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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韓愈(2)

당송팔대가문초 한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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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한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唐大家韓文公文抄 卷8 記‧傳
歸安 鹿門 茅坤 批評
孫男 闇叔 著 重訂
通篇不及滕王閣中情事하고 而止以生平感慨作하니 이라
愈少時則聞江南多臨觀之美 而滕王閣獨爲第一하야 有瑰偉絶特之稱이라
及得三王所爲序賦記等하니 壯其文辭하야 益欲往一觀而讀之하야 以忘吾憂 繫官于朝하야 願莫之遂하니라
十四年 便道取疾하야 以至海上하니 又不得過南昌而觀所謂滕王閣者하니라
其冬 以天子하고 加恩區內 移刺袁州하니라
袁於南昌爲屬邑이라 私喜幸自語호대 以爲當得躬詣大府하야하고
及其無事且還 儻得一至其處하야 償所願焉이라
至州之七月 詔以中書舍人太原王公爲御史中丞하야 觀察江南西道
洪, 江, 饒, 虔, 吉, 信, 撫, 袁 悉屬治所하니 八州之人 前所不便及所願欲而不得者 公至之日하니라
大者驛聞하고 小者立變하며 春生秋殺하니 令修於庭戶數日之間하야 而人自得於湖山千里之外하니라
吾雖欲出意見하야 論利害하고 聽命於幕下 而吾州乃無一事可假而行者하니
又安得捨己所事以勤館人이리오 則滕王閣又無因而至焉矣로다
其歲九月 人吏浹和하니라 公與燕于此閣하니 文武賓士皆與在席이라
酒半 合辭言曰 此屋不修且壞러니 適理新之하니 公所爲文 實書在壁이라
今三十年而公來爲邦伯하고 適及期月하야 公又來燕于此하니 公烏得無情哉 公應曰 諾
於是棟楹梁桷板檻之腐黑撓折者 盖瓦級甎之破缺者 赤白之漫漶不鮮者 治之則已 無侈前人하고 無廢後觀하니라
工旣訖功 公以衆飮하고 而以書命愈曰 子其爲我記之하라
愈旣以未得造觀爲歎이나 竊喜載名其上하고 詞列三王之次 有榮耀焉하야 乃不辭而承公命하니라
其江山之好 登望之樂 雖老矣 如獲從公遊 尙能爲公賦之하리라


01. 滕王閣을 새로 重修하고 쓴 記文
전편에 滕王閣의 사정은 언급하지 않고 다만 평소의 感慨만을 가지고 지었으니, 문장의 변화와 기복이 자유분방하다.
내가 소싯적에, 江南에는 구경할 만한 아름다운 곳이 많으나, 그중에서도 滕王閣이 제일이어서 아름답고 웅장함이 뛰어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唐寅(明), 〈滕王閣圖〉(부분)唐寅(明), 〈滕王閣圖〉(부분)
〈뒤에〉 세 王氏(王勃王緖王仲舒)가 지은 등을 읽어보니 그 文辭가 호방하고 웅장하여 더욱 한번 가서 滕王閣을 구경하고 그 글들을 읽고서 나의 근심을 잊고 싶었으나, 조정의 관직에 매인 몸이라서 그 바람을 이루지 못하였다.
元和 14년(819)에 〈憲宗佛骨을 맞이하는 것을〉 비난한 죄로 降職되어 揭陽太守(潮州刺史)로 左遷되어 갈 때, 빠른 길을 잡아 급히 달려 潮州[海上]로 가다 보니, 또 南昌에 들를 〈겨를이 없어서〉 이른바 滕王閣이란 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해 겨울에 天子께서 즉위하시어 천하에 은혜를 입히셨으므로 나도 〈潮州에서〉 袁州刺史로 옮겨오는 〈은혜를 입었다.〉
袁州南昌屬邑이므로 나는 기뻐하고 다행으로 여기면서 ‘몸소 大府(觀察使府가 있는 南昌)로 가서 下執事에게 約束을 받고,
公事를 무사히 마치고서 돌아올 때에 만약 한 번 그곳에 갈 수 있다면 구경하고자 했던 소원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袁州에 부임한 지 7개월이 되는 달에 詔書를 내려 中書舍人 太原王公(王仲舒)을 御史中丞으로 삼아, 江南西道觀察하게 하였다.
洪州江州饒州虔州吉州信州撫州袁州는 모두 江南西道觀察使의 관할이므로, 8의 인민들이 전에 불편하게 여겼던 것과 원하였으나 얻지 못했던 것들을 이 부임한 날에 모두 革罷할 것은 혁파하고 시행할 것은 시행하였다.
큰 일은 驛站을 통해 조정에 보고하고, 작은 일은 즉시 變改하였으며, 봄에는 養育하고 가을에는 刑殺하니 君子의 길[]이 열리고 소인의 길[]이 닫혔다. 公廳에서 며칠 사이에 法令을 다스리니 천 리 밖 湖山의 인민들이 모두 스스로 만족해하였다.
나도 의견을 내어 利害를 논하고 觀察使 幕府로 가서 명령을 듣고 싶었으나, 내 고을 袁州에는 핑계를 대고서 幕府로 가야 할 만한 일이 하나도 없었으니,
또 어찌 내 所管事務를 버리고 〈幕府로 가서 南昌의〉 館人(客館을 관리하는 사람)을 수고롭게 해서야 되겠는가? 그래서 또 滕王閣에 갈 기회[]가 없었다.
그해 9월에 〈마침내〉 인민과 관리가 화합하였다. 王公監軍使와 함께 등왕각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文官武將幕賓士人이 모두 참석하였다.
酒筵이 반 쫌 진행되었을 때에 사람들이 입을 모아, “이 樓閣을 수리하지 않아 거의 무너지게 되었는데, 전에 께서 이곳에 從事(遊學)하실 적에 마침 이 이 새롭게 수리되니, 〈공께서 를 지으셨는데,〉 그때 께서 지으신 글이 실로 그 벽에 쓰여 있습니다.
지금 35년 만에 께서 이곳의 刺史[邦伯]로 오셨고, 오신 지 1년 만에 또 이곳에 오시어 연회를 여시니, 에게 어찌 情懷가 없겠습니까?”라고 하니, 王公은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썩어서 색깔이 검게 변했거나 휘거나 부러진 마룻대와 기둥, 들보와 서까래, 木板과 난간, 깨지거나 빠진 기왓장과 섬돌, 흐려져서 선명하지 않은 丹靑 등을 補修하기만 하고 전보다 화려하게 하지도 않았으며 後人들의 觀賞거리가 되지 못하게 하지도 않았다.
공사가 끝난 뒤에 王公이 〈또 사람들을 초청해〉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서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대는 나를 위해 記文을 지으라.”고 명하셨다.
나는 한탄스럽게도 이미 그곳에 가서 구경은 하지 못하였으나, 속으로 내 이름이 閣壁記載되고 내 글이 세 王氏의 글 뒤에 列記된다면 榮譽가 될 것을 기뻐하여, 사양하지 않고 王公을 받들었다.
江山의 아름다움과 누각에 올라 조망하는 즐거움은, 내 비록 늙었으나 왕공을 따라 유람할 기회를 얻는다면 오히려 왕공을 위해 를 지어 〈표현하리라.〉


