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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詩三百首(3)

당시삼백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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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何滿子〉
三千里
深宮二十年
一聲
雙淚落君前
[集評] ○ 張祜詩曰 故國三千里 深宮二十年 一聲何滿子 雙淚落君前
按唐武宗疾篤 孟才人以歌笙密侍左右 上目之曰 吾當不諱 爾何爲哉 才人泣曰 請就死 乃歌一聲何滿子 氣亟立殞
詩語蓋紀此事也
何滿子 樂府曲名 本人名也
○ 祜宮詞云 故國三千里 深宮二十年 一聲河滿子 淸淚落君前 祜蓋有爲而發也
按 何孟春餘冬序錄 唐文宗甘露事後 不樂往往瞠目 獨語曰 須殺此輩
後賦詩曰 輦路生春草 上林花滿枝
憑高無限意 無復侍臣知
翌日觀牧丹 誦賦吟罷 始憶舒元輿之詞 歎息泣下
因命作樂聊自適
宮人沈翹翹者歌何滿子 有浮雲蔽白日之句 其聲宛轉 上因欷戱問曰 汝知之耶
此文選古詩第一首 蓋忠臣爲奸邪所蔽也 乃賜金臂環 問其從來 則吳元濟女也 自陷掖庭 易姓沈氏 配樂籍
又秦曰 妾本藝方響 乃白玉也 搥則響 犀爲之
願賜妾 帝命賜之
旣至命奏凉州曲 音韻淸越 聽者無不凄然
今以此說較之無不沕合
必是祜當時見有此事而作也
故國指淮蔡也
自元濟敗至甘露變後 亦爲二十餘年矣
芝峯類說云 唐武宗疾篤 孟才人以歌笙密侍左右
上目之曰 吾當不爲諱
何爲哉 才人泣曰 請就死 乃歌一聲何滿子 氣亟立殞
張詩卽此事也 此則不然
孟才人所歌卽張祜詠沈翹翹詩 而氣亟立殞
故祜詩又云 却爲一聲河滿子 下泉湏吊舊宮人 則祜之宮詞指沈翹翹 而非孟才人矣
何滿子者曲名 白樂天云 滄州人 姓何名滿
開元中犯罪 繫獄中撰此曲
鞫獄者愍之 爲奏 明皇不許 竟坐 -朝鮮 李瀷,《星湖僿說》卷26〈經史門河滿子〉
○ 祜有觀獵詩幷宮詞 白傅稱之 宮詞云 故國三千里 深宮二十年 一聲何滿子 雙淚落君前
小杜守秋浦 與祜爲詩友
酷愛祜宮詞 贈詩曰 如何故國三千里 虛唱歌詞滿六宮 -宋 阮閱,《詩話總龜》卷4
○ 祜詩云 故國三千里 深宮二十年 杜牧賞之作詩云 可憐故國三千里 虛唱歌詞滿六宮
故鄭谷云 張生故國三千里知者 唯應杜紫微
諸賢品題如是 祜之詩名 安得不重乎
其後有解道澄江淨如練 世間唯有謝玄暉 解道江南斷腸句 世間唯有賀方回等語 皆祖其意也 -宋 葛立方,《韻語陽秋》卷4
○ 樂天云 河滿子 開元中滄州歌者
臨刑 進此曲 以贖死 竟不得免 白樂天爲詩曰 世傳滿子是人名 臨就刑時曲始成
一曲四詞歌八疊 從頭便是斷腸聲
張祜集載
武宗疾篤 孟才人以歌笙獲寵 密侍左右
上目之曰 吾當不諱 爾何爲哉 才人指笙囊泣曰 請以此就縊 復曰 妾嘗藝歌 願歌一曲
上許之 乃歌一聲河滿子 氣亟立殞
上令醫候之 曰脈尙溫而腸巳絶 則是河滿子眞能斷人腸者
祜爲詩云 偶因歌態詠嬌頻 傳唱宮中十二春
却爲一聲河滿子 下泉須弔舊才人
又有故國三千里 深宮二十年 一聲河滿子 雙淚落君前之詠
一稱十二春 一稱二十年 未知孰是也
杜牧之有酬祜長句 其末句云 可憐故國三千里 虛唱歌詞滿六宮 言祜詩名如此而惜其不遇也
元微之嘗於張湖南座爲唐有態作何滿子歌云 梨園弟子奏明皇 一唱承恩羈網緩
使將何滿爲曲名 御譜親題樂府纂
魚家入內本領絶 葉氏有年聲氣短
又敍製曲之因與樂天之說同 -宋 葛立方,《韻語陽秋》卷15
○ 體小詩 聲唱流美 頗諧音調
中唐以後詩人 如處士者裁思精利 安可多得 -明 徐獻忠,《唐詩品》
○ 滿子其聲最悲
樂天詩云 一曲四辭歌八疊 從頭便是斷腸聲 此詩更悲在上二句
如此而唱悲歌 那禁淚落 -淸 宋顧樂,《唐人萬首絶句選》


〈하만자〉
장호
고향은 삼천 리
깊은 궁궐에서 이십 년
한 가락 하만자 소리에
두 줄기 눈물 임금 앞에 떨어진다
[集評] ○ 장호의 시에 “故國三千里 深宮二十年 一聲何滿子 雙淚落君前”이라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唐나라 武宗이 병이 위중해지자 孟才人이 노래와 생황으로 좌우에서 가까이 모셨는데, 上이 그녀를 지목하며 말하기를 “내가 죽는다면 너는 어찌 하겠느냐?”라고 하자, 재인이 울면서 말하기를 “곧 죽기를 바랍니다.”라고 하고, 곧 하만자 한 곡을 부르다가 氣가 다하여 그 자리에서 죽었다.
