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集評]○ 李商隱詩可憐夜半虛前席 不問蒼生問鬼神 此詩連上接下見之 則可憐二字 改作如何似當 - 朝鮮 李睟光, 《芝峯類說》 卷12, 文章部5, 〈唐詩〉
東坡論此 謂君子憂治世而危明主 此一句 爲古今害敎之嚆矢 殊不覺當時實有几席之憂也
唐人詩云 可憐夜半虛前席 不問蒼生問鬼神 此亦未審也
始也 帝深悅之 及其在外歲餘 帝思誼徵之 因受釐 故問鬼神事 夫思之者 思前言也 豈全不及其他乎
今攷其疏 陛下誰憚而久不爲此 詳其語脈 分明是勸用其言也
勸用而稍施焉 則文帝亦不可少之矣 - 朝鮮 李瀷, 《星湖僿說》 卷21, 經史門, 〈賈疏〉
○ 李義山詠賈生云 可憐夜半虛前席 不問蒼生問鬼神
雖同一律 皆有新意 - 宋 王應麟, 《困學紀聞》 卷18
如義山林和靖之詩 則雖說賈誼相如 然反其意而用之矣
自非學力高邁 超越尋常拘攣之見 不規規然蹈襲前人陳迹者 何以臻此
馬子才有句云 可憐一覺登天夢 不夢商巖夢鄧郞 用此意也- 宋 蔡正孫, 《詩林廣記》 前集卷6
○ 晩唐絶 東風不與周郞便 銅雀春深鎖二喬 可憐半夜虛前席 不問蒼生問鬼神 皆宋人議論之祖
世希大雅 或以爲過盛唐 具眼觀之 不待其辭畢矣 - 明 胡應麟, 《詩藪》 外編1
○ 賈生前席 猶爲虛禮 況無宣室之訪逮耶 自傷更在言外 - 淸 何焯, 《三體唐詩評》
○ 何曰 徒問鬼神 賈生所以弔屈也 彤庭初至 才調莫知 傷之如何 又後世之弔賈矣 - 淸 沈厚塽, 《李義山詩集輯評》
○ 紀曰 純用論議 然以唱歎出之 故佳 - 淸 沈厚塽, 《李義山詩集輯評》
上章亦云 賈生事鬼 蓋因嶺南瘴癘之鄕 故以借慨 不解者 乃以爲議論 - 淸 馮浩, 《玉谿生詩箋注》 卷2
詠史諸作 則指正論 如詠宮妓及涉洛州龍池北齊與此詩皆是也
漢文賈生 可謂明良遇合 乃召對靑蒲 不求讜論 而涉想虛無 則孱主庸臣 又何責耶 - 現代 兪陛雲, 《詩境淺說》
且不恤國事 不重民生 尤非求賢之意 義更正大 - 現代 劉永濟, 《唐人絶句精華》
○ 文帝和賈誼之間的關系 竝不是像李商隱所寫的那樣
就以問鬼神之道於宣室這件事而論 文帝剛剛虔誠地進行了祭祀 接著就接見賈誼
而鬼神之事 在古人的世界觀中 是占有很重要的位置的 所以因此問及 也很自然
在宣室受厘之後問鬼神 絶不排斥在其他的地點時間問蒼生 這是很容易理解的 - 現代 沈祖棻, 《唐人絶詩淺釋》
[集評]○ 이상은의 시 ‘可憐夜半虛前席 不問蒼生問鬼神’은 이 시의 앞부분을 받아 뒷부분과 연결하여 볼 때, ‘可憐’ 두 자는 ‘如何’로 바꾸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 그러나 도리어 나중에는 가의를 내쫓아 湘水에 이르러 屈原을 조문하도록 하니, 이는 참소하는 자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문제의 밝은 지혜로도
는 어찌할 수 없었나 보다.
東坡(소식)가 이에 대해 논하기를
라고 하였으니, 이 한 구절은 예나 지금이나 교화를 해치는 嚆矢가 되었으니, 당시에 실로
은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子瞻(소식)의 작은 지혜가 어떻게 이것을 알 수 있었겠는가?
唐人의 詩에 ‘可憐夜半虛前席 不問蒼生問鬼神’이라고 하였으니, 이것도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
○ 처음에 문제는 가의를 매우 좋아하였다. 그가 외지에서 일 년 넘게 있자 문제는 가의를 생각하여 그를 불러들였는데, 그때 제사고기를 받았기 때문에 귀신에 대한 일을 물은 것이다. 무릇 가의를 생각했다는 것은 그가 전에 한 말을 생각했다는 것이니, 어떻게 다른 것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겠는가?
○ 지금 그의 疏를 상고해보건대 “陛下께서는 누구를 꺼려하여 오래도록 이 일을 행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으니, 이 말의 문맥을 자세히 따져보면 그의 말을 시행하도록 권면했던 것이 분명하다.
권면했던 것이 조금 시행되었으니, 문제 역시 하찮게 여길 수 없다.
