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至德二載 甫自京
出
歸
乾元初 從左拾遺
與親故別 因出此門 有悲往事〉
[集評]○ 此詩不無怨 然不怨不厚 - 明 鐘惺, 《唐詩歸》 卷21
○ 不無少望 然淡淡直敍 怨而不怒 諷刺體之聖也 - 淸 何焯, 《義門讀書記》 卷53
○ 公疏救房琯 詔三司推問 以張鎬力救 勅放就列 至次年 與房琯嚴武俱貶 坐琯黨也 此公事君交友生平出處之大節
王維詩云 執政方持法 明君無此心 與此同意 而老杜尤爲渾成
此詩有介子從龍之感 而詞意歸于厚 所謂詩可以怨也 - 淸 顧宸, 《杜詩詳注》 卷6引
○ 詞意婉曲 昔之忠款 今之眷戀皆見 怨而不怒 忠厚之道 - 淸, 《唐宋詩醇》 卷15
○ 首四句明述己忠心苦節 妙在不露 - 淸 楊倫, 《杜詩鏡銓》 卷5
○ 題曰有悲往事 而詩之下截幷悲今事矣 妙在三四說往事 却以至今爲言 下便可直接移掾 - 淸 浦起龍, 《讀杜心解》 卷3-1
〈至德 2년(757)에 나는 서울의 金光門을 나와 샛길로 鳳翔에 돌아갔다. 乾元 元年(758)에 左拾遺에서 華州掾으로 폄직되어 친구들과 이별하였는데, 이로 인해 이 문을 나오니 지난 일에 대한 슬픔이 있었다〉
[集評]○ 이 시는 원망함이 없지 않다. 그러나 군주의 부덕함을 원망한 것은 아니다.
○ 작은 소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담담하게 直敍하였다. 원망하면서도 노하지 않았으니, 諷刺體의 최고봉이다.
○ 공(두보)이 房琯을 구하려는 소를 올려서 〈임금이〉 三司에게 推問을 명하였는데, 張鎬가 그를 힘써 구하였기에 풀어주라는 칙명을 받아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해에 방관‧嚴武와 함께 폄직을 당하였으니, 방관의 당으로 연좌된 것이다. 이는 공이 임금을 섬기고 벗과 교유하며, 평생의 출처를 지킨 大節이다.
‘벼슬을 옮김이 어찌 황제의 뜻이겠는가.[移官豈至尊]’라고 한 것은 임금에게 원망을 돌린 것이 아니다.
당시에 참소를 당하고서도 자신의 견해를 말하지 않고, 또 자신이 재주 없다는 것으로 스스로를 해명한 데서 더욱 그 심후한 덕을 볼 수 있다.
이는 王維의 시 “
[執政方持法 明君無此心]”와 같은 뜻이지만, 老杜(두보)의 시가 더욱 혼연하게 이루어졌다.
이 시에는 介子推가 임금을 따랐던 마음이 있지만, 詞意는 더욱 두터운 데로 돌아갔으니, 孔子의 이른바 ‘시는 원망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시어의 뜻은 완곡하지만, 지난날의 충성과 오늘날의 사모함이 모두 드러난다. 원망하면서도 노하지 않으니 忠厚의 도이다.
○ 앞의 4구는 자신의 충성된 마음과 굳은 절개를 분명히 서술하였지만, 시의 묘처는 드러나지 않음에 있다.
○ 제목에 ‘지난 일에 대한 슬픔이 있다.[有悲往事]’고 하였지만, 시의 하단에서는 지금의 일을 슬퍼하였다. 이 시의 묘처는 3‧4구에서 지난 일을 말하면서 도리어 ‘지금’으로 말하고 있는 것에 있으니, 華州掾으로 폄직된 것과 곧장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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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지덕이재 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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