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集評]○ 唐人早朝詩 以岑參爲上 中聯冠冕整齊 抑更工雅之至 - 明 陸時雍, 《古詩鏡》 唐詩鏡, 卷15
唐肅宗至德二載丁酉九月 廣平王復長安 子美以是年夏 間道奔鳳翔 六月除左拾遺
十月肅宗入京師居大明宮 賈至爲中書舍人 岑參爲右補闕
四人早朝之作 俱偉麗可喜 不但東坡所賞子美龍蛇燕雀一聯也
然京師喋血之後 瘡痍未復 四人雖誇美朝儀 不已泰乎 - 元 方回, 《瀛奎律髓》 卷2
○ 楊誠齋云 七言褒頌功德 如少陵賈至諸人唱和朝大明宮 乃爲典雅重大 和此詩者 如岑參花迎劒佩一聯最佳 - 宋 蔡正孫, 《詩林廣記》 卷2
通篇心靈 脈融語秀 作廊廟古衣冠法物 令人對之魂肅神斂
諸家取唐七言律壓卷者 或推崔司勳黃鶴樓 或推沈詹事獨不見 或推杜工部 玉樹彫傷昆明池水老去悲秋風急天高等篇
珽謂冠冕莊麗 無如嘉州早朝 淡雅幽寂 莫過右丞積雨
眞足空古準今 質之諸家 亦必以爲然也 - 淸 仇兆鼇, 《杜詩詳注》 卷5
〈中書舍人 賈至의 〈大明宮의 새벽 조회〉를 받들어 和韻하다〉
꽃이 劍과 珮玉를 맞으니 새벽별이 막 사라지고
버들가지 깃발에 스치니 이슬은 아직 마르지 않았다
[集評]○ 당나라 사람이 새벽 조회를 읊은 시 중에 잠삼의 작품이 최상이다. 가운데 연은 체제가 정제되어 있어 더욱 뛰어난 기교와 전아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 살펴보건대 〈賈至‧岑參‧王維‧杜甫〉 네 사람이 시를 酬唱한 것은 建元 元年 무술년(758) 봄이다.
당나라 肅宗 至德 2년 정유년 9월에 廣平王이 장안을 수복하였을 때 子美(杜甫)는 지름길을 따라서 鳳翔으로 가서 6월에 左拾遺에 제수되었다.
10월 숙종이 왕성으로 들어와 대명궁에 거처하였는데, 이때 賈至는 中書舍人이 되었고, 岑參은 右補闕이 되었다.
12월에 六等의 죄가 내려졌을 때 王維는 太子中允으로 좌천되었다.
네 사람이 지은 〈새벽 조회〉의 작품은 모두 偉麗하여 애호할 만하니, 東坡(蘇軾)가 칭송한
뿐만이 아니다.
그러나 왕성이 혈전을 치른 뒤 상처가 아직 아물기 전인데 네 사람이 비록 조회의 의전을 과장하여 미화한 것이지만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 楊誠齋(楊萬里)가 말하였다. “칠언시 중 공덕을 칭송한 것으로 少陵(杜甫)과 賈至 등이 창화한 〈朝大明宮〉이 典雅하고 重大하다. 이 시에 화답한 작품으로 잠삼의 ‘花迎劒佩星初落 柳拂旌旗露未乾’ 한 연이 가장 좋다.”
○ 周敬이 말하였다. “‘皇’과 ‘紫’는
이며, ‘星’과 ‘露’ 두 글자가 실제의 詩眼이다.
시 전체에 心靈이 들어 있어 맥이 통하고 시어가 수려한데 궁궐과 옛 의관의 법도를 만들어놓으니, 사람이 이것을 대하면 혼과 정신이 엄숙 정중하게 된다.
새벽 조회를 읊은 諸篇 중 이 작품이 가장 뛰어날 뿐만 아니라, 모든 당나라의 칠언율시 중에서 이 작품을 압권으로 삼는다 하여도 양보할 것이 없다.”
周珽이 말하였다. “혹자는 〈早朝大明宮〉 시가 ‘寒’, ‘闌’, ‘乾’, ‘難’ 등 險韻을 사용하였다고 하였는데 억지로 단점을 찾아낸 것에 불과할 것이다.
여러 논자들이 당나라 칠언율시의 압권을 꼽을 때 혹자는 崔司勳(崔顥)의 〈黃鶴樓〉를 추천하고 혹자는 沈詹事(沈佺期)의 〈
〉을 추천하고, 혹자는
”
그러나 音響의 경중과 氣格의 高下에 대해서는 모두 이전에 정론이 있다.
周珽은 正大壯麗하기는 嘉州(岑參)의 〈奉和中書舍人賈至早朝大明宮〉만 한 것이 없고, 淡雅幽寂하기로는 右丞(王維)의 〈積雨輞川莊作〉을 능가하는 것이 없다.
澹齋翁은 이 두 편의 시가 朝廷과 山林을 대표하는 작품의 신수를 얻었다고 여겨 이 작품들을 압권으로 꼽았다.
진실로 과거에 없던 논의로 오늘날의 기준이 될 만하니, 諸家에게 물어보아도 역시 반드시 그렇다고 여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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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봉화중서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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