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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韓愈(2)

당송팔대가문초 한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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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한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通篇句字氣皆太史公髓 非昌黎本色이라 今書畫家亦有效人而得其解者하니 此正見其無不可處
元和二年四月十三日夜 愈與吳郡張籍閱家中舊書타가所爲張巡傳하니라
翰以文章自名하야 爲此傳頗詳密이라 然尙恨有闕者하니 不爲立傳이요 又不載雷萬春事首尾
遠雖材若不及巡者 開門納巡하고 位本在巡上이나 하야 無所疑忌하고 竟與巡俱守死하야 成功名하니라
城陷而虜하야 與巡死先後異耳 兩家子弟材智下하야 不能通知二父志하고
以爲巡死而遠就虜라하야 疑畏死而於賊이라
遠誠畏死 何苦守尺寸之地하야 하야 以與賊抗而不降乎
當其圍守時하야 外無蚍蜉蟻子之援이나 所欲忠者 國與主耳
而賊語以이라하니 遠見救援不至하고 而賊來益衆하곤 必以其言爲信이요
外無待而猶死守로되 人相食且盡하니 雖愚人亦能數日而知死處矣 遠之不畏死亦明矣
烏有城壞其徒俱死어늘 獨蒙媿恥求活 雖至愚者라도 不忍爲어늘 嗚呼 而謂遠之賢而爲之邪
說者又謂 遠與巡分城而守러니 城之陷 自遠所分始라하야 以此詬遠하니 此又與兒童之見無異
人之將死 其臟腑必有先受其病者 引繩而絶之에도 其絶必有處어늘
觀者見其然하고 從而尤之하니 其亦不達於理矣로다 小人之好議論하고 如是哉ㄴ저
如巡遠之所成就 如此卓卓이로되 猶不得免하니 其他則又何說
當二公之初守也 寧能知人之卒不救하고 棄城而逆遁 苟此不能守 雖避之他處何益이리오
及其無救而且窮也 將其創殘餓羸之餘하야 雖欲去 必不達이리라
二公之賢으로 其講之精矣 守一城하야 捍天下하고
以千百就盡之卒 戰百萬日滋之師하야 蔽遮江淮하고 沮遏其勢하야 天下之不亡 其誰之功也
當是時하야 棄城而圖存者 不可一二數 擅強兵하고 坐而觀者 相環也로되
不追議此하고 而責二公以死守하니 亦見其自比於逆亂하야而助之攻也로다
屢道於兩府間하야 親祭於其所謂하니라
其老人往往說巡遠時事云호대 賀蘭嫉巡遠之聲威功績出己上하야 不肯出師救하고
愛霽雲之勇且壯하야 不聽其語하고 強留之하야 具食與樂하고 延霽雲坐하니
霽雲慷慨語曰 雲來時 睢陽之人 不食月餘日矣 雲雖欲獨食이나 義不忍이요 雖食이라도 且不下咽이라하고
因拔所佩刀하야 斷一指하니 血淋漓어늘 以示賀蘭하니 一座大驚하야 皆感激爲雲泣下하니라
雲知賀蘭終無爲雲出師意하고 卽馳去하야 將出城 抽矢射佛寺浮圖하니 矢著其上甎半箭이어늘
曰 吾歸破賊하고 必滅賀蘭하리라 此矢所以志也라하니라 愈貞元中過泗州 船上人猶指以相語하니라
城陷 賊以刃脅降巡이나 巡不屈하니 卽牽去하야 將斬之하니라
又降霽雲하니 雲未應하니라 巡呼雲曰 男兒死耳언정 不可爲不義屈이라하니
雲笑曰 欲將以有爲也 公有言하니 雲敢不死리오하고 卽不屈하니라
張籍曰 有于嵩者하니 少依於巡하고 及巡起事 嵩常在圍中하니라
籍大曆中 於和州烏江縣見嵩하니 嵩時年六十餘矣 以巡初嘗得臨渙縣尉 好學無所不讀이라
籍時尙小하야 粗問巡遠事 不能細也 云 巡長七尺餘 鬚髥若神이라
嘗見嵩讀漢書하고 謂嵩曰 何爲久讀此 嵩曰 未熟也 巡曰 吾於書 讀不過三徧이로되 終身不忘也라하고
因誦嵩所讀書하니 盡卷不錯一字하니라 嵩驚하야 以爲巡偶熟此卷이라하야 因亂抽他帙以試하니 無不盡然이라
嵩又取架上諸書하야 試以問巡하니 巡應口誦無疑하니라
