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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詩三百首(3)

당시삼백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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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商隱
賈生才調更
可憐夜半虛
[集評]○ 李商隱詩可憐夜半虛前席 不問蒼生問鬼神 此詩連上接下見之 則可憐二字 改作如何似當 - 朝鮮 李睟光, 《芝峯類說》 卷12, 文章部5, 〈唐詩〉
○ 然猶放逐之 有造湘弔屈之歎 讒口爲之也
文帝之明 而無奈絳灌何也
東坡論此 謂君子憂治世而危明主 此一句 爲古今害敎之嚆矢 殊不覺當時實有几席之憂也
子瞻小慧 何足以知之
唐人詩云 可憐夜半虛前席 不問蒼生問鬼神 此亦未審也
始也 帝深悅之 及其在外歲餘 帝思誼徵之 因受釐 故問鬼神事 夫思之者 思前言也 豈全不及其他乎
今攷其疏 陛下誰憚而久不爲此 詳其語脈 分明是勸用其言也
勸用而稍施焉 則文帝亦不可少之矣 - 朝鮮 李瀷, 《星湖僿說》 卷21, 經史門, 〈賈疏〉
○ 李義山詠賈生云 可憐夜半虛前席 不問蒼生問鬼神
馬子才詠文帝云 可憐一覺登天夢 不夢商巖夢櫂郞
雖同一律 皆有新意 - 宋 王應麟, 《困學紀聞》 卷18
○ 藝苑雌黃云
文人用故事 有直用其事者 有反其意而用之者
王元之謫守黃岡謝表云 宣室鬼神之問 豈望生還
茂陵封禪之書 惟期死報
此一聯每爲人所稱道 然皆直用賈誼相如事耳
如義山林和靖之詩 則雖說賈誼相如 然反其意而用之矣
自非學力高邁 超越尋常拘攣之見 不規規然蹈襲前人陳迹者 何以臻此
馬子才有句云 可憐一覺登天夢 不夢商巖夢鄧郞 用此意也- 宋 蔡正孫, 《詩林廣記》 前集卷6
○ 晩唐絶 東風不與周郞便 銅雀春深鎖二喬 可憐半夜虛前席 不問蒼生問鬼神 皆宋人議論之祖
間有極工者 亦氣韻衰颯 天壤開寶
然書情則愴惻而易動人 用事則巧切而工悅俗
世希大雅 或以爲過盛唐 具眼觀之 不待其辭畢矣 - 明 胡應麟, 《詩藪》 外編1
○ 賈生前席 猶爲虛禮 況無宣室之訪逮耶 自傷更在言外 - 淸 何焯, 《三體唐詩評》
○ 何曰 徒問鬼神 賈生所以弔屈也 彤庭初至 才調莫知 傷之如何 又後世之弔賈矣 - 淸 沈厚塽, 《李義山詩集輯評》
○ 紀曰 純用論議 然以唱歎出之 故佳 - 淸 沈厚塽, 《李義山詩集輯評》
○ 義山退居數年 起而應闢
故每以逐客逐臣自喩 唐人習氣也
上章亦云 賈生事鬼 蓋因嶺南瘴癘之鄕 故以借慨 不解者 乃以爲議論 - 淸 馮浩, 《玉谿生詩箋注》 卷2
○ 玉谿絶句 屬辭蘊藉
詠史諸作 則指正論 如詠宮妓及涉洛州龍池北齊與此詩皆是也
漢文賈生 可謂明良遇合 乃召對靑蒲 不求讜論 而涉想虛無 則孱主庸臣 又何責耶 - 現代 兪陛雲, 《詩境淺說》
○ 程夢星箋注 此謂李德裕諫武宗好仙也
按詩責其不問蒼生 則不止好仙爲不當
且不恤國事 不重民生 尤非求賢之意 義更正大 - 現代 劉永濟, 《唐人絶句精華》
○ 文帝和賈誼之間的關系 竝不是像李商隱所寫的那樣
就以問鬼神之道於宣室這件事而論 文帝剛剛虔誠地進行了祭祀 接著就接見賈誼
而鬼神之事 在古人的世界觀中 是占有很重要的位置的 所以因此問及 也很自然
在宣室受厘之後問鬼神 絶不排斥在其他的地點時間問蒼生 這是很容易理解的 - 現代 沈祖棻, 《唐人絶詩淺釋》


〈가생〉
이상은
선실에서 어진 이 구하여 쫓겨난 신하 부르니
가생의 재주 다시 짝할 이가 없네
안타깝다 한밤중에 공연히 자리를 앞으로 당겨
창생을 묻지 않고 귀신을 묻는구나
[集評]○ 이상은의 시 ‘可憐夜半虛前席 不問蒼生問鬼神’은 이 시의 앞부분을 받아 뒷부분과 연결하여 볼 때, ‘可憐’ 두 자는 ‘如何’로 바꾸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 그러나 도리어 나중에는 가의를 내쫓아 湘水에 이르러 屈原을 조문하도록 하니, 이는 참소하는 자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문제의 밝은 지혜로도 는 어찌할 수 없었나 보다.
