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義山籌筆驛詩終見降王走傳車 按三國志 後主出降 擧家傳送洛陽 其曰傳車此也
忠魂不逐降王車 長衛英孫朝烈祖 意尤好矣 -朝鮮 李睟光,《芝峯類說》卷12,文章部 5,〈唐詩〉
○ 范元實詩眼曰 文章貴向衆中傑出 如同賦一事 工拙易見
如石曼卿詩云 意中流水遠 愁外舊山靑 膾炙天下久矣
惟義山詩 魚鳥云云 簡書 蓋軍中法令約束 言號令嚴明 雖千百年之後 魚鳥猶畏之 儲胥 蓋軍中藩籬 言忠義貫神明 風雲猶爲護其壁壘也
何曰 議論固高 尤在抑揚頓挫處 使人一唱三歎 轉有餘味 楊曰 沈鬱頓挫 絶似少陵 -淸 馮浩,《玉溪生詩詳注》卷2
而於籌筆驛三字 又未嘗抛荒 從來作此題者 摹寫風景 多涉游移 鋪敍事功 若無生氣 惟此最稱傑出
妙在襯貼猿鳥風雲等字 又妙在虛下猶疑常護等字 見得當時約束嚴明 藩籬堅固 至今照燿耳目也
而生前之畫地濡毫 不能禁身後之銜璧輿櫬 豈非有臣無君
取觀於關張無命 而知蜀之不振 天實爲之 非公才之有忝管樂也
以祠廟應驛字 以梁父吟應籌筆字 法律最嚴 -淸 陸崑曾,《李義山詩解》8
第三句 點淸籌筆 第四句 轉向題後 以宕出全神 五六句 復用按跳法 以跌宕之
末二句 錦里祠廟爲驛字 作襯結 梁父吟成爲籌筆二字 作襯結
語則拓向題外 意則回顧題中 用法最密也 -淸 李鍈,《詩法易簡録》卷10七言律詩
首言武侯曾駐師于此 其軍法嚴明 至今魚鳥猶敬畏之 且忠感天地 故風雲長護其壁壘而不毁也
所惜者武侯筆畫籌策 指揮若神 而終見後主璧櫬詣降之事 則當日出師之擧 亦屬徒勞而已也
夫亮以管樂自比 固無所忝 而關張無命 漢祚終移 其奈之何
今于此驛旣不能無所感 若他年經成都而拜祠廟 讀梁父之吟 以先生之惜三人者惜武侯 悲傷又寧有旣哉 -現代 刘学锴‧余恕诚,《李商隱詩歌集解》제3책
원숭이와 새들 아직도 그의 군령 두려워하는 듯
부질없이 상장군이 신이한 계책을 내놓게 하더니
끝내 항복한 後主 역마 타고 가는 것 보고 말았네
[集評]○ 李義山(李商隱)의 시 ‘風雲長爲護儲胥’는 風雲八陣法에 의거한다.
揚雄의 〈長楊賦〉에서 “나무로 둘러싸고 창으로 보루를 만들어 儲胥로 삼았다.”라고 하고 ‘군영의 울타리’라고 주를 달았다.
또 《莊子》의 ‘削格羅落’에 ‘削格’이 《漢書》에서 말한 ‘儲胥’와 같다고 주를 달았는데, 지금의 목책과 같다.
이의산 〈주필역〉의 ‘終見降王走傳車’는 《삼국지》를 보면 “후주가 항복하자 온 집안이 傳車로 낙양에 보내졌다.”라고 하였는데, ‘전거’라는 것이 이것이다.
李東陽의 〈五丈原〉에 “무후가 하늘로 돌아가자 옛 전열이 많은데, 관우가 앞에서 몰고 장비가 뒤에서 막네.
忠魂은 항복한 수레를 좇지 않고, 길이 英孫을 보위하고 烈祖에 조회하였네.[侯歸上天多舊伍 羽爲前驅飛後拒 忠魂不逐降王車 長衛英孫朝烈祖]”라고 하였는데, 뜻이 더욱 좋다.
○ 范元實은 《詩眼》에서 “문장은 무리 중에서 뛰어난 것을 귀하게 여기니, 똑같이 하나의 일을 노래해도 그 공교로움과 졸렬함이 쉽게 드러나는 것과 같다.
예컨대 石曼卿의 시에 ‘의중의 흐르는 물은 멀고, 근심 밖의 옛 산은 푸르다.[意中流水遠 愁外舊山靑]’라고 했는데, 천하에 회자된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산수가 있는 곳이라면 쓸 수 있는 시이지 꼭 주필역은 아니다.
殷潛之가 小杜(杜牧)에게 준 시는 매우 강건하고 화려하지만 또한 높은 뜻은 없다.
