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公未必知顔子之學이로되 特以其省試之文也일새 存之니라
論曰 登孔氏之門者衆矣
니 와 이 孰非由聖人之道
하야 爲君子之儒者乎
아
其於過行過言이 亦云鮮矣로되 而夫子擧不貳過惟顔氏之子하시니 其何故哉아 請試論之하노라
夫聖人
은 抱
하고 根中庸之至德
하야 苟發諸中形諸外者
가 不
思慮
라도 莫匪規矩
면
不善之心이 無自入焉이요 可擇之行이 無自加焉이라 故惟聖人無過니라
所謂過者
는 非謂發於行彰於言
하야 人皆謂之過而後爲過也
라 生于其心則爲過矣
니 顔子之過此類也
니라
不貳者는 盖能止之於始萌하고 絶之於未形하야 不貳之於言行也라
不思而得하야 從容中道하는 聖人也니 無過者也라 自明誠者는 擇善而固執之者也니
故夫子之言曰
라하고 又曰
ㄴ저하시니 言猶未至也
라
而孟子亦曰
라하니 皆謂不能無生於其心
이나 而亦不暴之於外
니 考之於聖人之道
면 差爲過耳
라
顔子自惟其若是也
라 於是居陋巷以致其誠
하고 飮一瓢以求其志
하야 不以富貴妨其道
하고 不以
易其心
이라
確乎不拔
하고 浩然自守
하야 나 任重道遠
하야 竟莫之致
하니라
是以夫子歎其不幸短命이라 今也則亡라하시니 謂其不能與己竝立於至聖之域하야 觀敎化之大行也라
不然이면 夫行發於身加於人하고 言發乎邇見乎遠하니 苟不愼也면 敗辱隨之라
而後思欲不貳過면 其於聖人之道에 不亦遠乎아 而夫子尙肯謂之其殆庶幾라하고
孟子尙復謂之具體而微者哉아라하니 則顔子之不貳過는 盡在是矣라 謹論하노라
06. 省試에 答案으로 제출한 ‘顔子가 허물을 거듭 범하지 않은 것’에 대한 論文
韓公이 반드시 顔子의 學問을 알았다고 할 수 없으나, 다만 그가 省試에 제출한 문장이기 때문에 存錄하였다.
論한다. 孔子의 門에 오른 자가 많았으니, 3천의 門徒와 四科에 든 10인 중에 그 누군들 聖人의 道를 행하여 君子儒가 된 이들이 아니었겠는가?
그들 중에 잘못된 행실과 잘못된 말을 한 이가 드물었다고 할 수 있는데, 夫子께서 같은 잘못을 거듭 범하지 않은 자로 오직 顔氏의 아들만을 擧論하셨으니, 이는 무엇 때문인가? 이를 한번 論하고자 한다.
聖人은 진실함으로 말미암아 밝아진 바른 성품[誠明之正性]을 소유하고, 偏倚와 過不及이 없는[中庸] 지극한 德이 마음에 뿌리를 박아서, 안에서 일어나서 밖에 드러나는 것이 思慮를 거치지 않고도 법도에 맞지 않음이 없다면
不善한 마음이 들어갈 곳이 없고 가려내야 할 행실이 증가할 틈이 없다. 그러므로 오직 성인만이 허물이 없을 수 있다.
이른바 허물이란 행동과 말에 드러나서 사람들이 모두 허물한 뒤에 허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불선한 생각이〉 생기면 그것이 바로 허물이니, 顔子의 허물은 이런 종류이다.
같은 허물을 거듭 범하지 않는 것은, 처음 싹틀 때에 막고 드러나기 전에 잘라버려 말과 행동에 허물을 거듭 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中庸〉에 “진실함으로 말미암아 밝아지는 것을 性이라 하고, 밝음으로 말미암아 진실해지는 것을 敎라 한다.”라고 하였으니, 진실함으로 말미암아 밝아진 자는 힘쓰지 않아도 道에 맞고
생각하지 않아도 道를 터득하여 從容(여유가 있는 모양)히 道에 맞는 聖人이니 허물이 없는 자이다. 밝음으로 말미암아 진실해지는 자는 道를 선택해 굳게 지키는 자이니,
힘쓰지 않으면 맞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면 터득하지 못하니, 허물을 거듭 범하지 않는 자이다.
그러므로 夫子의 말씀에 “顔回의 사람됨은 中庸을 선택하여 한 善을 얻으면 받들어 지켜 가슴에 새겨 잊지 않는다.”라고 하셨고, 또 “顔氏의 아들은 거의 道에 가까웠다.”라고 하셨으니, 이는 아직 지극하지 못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孟子 또한 “顔子는 聖人의 體를 갖추었으나 〈성인에 비해〉 微小하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모두 그 마음에 〈불선한 생각이〉 생겨남이 없지 않았으나, 또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니, 聖人의 道에 비하면 조금 허물이 됨을 말한 것이다.
顔子는 스스로 자기가 이와 같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누추한 골목에 살면서 〈자신의 수양에〉 정성을 다하고, 한 표주박의 물을 마시면서도(가난하게 살면서도) 자기의 뜻을 이루기를 구하여, 부귀로 인해 그 道를 해치지 않고 隱約(窮困)으로 인해 그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그 뜻이〉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았고 浩然한 기운을 스스로 지키면서, 〈孔子의 道가〉 높고 견고하여 숭상해야 할 만함을 알고서 〈孔子의 道를〉 뚫고 우러르는 勞苦를 잊었으나, 짐이 무겁고 길이 멀어서 끝내 도달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夫子께서 그는 “불행히도 목숨이 짧아 죽었다. 지금은 없다.”고 탄식하셨으니, 이는 그가 당신과 함께 至聖의 경지에 나란히 서서 교화가 크게 행해지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을 한탄하신 것이다.
〈안자가〉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행동이란 내 몸에서 나와 남에게 미치는 것이고, 말이란 가까이에서 출발하여 멀리에 나타나는 것이니, 삼가지 않으면 실패와 모욕이 뒤따른다.
그런 뒤에 허물을 거듭 범하지 않기를 생각한다면 성인의 道와의 거리가 멀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부자께서 오히려 그를 “거의 道에 가까웠다.”라고 하시고,
孟子도 오히려 다시 “聖人의 體를 갖추었으나 〈성인에 비해〉 微小하다.”고 하였으니, 顔子가 허물을 거듭 범하지 않은 것은 모두 여기에 있다. 삼가 論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