東坡(소식)가 이에 대해 논하기를 라고 하였으니, 이 한 구절은 예나 지금이나 교화를 해치는 嚆矢가 되었으니, 당시에 실로 은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子瞻(소식)의 작은 지혜가 어떻게 이것을 알 수 있었겠는가?
唐人의 詩에 ‘可憐夜半虛前席 不問蒼生問鬼神’이라고 하였으니, 이것도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
○ 처음에 문제는 가의를 매우 좋아하였다. 그가 외지에서 일 년 넘게 있자 문제는 가의를 생각하여 그를 불러들였는데, 그때 제사고기를 받았기 때문에 귀신에 대한 일을 물은 것이다. 무릇 가의를 생각했다는 것은 그가 전에 한 말을 생각했다는 것이니, 어떻게 다른 것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겠는가?
○ 지금 그의 疏를 상고해보건대 “陛下께서는 누구를 꺼려하여 오래도록 이 일을 행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으니, 이 말의 문맥을 자세히 따져보면 그의 말을 시행하도록 권면했던 것이 분명하다.
권면했던 것이 조금 시행되었으니, 문제 역시 하찮게 여길 수 없다.
○ 李義山(李商隱)은 〈詠賈生〉에서 “안타깝다 한밤중에 공연히 자리를 앞으로 당겨, 창생을 묻지 않고 귀신을 묻는구나.[可憐夜半虛前席 不問蒼生問鬼神]”라고 하였고,
馬子才(馬存)는 〈詠文帝〉에서 “가련하다 하늘에 오른 꿈을 한 번 깨고 나니, 을 꿈꾸지 않고 을 꿈꾸었네.[可憐一覺登天夢 不夢商巖夢櫂郞]”라고 하였는데,
○ 《藝苑雌黃》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문인들이 고사를 사용하는 데에는 그 일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고, 反意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王元之의 〈謫守黃岡謝表〉에 ‘宣室에서 귀신에 대해 물은 것이 어찌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서이겠는가.
는 오직 죽기를 기약하여 알린다.’라고 하였다.
이 한 연은 매양 사람들에게 道가 있다고 칭해지지만 모두 賈誼와 相如의 일을 그대로 쓴 것일 뿐이다.
李義山(이상은)과 林和靖(林逋)의 시는 비록 賈誼와 相如를 말한 것이지만, 반의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반의는〉 스스로 학력이 고매하여 평범한 견식을 뛰어넘어 융통성 없이 앞 사람들의 전적을 답습하지 않는 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여기에 이를 수 있겠는가.
馬子才(馬存)가 ‘가련하다 하늘에 오른 꿈을 한 번 깨고 나니, 商巖을 꿈꾸지 않고 櫂郞을 꿈꾸었네.[可憐一覺登天夢 不夢商巖夢櫂郞]’라고 한 구절도 이러한 뜻을 사용한 것이다.”
○ 만당의 절구 와 “안타깝다 한밤중에 공연히 자리를 앞으로 당겨, 창생을 묻지 않고 귀신을 묻는구나.[可憐半夜虛前席 不問蒼生問鬼神]”는 모두 송나라 사람의 의론시의 원조이다.