장호의 詩語는 대개 이 일을 기록한 것이다.
하만자는 樂府의 곡명으로 본래는 인명이다.
○ 張祜의 宮詞에 “故國三千里 深宮二十年 一聲河滿子 淸淚落君前”이라고 하였으니, 장호는 대개 까닭이 있어 이것을 지은 것이다.
살펴보건대, 何孟春의 《餘冬序錄》에 “唐 文宗이 이 있은 뒤에 기분이 좋지 않아서 왕왕 눈을 부릅뜨며 홀로 말하기를, ‘모름지기 이놈들을 죽여야 한다.’고 했다.
뒤에 시를 지어 말하기를, ‘輦 가던 길에 봄풀이 우거지고, 상림 숲엔 꽃이 가지에 가득하구나.
높은 곳에 기대 있는 한없는 뜻, 侍臣 중 다시 알 사람이 없네.[輦路生春草 上林花滿枝 憑高無限意 無復侍臣知]’라고 하였다.
이튿날 모란꽃을 구경하고 賦를 외고 나서 비로소 舒元輿의 詞를 기억하며 탄식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악곡을 만들도록 하여 스스로 위안하려 했다.
宮人 沈翹翹란 자가 하만자를 노래하는데, ‘뜬구름이 밝은 해를 뒤덮었다.[雲蔽白日]’라고 한 구절이 있어 그 소리가 완연하므로 上이 그 노래를 듣다 탄식하며 묻기를 ‘네가 어떻게 이 시를 아느냐?
이 시는 《文選》의 古詩 첫째 수인데 충신이 간사한 무리들에게 가려진 것을 말한 것이다.’ 하고 드디어 금팔찌를 하사하며 그 내력을 물은즉 ‘吳元濟의 딸인데 掖庭에 들어오면서부터 성을 심씨로 바꾸고 樂府에 배속되었다.’고 하였다.
그녀는 또 아뢰기를 ‘첩은 본래 을 배웠는데, 白玉이라 두드리면 소리가 되고, 犀革으로 만들었사옵니다.
원컨대 첩에게 하사하여 주시옵소서.’ 하므로 帝는 명하여 주게 하였다.
악기를 가지고 들어오자 명하여 〈涼州曲〉을 연주하였는데 音韻이 밝고 빼어나서 이를 듣고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하였다.
지금 이 설로써 비교해보면 합치되지 않는 것이 없다.
필시 장호가 그 당시에 이러한 일이 있음을 보고서 지었을 것이다.
○ 故國은 淮‧蔡를 가리킨다.
오원제가 패한 뒤로부터 감로의 사변 이후까지가 역시 20여 년이 된다.
《지봉유설》에 “당나라 武宗의 병이 대단히 위독하자 孟才人이 노래와 생황으로써 친밀히 좌우에서 모시었다.
上이 그녀를 지목하며 말하기를 ‘나는 의당 살지 못할 것이다.
너는 어찌하겠느냐?’ 하자, 재인은 울며 아뢰기를 ‘청컨대, 죽음에 나아가겠습니다.’ 하고 드디어 한 가락 하만자를 노래하다가 氣가 막혀서 그 자리에서 죽었다.
