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集評]○ 唐詩曰 山光悅鳥性 潭影空人心 按韻府群玉 空去聲 與論語回也屢空音同 - 朝鮮 李睟光, 《芝峯類說》 卷11
以法言之 五律初入律者 如做古詩樣 間雜拗體也無妨
孟浩然五言頷聯多不對 常建曲逕通幽處 禪房花木深 亦頷聯也
杜詩絶少 - 金昌翕, 《三淵集》 卷19 〈答士敬別紙〉
○ 吾嘗喜誦常建詩 云竹逕通幽處 禪房花木深 欲效其語 作一聯 久不可得
夫前人爲開其端 而物景又在其目 然不得自稱其懷 豈人才有限而不可彊
熙寧庚戌 仲夏月 望日 題 - 宋 歐陽脩, 《文忠集》 卷73 〈題靑州山齋〉
○ 常建有題破山寺後院詩云 竹逕通幽處 禪房花木深 余觀又玄集唐詩類選唐文粹 皆作通
熙寧元年 歐陽永叔 守靑 題廨宇後山齋云 竹逕遇幽處 有似鄠杜石
古人用一字 亦不苟也 - 宋 姚寛, 《西溪叢語》 卷上
道人庭宇靜 苔色連深竹 宋人謂遠勝竹逕通幽處禪房花木深 亦憒憒之見
常詩警絶處 在山光悅鳥性十字 初不係頷聯也 - 明 胡應麟, 《少室山房集》 卷108
○ 歐陽永叔最愛常建曲徑通幽處 禪房花木深之句 固是絶唱
具眼或謂永叔在靑州 手書此詩於廨後山齋 通字乃作遇
則是點金成鐵 初不解此詩之妙也 - 淸 王士禎, 《居易錄》
[集評]○ 唐詩에 ‘山光悅鳥性 潭影空人心’라고 하였는데, 《韻府群玉》을 살펴보니 ‘空’은 去聲이다. 《論語》의 “回也屢空(안회는 자주 끼니를 굶었다.)”과 음이 같다.
○ 杜甫의 오언율시에는 拗體가 없고 칠언율시에는 요체가 절반을 차지한다.
법으로 말한다면 오언율시가 처음 율시가 되었을 때 마치 고시의 형태로 지었기 때문에 그 사이에 요체가 섞여도 무방하였다.
그러나 칠언율시의 경우는 정연하여 조화를 이루어야 했다.
그러나 杜甫의 경우는 반대이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孟浩然이 지은 오언율시의 함련은 대구가 아닌 것이 많고, 常建의 ‘曲逕通幽處 禪房花木深’ 역시 함련이다.
○ 나는 일찍이 상건의 시에 ‘竹逕通幽處 禪房花木深’이라고 한 것을 애송하여 그의 말을 본떠서 한 연을 짓고자 하였으나 오래도록 얻지 못하였다.
이에 자신의 뜻을 잘 표현해내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년에 靑州에 가서 비로소 산속에 재실을 얻어 쉴 수 있게 되었는데, 평소에 생각하고 본 것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말이라는 것은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더욱 방불하게 표현해보고 싶었으나 끝내 한마디도 얻지 못하였다.
무릇 앞사람이 단서를 열어놓았고, 경물 또한 눈앞에 있는데도 내 마음에 딱 맞는 표현을 얻을 수 없었으니, 어찌 사람의 재능에 한계가 있어 억지로 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 상건의 〈題破山寺後院詩〉에 ‘竹逕通幽處 禪房花木深’이라고 하였는데 내가 《又玄集》, 《唐詩類選》, 《唐文粹》를 보니, 모두 ‘通’으로 되어 있었다.
熙寧 元年 歐陽永叔(歐陽脩)이 청주의 수령이 되어 廨宇後山齋에 제한 시에 “대나무 길이 그윽한 곳과 만나니 鄠杜石과 같은 것이 있네.[竹逕遇幽處 有似鄠杜石]”라고 하였다.
河內로 갔을 때 그것을 邢和叔에게 보여주었는데, 처음에는 그것을 보기 전이라서 잘못된 것이라 의심하였다.
비석을 보게 되자, 반복하여 음미하고는 역시 좋다고 생각하였다.
결국 다른 본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歐陽永叔이 고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古人들은 한 글자를 쓸 때에도 억지로 하지 않았다.
○ 子厚(柳宗元)의 고시는 ‘沖淡峭峻’한데 唐代에 蘇州(韋應物)와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蘇長公(蘇軾)이 〈유종원을〉 위응물 이상으로 품평하였다.
그러나 위응물 시의 ‘蕭散自然’은 〈
〉의 格調와 거리가 멀지 않다.
자후는 비록 骨力이 자못 강하였으나 위응물에게 미치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子瞻(蘇軾)의 감식으로는 간파할 수 없는 것이다.
‘
’에 대하여 송인들은 ‘竹逕通幽處 禪房花木深’보다 매우 뛰어나다고 하였는데, 역시 잘 모르는 견해이다.
상건 시의 경이로운 곳은 ‘山光悅鳥性 潭影空人心’ 10자에 있지, 애초 함련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 歐陽永叔(歐陽脩)이 상건의 ‘曲徑通幽處 禪房花木深’ 구를 가장 애송하였는데, 진실로 절창이다.
안목이 있는 자가 혹 말하기를 “영숙이 청주에 있을 때 이 시를 廨後山齋에 손수 베껴놓았는데, ‘通’자를 ‘遇’자로 써놓았다.
석본이 있었는데 과연 그러하였다.”라고 하였다.
만약 그렇다면 금을 찍어서 철을 만든 격이니 처음부터 이 시의 오묘함을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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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8 제파산사후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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