간혹 지극히 뛰어난 것이 있지만 역시 기운이 쇠하고 꺾여서 開元‧天寶 연간과는 천양지차이다.
그러나 정을 그린 것이 슬퍼서 사람을 쉽게 감동시키고, 用事는 교묘하고 적절하여 세속을 기쁘게 하는 데 능숙하다.
세상에는 가 드물어서, 혹자는 盛唐의 시보다 낫다고 하는데, 안목을 갖춘 자가 이를 본다면 그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 가생과 이야기할 때 자리를 당겨 앉은 것도 오히려 虛禮가 되고 말았다. 하물며 宣室에서 부르지 않았다면 어떠하였겠는가. 스스로 슬퍼한 뜻이 더욱 언외에 나타난다.
○ 何焯이 말하였다. “다만 귀신에 대해 물은 것은 가생(가의)이 굴원을 조문했기 때문이다. 彤庭(皇宮)에 처음 이르렀는데 재주를 알아주지 않으니, 그 상심이 어떠했겠는가? 이 때문에 또 후세 사람들이 가의를 조문하는 것이다.”
○ 紀昀이 말하였다. “순전히 의론을 사용하였지만, 一唱三歎하게 하므로 아름답다.”
○ 義山(이상은)이 물러난 지 수년 만에 일어나 부름에 응하였다.
그러므로 매양 逐客‧逐臣으로 스스로를 비유하였으니, 이는 唐나라 사람들의 관습이다.
上章에서 또 가생이 귀신을 섬긴 것을 말하였으니, 대개 嶺南은 瘴癘의 마을이기 때문에 이를 빌려와 개탄한 것인데,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의론으로 여겼다.
○ 玉谿(이상은)의 절구는 말이 함축적이다.
詠史詩의 여러 작품은 모두 正論을 가리키니, 예컨대 〈詠宮妓〉 및 〈涉洛州〉‧〈龍池〉‧〈北齊〉와 이 시가 모두 그러하다.
漢 文帝와 賈生(가의)은 현명한 군주와 충성스런 신하가 만났다고 할 수 있는데, 靑蒲(天子의 內庭)에 불러들여 讜論을 구하지 않고 虛幻한 것을 생각하였으니, 유약한 군주와 용렬한 신하야 또 무엇을 꾸짖겠는가.
○ 程夢星의 《箋注》에 “이 시는 李德裕가 武宗이 仙道를 좋아함을 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시에서 蒼生을 묻지 않음을 책망한 것을 보면, 仙道를 좋아함이 부당하다고 지적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또 國事를 돌보지 않고, 민생을 중히 여기지 않음은 더욱이 어진 인재를 구하는 뜻이 아니니, 그 뜻이 더욱 정대하다.
○ 문제와 가의 사이의 관계는 모두 이상은이 묘사한 그것과는 같지 않다.
宣室에서 귀신의 道에 대해 물은 일로 논하자면, 문제가 막 정성스레 제사를 드린 다음, 연이어 가의를 맞이하였다.
귀신에 관한 일은 옛사람들의 세계관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니, 이 때문에 물은 것으로 이는 매우 자연스럽다.
선실에서 제사 지낸 고기를 받은 뒤에 귀신에 관해 물은 것이지, 결코 다른 장소와 시간에 민생에 대해 묻는 것을 배제한 것은 아니니, 이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역주
역주1 賈生 : 賈誼를 말한다. 가의는 西漢 초기의 유명한 정치가로 강력한 중앙집권을 주장하고 흉노의 침략에 항거하였다. 벼슬은 太中大夫에 이르렀으나, 나중에 長沙王太傅로 폄적되었다.
역주2 宣室求賢訪逐臣 : ‘宣室’은 漢나라 未央宮의 前殿인 正室을 말한다. ‘逐臣’은 쫓겨난 신하인데, 가의를 가리킨다. 가의는 長沙王太傅로 폄적되었는데, 몇 년 후 漢 文帝가 다시 장안으로 불러들여 선실에서 그를 접견하였다.
