駱賓王(627~684?)
字는 觀光이며, 婺州 義烏(지금의 浙江省 義烏縣) 사람이다. 7세 때 〈詠鵝〉라는 시를 지어 어린 시절부터 이미 詩名이 있었다. 王勃‧楊炯‧盧照隣과 함께 初唐四傑로 불렸다.
처음엔 道王 李元慶의 屬官이었는데, 高宗 末年에 武功主簿‧長安主簿가 되었다가 侍御史로 옮겨갔다. 시어사를 맡고 있을 때 則天武后가 점차 전횡을 일삼자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諷諫하였고, 이 때문에 노여움을 사서 下獄되었다. 석방된 후에는 臨海縣(지금의 浙江省 天台縣)丞으로 좌천되었는데, 관직을 버리고 나아가지 않았다. 中宗 嗣聖 元年(684) 徐敬業이 군사를 일으켜 측천무후를 토벌하려 했을 때, 서경업의 막료가 되어 유명한 〈討武曌檄〉을 起草하였다. 그 檄文을 본 측천무후가 왜 이런 사람을 임용하지 않았냐며 재상을 힐책했다는 기록이 《新唐書》 〈文藝傳〉에 보인다. 서경업의 군대가 패한 후 그는 종적이 묘연해졌는데, 피살되었다는 설도 있고, 강에 투신해서 죽었다거나 혹은 도망쳐서 중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五言律詩의 정립에 공헌하였으며, 당대 관료들의 綺麗한 문풍에 반대했다. 지금 《駱臨海集》이 전한다. 《唐詩三百首》에 수록된 작품으로 〈在獄詠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