역주
역주1 新修滕王閣記 : 滕王閣은 江西省 南昌市에 있다. 唐 高宗 顯慶 4년(659)에 滕王 李元嬰이 洪州都督으로 있을 때에 세운 樓閣이다. 이 누각의 壁上에는 王勃, 王緖, 王仲舒 등 세 文人의 序가 쓰여 있다.
이 序는 元和 15년(820)에 江南西道觀察使 王仲舒가 등왕각을 중수하고서 당시 袁州刺史로 있던 한유에게 부탁해 짓게 한 것이다.
역주2 波瀾婉而宕 : 詩文의 변화와 起伏이 자유분방함이다.
역주3 言事斥守揭陽 : 원화 14년(819)에 〈論佛骨表〉를 올려 간하였다가 憲宗의 노여움을 사서 潮州刺史로 좌천된 것을 이른다. 揭陽은 潮州의 屬縣이다. 本譯書 제1권의 〈論佛骨表〉 참조.
역주4 進大號 : 大號는 帝王의 稱號이고 進은 封進함이니, 곧 太子가 先皇의 뒤를 이어 卽位함을 이른다. 원화 15년(820)에 憲宗이 죽고 穆宗이 즉위한 것을 이른다. 옛날에 황제가 즉위하면 改元하고 大赦令을 내렸다.
역주5 約束於下執事 : 約束은 법령과 규약 등을 이르고, 下執事는 南昌府의 吏屬을 이른다.
역주6 寄目 : 눈을 붙인다는 말로 눈여겨봄이니, 곧 구경함이다.
역주7 罷行之 : 혁파할 것은 혁파하고 시행할 것은 시행하였음을 말한다.
역주8 陽開陰閉 : 陽은 군자이고 陰은 소인이니, 군자의 길이 열리고 소인의 길이 닫혔다는 말이다.
역주9 監軍使 : 조정에서 각 節度使府로 파견하여 군대를 감찰하게 한 관원이다.
역주10 前公爲從事此邦 : ≪唐宋八大家文鈔 校註集評≫에 “王仲舒의 소싯적 일을 가리킨 것이다. 그가 젊어서 어머니를 모시고 강남에 살 때에 이곳에 遊學(유람과 학습)한 적이 있고, 아울러 〈滕王閣賦〉를 지었다.”라고 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한유(2) 책은 2020.12.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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