오직 義山(李商隱)의 시에 ‘魚鳥猶疑畏簡書’라고 한 것이 있는데, ‘簡書’는 대개 군중의 법령과 약속으로 호령이 엄정하여 백년 천년 후라도 ‘ 물고기와 새[魚鳥]’가 아직도 그것을 두려워함을 말하였고, ‘儲胥’는 군중의 울타리인데 忠毅가 神明을 관통하여 ‘구름과 바람[風雲]’이 여전히 壁壘를 호위함을 말하였다.
이 두 구를 암송하면 사람들이 숙연하게 제갈공명의 풍모와 德業을 다시금 보도록 한다.
‘管樂有才終不忝’에 이르러서는 그 대구가 딱 들어맞고 또 그 속에 의론이 담겨 있으니, 다른 사람들이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하씨(何景明)는 “의론이 진실로 높고 더욱이 抑揚頓挫한 곳에 있어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게 하고도 남는 뜻이 있다.”고 하였고, 양씨(楊愼)는 “沈鬱頓挫하여 그 뛰어남이 少陵(杜甫)과 같다.”고 하였다.
‘籌筆驛’ 석 자를 또 일찍이 버려둔 적이 없지만, 지금까지 이 제목으로 지은 시는 풍경을 묘사하면서는 대부분 이동하는 모습을 그리고, 일을 서술하여 표현하면서는 생기가 없는 듯한데 오직 이 작품이 가장 걸출하다.
첫 구의 ‘簡書’는 籌筆을 지칭하고, 다음의 ‘儲胥’는 역을 말한다.
‘猿鳥’,‘風雲’ 등의 글자를 짝한 것에 妙處가 있고, 또 ‘猶疑’,‘常護’ 등의 글자 뒤를 비워둔 것에 묘처가 있으니 당시 군령이 엄정하고 경계가 견고하여 지금까지도 눈앞에 뚜렷이 드러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국가가 인재를 얻은 것이 이와 같다면 어떤 공인들 이루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생전에 경계를 구획하고 필력을 휘둘렀어도, 사후에 군주가 항복하여 널을 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으니, 어찌 뛰어난 신하가 있으나 훌륭한 군주가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큰 건물이 기울면 하나의 나무가 이를 지탱하지 못하는 법이다.
관우와 장비가 비명에 죽은 것을 보건대 촉나라가 떨치지 못한 것은 하늘이 실로 이렇게 한 것이지 공의 재주가 관중과 악의보다 못하기 때문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사당을 지나면서 〈양보음〉을 읊조리니 공을 위해 여한을 품은 것은 오늘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祠廟’로 ‘驛’자와 대응하고, ‘梁父吟’으로 ‘籌筆’자와 대응하니 격식이 가장 엄정하다.
○ 첫 두 구는 시공을 가로지르며 무후(제갈량)를 그려내어 일깨웠으니 英靈이 아직도 존재하는 듯하다.
제3구는 ‘籌筆’을 선명하게 점출해내고, 제4구는 제목 이면으로 전환해 全神을 자유롭게 표출하였으며, 5‧6구는 다시 비약을 써서 자유롭게 묘사하였다.
마지막 두 구의 ‘錦里祠廟’는 ‘驛’자를 설명한 것으로 잘 들어맞고, ‘梁父吟’은 ‘籌筆’ 두 자를 이룬 것으로 잘 들어맞는다.
시어는 제목 밖으로 확장되고, 뜻은 제목 안으로 수렴되니 용법이 매우 긴밀하다.
○ 《唐詩鼓吹評注》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무후의 일을 추억하여 그것을 마음 아파한 것이다.
먼저 무후가 일찍이 이곳에 주둔하였는데, 그 군법이 엄정하여 지금도 물고기와 새들이 여전히 이를 경외하고, 또 忠心이 천지를 감동시켰기에 바람과 구름이 오래도록 그 壁壘를 호위하여 허물어지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애석한 것은 무후가 계책을 세워 신처럼 지휘하였지만 결국에는 후주가 널을 지고 항복한 일을 보았으니, 그날의 출병은 헛수고가 되었을 뿐이다.
제갈량은 관중와 악의에 스스로를 견주어도 참으로 부끄러울 바가 없었으나, 관우와 장비가 비명에 죽고 漢나라의 명운이 끝내 옮겨간 것을 어찌하겠는가.
지금 이 역에서 느끼는 바가 없을 수 없고, 지난날 성도를 지나면서 사당에 배알할 적에, 〈양보음〉을 읽은 것은 선생(李商隱)이 세 사람을 안타까워한 것으로써 무후를 안타까워한 것이니 슬픔이 또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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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주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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