○ 李義山(李商隱)은 〈詠賈生〉에서 “안타깝다 한밤중에 공연히 자리를 앞으로 당겨, 창생을 묻지 않고 귀신을 묻는구나.[可憐夜半虛前席 不問蒼生問鬼神]”라고 하였고,
馬子才(馬存)는 〈詠文帝〉에서 “가련하다 하늘에 오른 꿈을 한 번 깨고 나니,
을 꿈꾸지 않고
을 꿈꾸었네.[可憐一覺登天夢 不夢商巖夢櫂郞]”라고 하였는데,
“문인들이 고사를 사용하는 데에는 그 일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고, 反意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王元之의 〈謫守黃岡謝表〉에 ‘宣室에서 귀신에 대해 물은 것이 어찌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서이겠는가.
는 오직 죽기를 기약하여 알린다.’라고 하였다.
이 한 연은 매양 사람들에게 道가 있다고 칭해지지만 모두 賈誼와 相如의 일을 그대로 쓴 것일 뿐이다.
李義山(이상은)과 林和靖(林逋)의 시는 비록 賈誼와 相如를 말한 것이지만, 반의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반의는〉 스스로 학력이 고매하여 평범한 견식을 뛰어넘어 융통성 없이 앞 사람들의 전적을 답습하지 않는 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여기에 이를 수 있겠는가.
馬子才(馬存)가 ‘가련하다 하늘에 오른 꿈을 한 번 깨고 나니, 商巖을 꿈꾸지 않고 櫂郞을 꿈꾸었네.[可憐一覺登天夢 不夢商巖夢櫂郞]’라고 한 구절도 이러한 뜻을 사용한 것이다.”
○ 만당의 절구
와 “안타깝다 한밤중에 공연히 자리를 앞으로 당겨, 창생을 묻지 않고 귀신을 묻는구나.[可憐半夜虛前席 不問蒼生問鬼神]”는 모두 송나라 사람의 의론시의 원조이다.
간혹 지극히 뛰어난 것이 있지만 역시 기운이 쇠하고 꺾여서 開元‧天寶 연간과는 천양지차이다.
그러나 정을 그린 것이 슬퍼서 사람을 쉽게 감동시키고, 用事는 교묘하고 적절하여 세속을 기쁘게 하는 데 능숙하다.
세상에는
가 드물어서, 혹자는 盛唐의 시보다 낫다고 하는데, 안목을 갖춘 자가 이를 본다면 그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 가생과 이야기할 때 자리를 당겨 앉은 것도 오히려 虛禮가 되고 말았다. 하물며 宣室에서 부르지 않았다면 어떠하였겠는가. 스스로 슬퍼한 뜻이 더욱 언외에 나타난다.
○ 何焯이 말하였다. “다만 귀신에 대해 물은 것은 가생(가의)이 굴원을 조문했기 때문이다. 彤庭(皇宮)에 처음 이르렀는데 재주를 알아주지 않으니, 그 상심이 어떠했겠는가? 이 때문에 또 후세 사람들이 가의를 조문하는 것이다.”
○ 紀昀이 말하였다. “순전히 의론을 사용하였지만, 一唱三歎하게 하므로 아름답다.”
○ 義山(이상은)이 물러난 지 수년 만에 일어나 부름에 응하였다.
그러므로 매양 逐客‧逐臣으로 스스로를 비유하였으니, 이는 唐나라 사람들의 관습이다.
上章에서 또 가생이 귀신을 섬긴 것을 말하였으니, 대개 嶺南은 瘴癘의 마을이기 때문에 이를 빌려와 개탄한 것인데,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의론으로 여겼다.
詠史詩의 여러 작품은 모두 正論을 가리키니, 예컨대 〈詠宮妓〉 및 〈涉洛州〉‧〈龍池〉‧〈北齊〉와 이 시가 모두 그러하다.
漢 文帝와 賈生(가의)은 현명한 군주와 충성스런 신하가 만났다고 할 수 있는데, 靑蒲(天子의 內庭)에 불러들여 讜論을 구하지 않고 虛幻한 것을 생각하였으니, 유약한 군주와 용렬한 신하야 또 무엇을 꾸짖겠는가.
○ 程夢星의 《箋注》에 “이 시는 李德裕가 武宗이 仙道를 좋아함을 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시에서 蒼生을 묻지 않음을 책망한 것을 보면, 仙道를 좋아함이 부당하다고 지적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또 國事를 돌보지 않고, 민생을 중히 여기지 않음은 더욱이 어진 인재를 구하는 뜻이 아니니, 그 뜻이 더욱 정대하다.
○ 문제와 가의 사이의 관계는 모두 이상은이 묘사한 그것과는 같지 않다.
宣室에서 귀신의 道에 대해 물은 일로 논하자면, 문제가 막 정성스레 제사를 드린 다음, 연이어 가의를 맞이하였다.
귀신에 관한 일은 옛사람들의 세계관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니, 이 때문에 물은 것으로 이는 매우 자연스럽다.
선실에서 제사 지낸 고기를 받은 뒤에 귀신에 관해 물은 것이지, 결코 다른 장소와 시간에 민생에 대해 묻는 것을 배제한 것은 아니니, 이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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