역주3 無倫 : 짝이 없다는 뜻으로, 견줄 대상이 없을 만큼 뛰어나다는 의미이다.
역주4 前席 : 西漢 때에는 무릎을 꿇고 앉았는데, 이 말은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의 무릎과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간 것을 형용한 것이다.
역주5 不問蒼生問鬼神 : 漢 文帝가 제사 후 제사고기를 받고 귀신의 본질에 대해 물은 것을 가리킨다. 《史記》 〈屈賈列傳〉에 “그 뒤 일 년쯤 지나 가생은 孝文帝에게 불려갔다. 효문제가 마침 제사 지낸 고기를 받고 宣室에 앉아 있었다. 효문제는 宣室에 앉아 귀신에 대해 느낀 바가 있어 가생에게 귀신의 본질에 대해 물었다. 가생이 귀신에 관한 이치를 자세히 설명하느라 밤이 깊자, 효문제는 그 이야기에 빠져서 자기도 모르게 자리를 앞으로 당겨 바싹 다가가서 들었다. 설명을 마치자, 효문제는 ‘내가 오래도록 그대를 보지 못하여, 스스로 그대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대에게 미치지 못하는구나.’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역주6 絳灌의 무리 : 漢 文帝의 신하였던 絳侯 周勃과 懿侯 灌嬰을 지칭한다. 이들의 참소로 賈誼가 쫓겨나 張沙王太傅가 되었다.
역주7 君子는……여긴다 : 蘇軾의 〈田表聖奏議序〉에 “옛날 君子들은 반드시 治世를 걱정하고 明主를 위태롭게 여겼으니, 明主는 남보다 뛰어난 자품이 있고 治世는 두려워할 만한 방비가 없기 때문이다. 남보다 뛰어난 자품이 있으면 반드시 그 신하를 가볍게 여기고, 두려워할 만한 방비가 없으면 반드시 그 백성을 함부로 대하니, 이는 君子가 매우 두려워하는 바이다.[古之君子 必憂治世而危明主 明主有絶人之資 而治世無可畏之防 夫有絶人之資 必輕其臣 無可畏之防 必易其民 此君子之所甚懼者也]”라고 보인다.
역주8 几席 사이에 있는 근심 : 앉아 있는 자리, 즉 가까운 곳에 있는 근심을 이른다. 蘇軾이 말하기를 “생각이 千里 밖에 있지 않으면 근심이 几席의 아래에 있다.[慮不在千里之外 則患在几席之下]”라고 하였다.
역주9 商巖 : 傅巖의 들에서 담장을 쌓다가 후에 商王 武丁에게 추천되어 재상이 된 傅說을 말한다. 이후 ‘商巖’은 재야의 賢士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역주10 櫂郞 : 棹郞이라고도 한다. 뱃사공이었던 鄧通을 지칭하는데, 후에 아첨하여 임금의 총애를 받는 인물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역주11 李義山……있다 : 이 《困學紀聞》의 내용은 李裕元의 《林下筆記》 〈四時香館編 評詩〉에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역주12 茂陵의 封禪書 : 茂陵은 한나라의 문장가인 司馬相如의 本家가 있는 곳이다. 사마상여가 만년에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인 茂陵에 가 있을 적에 漢 武帝가 “사마상여가 병으로 위독하다고 하니, 속히 사람을 보내어 그의 저서를 가져오도록 하라.” 하였다. 使者가 그의 집에 가 보니, 사마상여는 이미 죽었고 그의 아내가 일찍이 상여가 저술한 책 한 권을 주었는데, 그 遺書가 바로 封禪書이다. 이것을 가져다가 무제에게 바치니, 무제가 이를 매우 기이하게 여기고 뒤에 그의 말에 따라서 과연 봉선을 거행하였다.
역주13 東風……갇혔으리라 : 《唐詩三百首 3》 290번 〈赤壁〉 참조.
역주14 大雅 : 원래 《詩經》을 구성하는 四始의 하나인데, 詩歌의 正聲이므로 여기서는 크게 바른 시가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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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04 가생 770

당시삼백수(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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