장호의 시는 바로 이 일을 두고 이른 것이다.” 하였으나, 이는 옳지 않다.
맹재인이 노래한 것은 곧 장호가 심교교를 두고 읊은 시였는데, 기가 막혀서 당장에 죽었다.
그러므로 장호의 시에 또 “한 가락 하만자를 노래한다면, 황천의 옛 궁인을 조상해야 하리라.[却爲一聲河滿子 下泉須弔舊宮人]” 하였으니, 장호의 궁사는 심교교를 가리킨 것이요, 맹재인은 아니다.
○ 하만자는 곡의 명칭인데, 白樂天은 말하기를 “滄州 사람인데, 성은 河요, 이름은 滿이다.
開元 연간에 죄를 범하여 옥중에 갇혀 있으면서 이 곡을 지었다.
옥사를 심문하는 자가 불쌍하게 여겨 明皇에게 아뢰었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여 마침내 죄를 받았다.”고 하였다.
○ 장호의 〈觀獵〉 詩와 〈宮詞〉는 가 칭송한 작품인데, 〈궁사〉에 “故國三千里 深宮二十年 一聲何滿子 雙淚落君前”이라고 하였다.
小杜(杜牧)가 秋浦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장호와 더불어 詩友가 되었다.
두목이 장호의 〈궁사〉를 매우 애호하여 지어준 시에 “故國三千里라는 노래는 어떠하기에, 헛되이 부른 가사가 여섯 궁전을 가득 채웠는가.”라고 하였다.
○ 장호의 시에 ‘故國三千里 深宮二十年’이라고 하였는데 杜牧이 칭송하여 시를 짓기를 “가련하도다. 고국 삼천 리의 노래, 그저 부른 가사가 여섯 궁전을 가득 채웠네.[可憐故國三千里 虛唱歌詞滿六宮]”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鄭谷이 말하기를 “張生(張祜)의 故國三千里라는 노래를 아는 자는 오직 응당 杜紫微(杜牧)가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제현들이 시를 품평한 것이 이와 같으니, 장호의 시명이 어찌 귀중하지 않겠는가?
○ 백낙천이 말하기를 “하만자는 開元 연간에 滄州의 노래하는 사람이었다.
처형을 당할 때 이 곡을 바쳐 죽음을 대속하고자 하였으나 마침내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다.”라고 하고는, 백낙천이 시를 지어 말하기를 “세상에 전하는 만자는 사람의 이름이었으니, 형장에 나갈 때 비로소 이 곡이 완성되었네.
한 곡조 네 구절, 여덟 첩으로 부르니, 첫머리부터 줄곧 애끊는 소리라네.[世傳滿子是人名 臨就刑時曲始成 一曲四詞歌八疊 從頭便是斷腸聲]”라고 하였다.
○ 장호의 문집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武宗이 병이 위중해지자 孟才人이 노래와 생황으로 총애를 얻어 좌우에서 가까이 모셨다.
上이 그녀를 지목하며 말하기를 “내가 죽는다면 너는 어찌 하겠느냐?”라고 하니, 재인이 생황의 주머니를 가리키며 울면서 말하기를 “이것으로 목을 맬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또 “첩이 일찍이 노래를 익혔는데 원컨대 한 곡을 부르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上이 허락하니 곧 한 곡조의 하만자를 부르다가, 氣가 다하여 그 자리에서 죽었다.
上이 의원에게 명하여 살펴보게 하니, 의원이 말하기를 “맥은 아직도 따뜻한데, 창자는 이미 끊어졌습니다.”라고 하였으니, 하만자는 진실로 사람의 애를 끊을 수 있다.
장호가 시를 짓기를 “그녀의 노래와 자태로 인하여 교태로운 모습을 노래하였더니 궁중에 전파되어 열두 해 봄이 되었네.
한 곡조 하만자를 노래한다면 황천의 옛 재인에게 조문해야 하리라.”라고 하였다.
○ 또 ‘故國三千里 深宮二十年 一聲河滿子 雙淚落君前’이라는 시가 있다.
한 번은 ‘十二春’이라 하고, 한 번은 ‘二十年’이라고 하였으니 어느 것이 맞는지 알 수 없다.
杜牧之(杜牧)가 장호의 작품에 창수한 장편의 시가 있는데, 그 말구에 “가련하구나. 고국삼천리의 노래, 헛되이 부른 가사가 여섯 궁전을 가득 채웠네.”라고 한 것은 장호의 시명이 이와 같았음을 말하여 그의 불우함을 안타까워한 것이다.
