唐大家韓文公文抄 卷8 記‧傳
歸安 鹿門 茅坤 批評
孫男 闇叔 著 重訂
通篇不及滕王閣中情事
하고 而止以生平感慨作
하니 이라
愈少時則聞江南多臨觀之美나 而滕王閣獨爲第一하야 有瑰偉絶特之稱이라
及得三王所爲序賦記等하니 壯其文辭하야 益欲往一觀而讀之하야 以忘吾憂나 繫官于朝하야 願莫之遂하니라
十四年
에 以
에 便道取疾
하야 以至海上
하니 又不得過南昌而觀所謂滕王閣者
하니라
袁於南昌爲屬邑
이라 私喜幸自語
호대 以爲當得躬詣大府
하야 受
하고
及其無事且還
에 儻得一至其處
면 竊
하야 償所願焉
이라
至州之七月에 詔以中書舍人太原王公爲御史中丞하야 觀察江南西道라
洪, 江, 饒, 虔, 吉, 信, 撫, 袁
이 悉屬治所
하니 八州之人
이 前所不便及所願欲而不得者
를 公至之日
에 皆
하니라
大者驛聞
하고 小者立變
하며 春生秋殺
하니 라 令修於庭戶數日之間
하야 而人自得於湖山千里之外
하니라
吾雖欲出意見하야 論利害하고 聽命於幕下나 而吾州乃無一事可假而行者하니
又安得捨己所事以勤館人이리오 則滕王閣又無因而至焉矣로다
其歲九月
에 人吏浹和
하니라 公與
燕于此閣
하니 文武賓士皆與在席
이라
酒半
에 合辭言曰 此屋不修且壞
러니 에 適理新之
하니 公所爲文
이 實書在壁
이라
今三十年而公來爲邦伯하고 適及期月하야 公又來燕于此하니 公烏得無情哉아 公應曰 諾다
於是棟楹梁桷板檻之腐黑撓折者와 盖瓦級甎之破缺者와 赤白之漫漶不鮮者를 治之則已요 無侈前人하고 無廢後觀하니라
工旣訖功에 公以衆飮하고 而以書命愈曰 子其爲我記之하라
愈旣以未得造觀爲歎이나 竊喜載名其上하고 詞列三王之次면 有榮耀焉하야 乃不辭而承公命하니라
其江山之好와 登望之樂은 雖老矣나 如獲從公遊면 尙能爲公賦之하리라
전편에 滕王閣의 사정은 언급하지 않고 다만 평소의 感慨만을 가지고 지었으니, 문장의 변화와 기복이 자유분방하다.
내가 소싯적에,
江南에는 구경할 만한 아름다운 곳이 많으나, 그중에서도
滕王閣이 제일이어서 아름답고 웅장함이 뛰어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唐寅(明), 〈滕王閣圖〉(부분)
〈뒤에〉 세 王氏(王勃‧王緖‧王仲舒)가 지은 序‧賦‧記 등을 읽어보니 그 文辭가 호방하고 웅장하여 더욱 한번 가서 滕王閣을 구경하고 그 글들을 읽고서 나의 근심을 잊고 싶었으나, 조정의 관직에 매인 몸이라서 그 바람을 이루지 못하였다.
元和 14년(819)에 〈憲宗이 佛骨을 맞이하는 것을〉 비난한 죄로 降職되어 揭陽太守(潮州刺史)로 左遷되어 갈 때, 빠른 길을 잡아 급히 달려 潮州[海上]로 가다 보니, 또 南昌에 들를 〈겨를이 없어서〉 이른바 滕王閣이란 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해 겨울에 天子께서 즉위하시어 천하에 은혜를 입히셨으므로 나도 〈潮州에서〉 袁州刺史로 옮겨오는 〈은혜를 입었다.〉
袁州는 南昌의 屬邑이므로 나는 기뻐하고 다행으로 여기면서 ‘몸소 大府(觀察使府가 있는 南昌)로 가서 下執事에게 約束을 받고,
公事를 무사히 마치고서 돌아올 때에 만약 한 번 그곳에 갈 수 있다면 구경하고자 했던 소원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袁州에 부임한 지 7개월이 되는 달에 詔書를 내려 中書舍人 太原王公(王仲舒)을 御史中丞으로 삼아, 江南西道를 觀察하게 하였다.
洪州‧江州‧饒州‧虔州‧吉州‧信州‧撫州‧袁州는 모두 江南西道觀察使의 관할이므로, 8州의 인민들이 전에 불편하게 여겼던 것과 원하였으나 얻지 못했던 것들을 公이 부임한 날에 모두 革罷할 것은 혁파하고 시행할 것은 시행하였다.
큰 일은 驛站을 통해 조정에 보고하고, 작은 일은 즉시 變改하였으며, 봄에는 養育하고 가을에는 刑殺하니 君子의 길[陽]이 열리고 소인의 길[陰]이 닫혔다. 公廳에서 며칠 사이에 法令을 다스리니 천 리 밖 湖山의 인민들이 모두 스스로 만족해하였다.
나도 의견을 내어 利害를 논하고 觀察使 幕府로 가서 명령을 듣고 싶었으나, 내 고을 袁州에는 핑계를 대고서 幕府로 가야 할 만한 일이 하나도 없었으니,
또 어찌 내 所管事務를 버리고 〈幕府로 가서 南昌의〉 館人(客館을 관리하는 사람)을 수고롭게 해서야 되겠는가? 그래서 또 滕王閣에 갈 기회[因]가 없었다.
그해 9월에 〈마침내〉 인민과 관리가 화합하였다. 王公이 監軍使와 함께 등왕각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文官‧武將‧幕賓‧士人이 모두 참석하였다.
酒筵이 반 쫌 진행되었을 때에 사람들이 입을 모아, “이 樓閣을 수리하지 않아 거의 무너지게 되었는데, 전에 公께서 이곳에 從事(遊學)하실 적에 마침 이 閣이 새롭게 수리되니, 〈공께서 賦를 지으셨는데,〉 그때 公께서 지으신 글이 실로 그 벽에 쓰여 있습니다.
지금 35년 만에 公께서 이곳의 刺史[邦伯]로 오셨고, 오신 지 1년 만에 또 이곳에 오시어 연회를 여시니, 公에게 어찌 情懷가 없겠습니까?”라고 하니, 王公은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썩어서 색깔이 검게 변했거나 휘거나 부러진 마룻대와 기둥, 들보와 서까래, 木板과 난간, 깨지거나 빠진 기왓장과 섬돌, 흐려져서 선명하지 않은 丹靑 등을 補修하기만 하고 전보다 화려하게 하지도 않았으며 後人들의 觀賞거리가 되지 못하게 하지도 않았다.
공사가 끝난 뒤에 王公이 〈또 사람들을 초청해〉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서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대는 나를 위해 記文을 지으라.”고 명하셨다.
나는 한탄스럽게도 이미 그곳에 가서 구경은 하지 못하였으나, 속으로 내 이름이 閣壁에 記載되고 내 글이 세 王氏의 글 뒤에 列記된다면 榮譽가 될 것을 기뻐하여, 사양하지 않고 王公의 命을 받들었다.
江山의 아름다움과 누각에 올라 조망하는 즐거움은, 내 비록 늙었으나 왕공을 따라 유람할 기회를 얻는다면 오히려 왕공을 위해 詩를 지어 〈표현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