嵩從巡久 亦不見巡常讀書也하고 爲文章 操紙筆立書 未嘗起草하니라
初守睢陽時 士卒萬人이요 城中居人戶亦且數萬이로되 巡因一見問姓名이면 其後無不識者
巡怒 鬚髥輒張하니라 及城陷 賊縛巡等數하고 且將戮 巡起하니
其衆見巡起하고 或起或泣이어늘 巡曰 汝勿怖하라 命也라하니 衆泣不能仰視하니라
巡就戮時 顔色不亂하고 如平常하니라 寬厚長者 貌如其心하니라
與巡同年生이나 月日後於巡일새 呼巡爲兄하니라 死時年四十九니라
嵩貞元初死於亳宋間하니라 或傳嵩有田在亳宋間이러니 武人奪而有之한대
嵩將詣州라가 爲所殺하니라 嵩無子하니라 張籍云하니라


09. 〈張中丞傳〉의 後敍
全篇字句氣槪가 모두 太史公骨髓이고 昌黎本色이 아니다. 지금의 書畫家 중에도 남의 작품을 본받다가 그 정신[]을 터득하는 자가 있다. 여기에서 昌黎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것을 볼 수 있다.
元和 2년(807) 4월 13일 밤에, 나는 吳郡 사람 張籍과 함께 집에 있는 옛 書籍들을 열람하다가 李翰이 지은 〈張巡傳〉을 발견하였다.
李翰은 문장으로 自負[自名]하여, 이 을 지은 것이 자못 자상하고 세밀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한스럽게도 빠진 것이 있으니, 許遠을 위해 을 짓지 않은 것과 또 雷萬春 사적의 시말을 기재하지 않은 것이다.
許遠의 재능이 비록 張巡만 못한 것 같지만 睢陽城의 문을 열어 장순을 맞아들이고, 職位가 본래 장순보다 上位였음에도 兵權을 장순에게 주고 자기는 그의 부하로 처신하면서 의심하거나 시기함이 없었고, 끝내 장순과 함께 지키다가 죽어 功名을 이루었다.
이 함락되자 사로잡혀 〈죽었는데〉 장순과는 단지 먼저 죽고 뒤에 죽은 차이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두 집안 子弟들은 재능과 지혜가 低劣해 그 부친들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張家의 자제들은〉 장순은 被殺되었는데 許遠은 포로가 되었다고 하면서 〈허원이〉 죽음을 두려워해 에게 降服을 청한[辭服] 것으로 의심하였다.
허원이 진실로 죽음을 두려워하였다면 무엇 때문에 고생스럽게 작은 성을 지키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죽여 그 고기를 사졸에게 먹여가면서까지 적과 대항하며 항복하지 않았겠는가?
그가 포위된 성을 지킬 때에 성 밖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의 지원도 없었으나, 충성하고 싶었던 것은 나라와 임금뿐이었다.
그런데 들이 ‘나라는 망하고 임금은 죽었다.’고 말하니, 許遠은 구원병은 오지 않고 賊兵만 더욱 많아지는 것을 보고서 반드시 적의 말을 사실로 믿었을 것이고,
밖에 기대할 援軍이 없는데도 오히려 목숨을 걸고 지켰으되,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어 거의 씨가 마르는 지경이 되었으니, 비록 바보라도 며칠이면 죽게 될 것을 알았을 것이다.
〈이로써 보면〉 許遠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어찌 성이 함락되어 부하들이 모두 죽었는데 자기 혼자만 치욕을 무릅쓰고 살기를 구하였겠는가?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자라도 차마 그리하지 않을 것인데, 아! 허원처럼 賢明한 사람이 그리했을 것으로 여기는가?
