古今所惜 而其絶世養性 則宜壽考無疆也
末乃言 當此時如此人 不宜任其自放 猶其望於諫議之薦達而置之玉堂也
如是看方是上下無滯矣 - 朝鮮 李瀷, 《星湖僿說》 卷28, 〈子美寄韓諫議詩〉
杜詩謁先主廟長律最妙 且自負非常 蓋得意作也 - 朝鮮 朴長遠, 《久堂先生集》 卷19, 〈箚錄〉 下
似聞以下 美其功 在帷幄以下 惜其留滯秋水而不得大用也 - 淸 仇兆鼇, 《杜詩詳註》 卷17
지금 내가 슬픈 것은 岳陽을 생각하기 때문이니
미인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가을 물 저 건너에서
그 그림자 거꾸로 비쳐 소상강 수면에 너울거린다
군막의 지략은 그대로 지녔기에 마음이 아팠으리라
비리고 썩은 음식은 사양하고 楓香을 먹고 있네
[集評] 《錢牧齋集》에, 杜子美가 韓諫議에게 부친 시를 해석하면서, “諫議는 諫하는 것을 직책으로 삼고 있으니, 그가 李鄴侯를 조정에 천거하기를 바라서 지은 것이다.”고 한 말은 맞았다고 보겠으나,
또 업후의 外傳에, “李泌이 衡山에 살 때에 羨門‧安期가 하강하여 羽車와 幢節이 산골에 환하게 비쳤다.”는 구절을 인용하여 ‘玉京群帝’를 입증한 것은 옳지 않다.
그들이 아무리 신선의 무리라 하더라도 어찌 帝로써 일컬을 수 있으랴?
이필이 이미 큰 공을 세우고서 李輔國의 참소를 피하기 위하여 자원해서 형산에 노닐었을 따름이다.
그 麻姑 신선이 술을 보냈다는 類는 뭇 소인들을 두려워하고 미워한 나머지 이에 가탁하여 말을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 참으로 이른바 安期生의 무리가 상종하여 노닌 일이 있었겠는가?
그 시 중에 ‘鴻飛冥冥日月白 靑楓葉赤天雨霜’이라고 한 것은, 그가 세속의 災禍를 초탈하여 얽매이는 바가 없으니, 비록 하늘이 서리를 내려서 만물을 시들게 하더라도 기러기가 높이 날아가서 어찌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玉京群帝’는 다섯 帝座를 지칭한 것이다.
이 아래 네 구는 李輔國 등 여러 소인들이 大臣의 지위에 거하여, 혼미한 임금을 좌지우지하여 참소하고 헐뜯음이 극에 달하였으며, 잡아 흔드는 것이 높은 곳에까지 이르러 그 임금의 위엄을 천단하기 때문에 帝라 지칭한 것이다.
‘倒景’은 천상을 지적한 것이니 그림자는 저쪽에서 움직이지만 뜻은 실로 이쪽에 있는 것이다.
‘星宮’은 北斗를 대하여 말한 것으로 南內를 지적한 것이니 남방에 朱鳥 七宿가 있는데, 星이 가장 중앙에 있으므로 짐짓 그 글뜻을 은미하게 하여 南內의 拘囚를 지칭한 것이다.
玄宗이 바야흐로 근심걱정에 싸여 답답하고 서글프므로 술로 벗을 삼은 것은 이치로 미루어 반드시 있을 일이며 親信하던 高力士마저도 배척을 당했으니, ‘羽人稀少不在傍’이라 한 것이다.
인하여 전자의 일을 거슬러 이필의 공적 이룬 것을 서술하되 그가 신선을 좋아한 까닭으로 赤松子로써 비유한 것이며, 그가 세운 공이 저 張良이 關中을 평정한 것보다 못하지 않은데, 運籌하던 帷幄은 아직 있으나 참소를 피하여 멀리 도망하였으니, 이로써 심신이 참혹하게 상한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의 성패에 대해서는 이미 참여해서 알 바 아니기 때문에 비린내 나고 썩은 것에는 난색을 표하여 먹지 아니하고 楓香을 달게 여긴 것이니, 이는 뭇 소인들과 함께 돌아가기를 즐겨하지 않고 표연히 높이 노님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周南에 체류한 太史公 같은 이는 고금이 애석히 여기는 바이지만 세속을 사절하고 성정을 수양하니, 마땅히 한량없는 壽를 누릴 것이라는 뜻이다.
말미에는, 이와 같은 때를 당하여 이와 같은 사람을 스스로 방랑하게 맡겨 두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으니, 오히려 諫議의 천거로서 玉堂에 두게 되기를 바란 것이다.
이와 같이 보아야만 바야흐로 위아래가 막힘이 없다.
예전에 나의 친구와 함께 두보의 七言古詩에 대하여 논하면서 〈寄韓諫議〉를 첫째로 꼽았다.
나로서는 〈桃竹杖引〉이 더 우수하다고 여겼으나 우열을 쉽게 논할 수 없었다.
두보의 시 중 〈謁先主廟〉가 장편의 시로는 가장 묘하며 자부 또한 비상하였으니 대개 득의작이라 할 것이다.
肅宗이 장안을 수복하였을 때, 함께 깊이 謀議하였다.
그러나 후에 衡陽의 湘水에 물러나 살면서 신선의 도를 닦았으므로 公(杜甫)이 그를 생각하여 지은 것이다.
‘似聞’이하는 그의 공훈을 미화한 것이고, ‘帷幄’이하는 가을 물가에 머물러 있으면서 크게 임용되지 못하는 것을 애석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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