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集評]○ 金陵鳳凰臺在城之東南 四顧江山 下窺井邑 古題詠惟謫仙爲絶唱 - 宋 張表臣, 《珊瑚鈎詩話》 卷1
太白過黃鶴樓 有眼前有景道不得 崔顥題詩在上頭之句 至金陵 遂爲鳳凰臺詩以拟之 今觀二詩 眞敵手棋也
若他人 必次顥韻 或于詩板之傍別着語矣 - 宋 劉克莊, 《後村詩话》
三四懷古人之不見也 五六七八詠今日之景 而慨帝都之不可見也 登臺而望 所感深矣
金陵可以北望中原 唐都長安 故太白以浮雲蔽日不見長安爲愁焉 - 元 方回, 《瀛奎律髓》 卷一登覽類
○ 崔顥黃鶴樓 便肆意爲之 白於金陵鳳凰臺效之 最劣 - 淸 毛奇齡, 《唐七律選》
○ 從心所造 偶然相似 必謂摹仿司勛 恐屬未然 - 淸 沈德潜, 《唐詩別裁》 卷13
使人愁三字 總結幽徑古丘之感 與崔顥黃鶴樓落句 語同意別
宋人不解此 乃以疵其不及顥作 覿面不識 而强加长短 何有哉
太白詩自十九首來 顥詩則純爲唐音矣 - 淸 王夫之, 《唐詩評選》
[集評]○ 금릉의 봉황대는 성의 동남쪽에 있는데 사방은 강과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아래로는 농토와 도읍이 있다. 옛 題詠詩 중에 오직 謫仙(李白)의 것이 절창이다.
李白이 황학루를 지나면서 “눈앞의 경치를 말로 할 수 없는데, 최호가 쓴 시가 머리 위에 있기 때문”이라는 구절을 짓고 금릉에 이르러 드디어 〈봉황대〉 시를 지어서 〈황학루〉 시에 견주었는데, 지금 이 두 시를 보니, 참으로 맞수의 대국이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반드시 최호의 운에 차운하거나 혹은 시가 적혀 있는 현판 옆에 다른 말을 붙였을 것이다.
○ 太白(李白)의 이 시와 최호의 〈황학루〉는 서로 비슷한데, 격률과 기세가 우열을 따지기 쉽지 않다.
이 시는 ‘봉황대’로 제목을 삼았지만, 봉황대를 읊은 것은 앞의 2구에 불과한데 두 구로 다 표현하였다.
아래의 6구는 곧 대에 올라 바라본 경치이다.
3‧4구는 고인이 보이지 않음을 가슴 아파하고 5‧6‧7‧8구는 지금의 경치를 읊으면서 황제의 수도가 보이지 않음을 개탄하였으니, 대에 올라 바라보면서 느낀 바가 깊다.
금릉에 도읍을 세운 것은 吳나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三山‧二水‧白鷺洲는 모두 금릉의 산과 물의 이름이다.
금릉에서는 북쪽으로 중원을 바라볼 수 있는데, 당나라는 장안에 도읍하였기 때문에 태백이 뜬구름이 해를 가려 장안을 볼 수 없다고 근심하였던 것이다.
○ 최호의 황학루는 곧 마음 가는대로 지은 것이다. 李白이 〈금릉봉황대〉에서 그것을 본떴으나, 가장 뒤떨어졌다.
○ 마음 가는대로 지은 것인데 우연히 서로 비슷하다면, 반드시 司勛(최호)을 모방했다고 하겠지만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 뜬구름이 해를 가려 장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晉 明帝의 말을 빌린 것이다.
그림자가 뜬구름에서 나옴은
에 사람이 없고 중원이 쇠퇴함을 슬퍼한 것이다.
‘使人愁’ 석 자는 ‘幽徑’과 ‘古丘’의 느낌을 총결하였는데, 최호가 지은 〈황학루〉의 마지막 구와 시어는 같으나 뜻은 다르다.
송나라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백의 시가 최호의 작품에 미치지 못한다고 흠잡았는데, 이는 얼굴만 알고 마음은 알지 못하면서 억지로 우열을 따진 것이니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이태백의 시는 시 전체를 혼연하게 거두어들였지만 최호의 시는 끝을 마무리하며 거두어들였다.
이태백의 시는 〈
〉에서 유래하였지만, 최호의 시는 순전히 당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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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등금릉봉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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