元微之(元稹)가 일찍이 〈張湖南座爲唐有態作何滿子歌〉에서 “梨園의 제자들이 明皇(唐 玄宗)에게 곡을 연주하니, 한 번의 노래로 승은을 입어 기강이 느슨하여졌다네.
장차 하만자로 곡명을 삼으니, 御譜에 친히 제목을 붙여 악부를 편찬하였네.
魚家에서 궁궐로 들어올 때 원래 절구를 짓도록 하였는데, 葉氏는 나이가 있어 소리의 기운이 짧았네.”라고 하였다.
또 곡을 들게 된 이유가 서술되어 있는데 백낙천의 설과 같다.
○ 宮體의 단편시로 가창의 소리가 유려하여 자못 음조가 조화롭다.
중당 이후의 시인 중에 처사(장호)와 같이 구상이 정교한 사람을 어찌 많이 구할 수 있겠는가.
○ 하만자는 그 소리가 가장 슬프다.
백낙천의 시에 “한 곡조 네 구절, 여덟 첩으로 부르니, 첫머리부터 줄곧 애끊는 소리라네.”라고 하였는데, 이 시는 앞의 두 구가 더욱 슬프다.
이와 같이 슬픈 노래를 부르는데, 어찌 떨어지는 눈물을 금할 수 있겠는가.


역주
역주1 張祜 : 생몰년이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자는 承吉이며, 淸河(현재 河北省 鋸鹿 부근) 사람이다. 長慶 연간에 令狐楚에게 추천을 받기도 하는 등 관직을 얻을 기회가 있었으나 끝내 실패하고 淮南에서 은거하다 삶을 마쳤다. 宮詞로 유명하며, 《張處士詩集》이 전한다.
역주2 故國 : 고향을 지칭한다.
역주3 何滿子 : 당나라 현종 때 유명한 가수의 이름에서 유래한 곡조의 이름이다. 白居易가 지은 〈廳歌六絶句〉 제5수 ‘何滿子’의 詩序에 “개원 연간의 滄州의 가수 何滿子가 처형을 당할 때 이 곡을 바쳐 죽음을 대속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다.[開元中 滄州有歌者何滿子 臨刑 進此曲以贖死 竟不得免]”라고 하였다. 또한 蘇鶚의 《杜陽雜編》에는 “文宗 때 궁인 沈阿翹가 임금을 위하여 何滿子舞를 추었는데, 시어와 자태가 모두 아름다웠다.[文宗時 宮人沈阿翹 爲上舞何滿子 調辭風態 率皆宛暢]”라고 하였다. 후대에는 詞牌名으로도 쓰였다.
역주4 甘露의 사변 : 唐 文宗 때 재상 李訓‧王涯 등이 宦官을 살해할 계책을 세웠다 발각되어 처형된 사건을 지칭한다. 金吾廳 뒤 석류나무에 甘露가 있다고 고하여 환관들을 유인하였기에 감로지변이라고 칭한다.
역주5 方響 : 악기의 하나로, 상하 2단으로 된 틀에 장방형의 철판을 각각 8개씩 드리우고 2개의 채로 쳐서 소리를 낸다.
역주6 白傅 : 당나라 때 太子少傅를 지낸 白居易를 가리킨다.
역주7 맑은……있고 : 玄暉는 南齊의 시인인 謝脁의 字이다. 그가 지은 〈晩登三山還望京邑〉 시에 “남은 노을은 흩어져 비단을 이루고, 깨끗한 강물은 맑기가 비단결 같다.[餘霞散成綺 澄江淨如練]”라는 시구로 유명한데, 李白은 〈金陵城西樓月下吟〉에서 “맑은 강은 깨끗하기가 비단과 같다는 표현 알겠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길이 사현휘를 회상하게 하네.[解道澄江淨如練 令人長憶謝玄暉]”라고 하였다고 한다. 謝玄暉는 남조시대에 시로 유명한 문인으로 謝靈運, 謝惠連 등과 더불어 ‘三謝’로 칭해진다. 오언시에 뛰어났다고 전한다.
역주8 강남에……있다 : 賀方回의 〈靑玉案曲〉 중 ‘彩筆新題斷膓’ 句가 유명한데, 황정견이 〈寄賀方回〉에서 ‘解作江南斷腸句 只今惟有賀方回’라고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賀方回는 북송시대 문인으로, 본명이 賀鑄인데 ‘慶湖遺老’라고 자호하였으며, 《東山樂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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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삼백수(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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