이 일을 이야기하는 자들은 또 “許遠張巡을 나누어 지켰는데, 성의 함락이 허원이 지키던 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여, 이로써 허원을 비난하니, 이는 또 어린아이의 소견과 다를 것이 없다.
사람이 죽을 때에는 그 사람의 五臟六腑에 반드시 먼저 병이 든 곳이 있기 때문이고, 노끈을 당겨 끊을 때에도 반드시 끊기는 곳이 있는데,
傍觀者들은 이런 정황(죽고 끊김)만을 보고서 〈먼저 병이 든 부위와 끊어진 노끈만을〉 꾸짖으니, 이 또한 사리를 모르는 짓이다.
小人은 남을 평론하기만을 좋아하고 남의 아름다움을 이루어주기를 좋아하지 않음이 이와 같다.
張巡許遠은 성취한 공적이 이처럼 탁월한데도 오히려 남들의 비평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다른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張公許公 두 분이 처음 성을 지킬 적에, 어찌 남이 끝내 구원하지 않을 줄을 알고서 성을 버리고 지레 도망갈 수 있었겠는가? 만약 이곳을 지키지 못했다면 설령 다른 곳으로 도망갔다 하더라도 무슨 도움이 되었겠는가?
구원병이 오지 않은 데다 곤궁해졌을 적에 부상병과 주린 군사들을 이끌고서 떠나고자 해도 떠날 수 없었을 것이다.
은 현명한 분들로서 守備의 방책을 헤아린 것이 정밀하였다. 한 을 지켜 천하를 방어하고,
거의 죽어가는 천‧백의 군대로써 날마다 늘어나는 백만의 적군과 싸워 江淮 지역을 보호하고 적의 기세를 막아서, 천하가 망하지 않게 한 것이 누구의 공인가?
이때를 당하여 성을 버리고 도망가서 목숨을 보존하기를 도모한 자를 한둘로 셀 수 없고, 강성한 군대를 가지고도 앉아서 구경만 한 자가 사방에 널렸는데,
이런 무리들은 追究하지 않고 도리어 목숨을 걸고 을 지킨 두 을 꾸짖으니, 이에서 또한 저들은 자신을 난을 일으킨 叛賊에게 비유해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황당한 말을 만들어서 역적을 도와 두 분을 공격하는 것임을 볼 수 있다.
내 일찍이 汴州徐州節度府幕僚로 있을 적에 누차 두 사이를 왕래하면서 이른바 ‘雙廟’란 곳에 직접 제사를 올린 적이 있었는데,
그곳 노인들이 이따금 張巡許遠의 일을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다.
南霽雲賀蘭進明에게 援軍을 요청했을 적에, 賀蘭進明張巡許遠聲威(명성과 위엄)와 공적이 자기보다 올라갈 것을 시기하여 出兵해 구원하려 하지 않았으며,
南霽雲勇壯함을 좋아하여,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억지로 그를 잡아두어 〈자기의 막료로 삼으려고〉 酒食音樂을 갖추고서 南霽雲을 맞이해 자리에 앉혔다.
그러자 南霽雲義憤이 복받쳐 격앙된 어조로 ‘내가 이곳으로 올 때에 睢陽城 안의 사람들은 먹지 못한 지가 한 달도 넘었다. 내 비록 혼자 먹고 싶어도 의리로 보아 차마 먹을 수 없고, 설령 먹는다 해도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고서,
佩刀를 뽑아 손가락 하나를 잘라 피가 철철 흐르는 〈손을 들어〉 賀蘭進明에게 보여주니, 온 座中이 크게 놀라 모두 감격해 南霽雲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
南霽雲賀蘭進明이 끝내 자기를 위해 出兵할 의사가 없음을 알고는 즉시 말을 달려 떠났다. 을 나가려 할 때에 화살을 뽑아 佛寺浮圖(佛塔)를 향해 쏘니, 화살의 절반이 불탑 상단의 벽돌에 박혔다.
이에 南霽雲은 ‘내 돌아가 적을 깨부수고서 반드시 〈돌아와서〉 賀蘭進明擊滅할 것이다. 이 화살이 〈맹서하는 나의 말을〉 기억[]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貞元 年間泗州를 지났는데, 배 위의 사람들이 그때까지도 여전히 佛塔을 가리키며 화살이 박혔던 일을 서로 이야기하였다.
睢陽城陷落되자 張巡에게 칼날을 들이대고 항복하라고 위협하였으나 장순이 굴복하지 않으니, 즉시 끌고 가서 목을 치려 하였다.
또 적이 南霽雲에게 항복하라고 협박하니 南霽雲이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張巡南霽雲을 부르며 말하기를 “南八아, 사내는 죽을지언정 의롭지 못하게 굴복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니,
南霽雲이 웃으면서 “내 살아남아서 장차 큰 일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께서 이리 말씀하시니 제가 감히 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고서 즉시 굴복하지 않았다.
張籍이 말하였다.
于嵩이라는 자가 있는데, 어려서부터 張巡에게 의지하였고, 張巡이 군사를 일으켜 叛賊을 토벌할 때에 于嵩은 항상 적의 포위 속에 있었다.
내[]가 大曆 연간에 和州 烏江縣에서 于嵩을 만났는데, 그때 于嵩의 나이가 60여 세였다. 그는 張巡隨從한 공로로 처음 臨渙縣尉가 되었는데, 학문을 좋아하여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
그때 나는 아직 어려서 張巡許遠事跡을 대략 물었고 자세히 묻지 못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張巡은 키가 일곱 자 남짓하고 수염이 신선처럼 길었다.
일찍이 내[于嵩]가 ≪漢書≫를 읽는 것을 보고서, 나에게 「무엇 때문에 이 글을 그리 오래 읽느냐?」고 하기에, 내가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이다.」라고 하였더니, 張巡이 말하기를 「나는 글을 읽을 적에 불과 세 번이면 종신토록 잊지 않았다.」라고 하고서,
내가 읽던 글을 背誦하였는데, 한 이 다할 때까지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 나는 놀라, 장순이 우연히 이 책에만 익숙한 것이라고 여겨, 마음대로 다른 책을 뽑아 시험해보니 모두 다 그러하지 않음이 없었다.
내가 또 書架에 꽂힌 여러 권의 책을 뽑아 시험 삼아 장순에게 물어보았더니 말이 떨어지자마자 背誦하고 막힘이 없었다.
내가 장순을 隨從한 지 오래였으나, 평소에 장순이 讀書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고, 그가 문장을 지을 때도 紙筆을 들고 즉시 써내려갔고 草稿를 작성한 적이 없었다.
처음 睢陽城을 지킬 때에 士卒이 1만에 가까웠고, 성 안에 사는 民戶 또한 수만 호였으되, 장순은 〈어떤 일로〉 인해 한 번 만나 성명을 물으면 뒤에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없었다.
장순은 노하면 매양 수염이 곧추섰다. 睢陽城이 함락됨에 미쳐 적군이 장순 등 수십 인을 포박해 앉혀놓고서 죽이려 할 때에 장순이 일어나서 오줌을 누니,
〈함께 포로가 된〉 부하들은 장순이 일어난 것을 보고서 일어나는 자도 있었고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그러자 장순이 「너희들은 두려워하지 말라. 죽음은 정해진 운명이다.」라고 하니,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보지 못하였다.
張巡은 피살 될 때에 안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평상시처럼 화평하였다. 許遠은 관대하고 후덕한 어른으로 外貌가 그 內心과 같았다.
張巡과 같은 해에 출생하였으나 태어난 달과 날이 張巡보다 뒤였으므로 張巡으로 불렀다. 죽을 때의 나이가 49세였다.’라고 하였다.
于嵩貞元 初年亳州宋州(睢陽) 사이에서 죽었다. 或者가 전하는 말에 의하면, 亳州宋州 사이에 있는 于嵩田地武人이 빼앗아 소유하자,
于嵩로 가서 소송하려다가 살해당하였다고 한다. 于嵩은 자식이 없다.”
張籍이 이렇게 말하였다.


역주
역주1 張中丞傳後敍 : 張中丞은 바로 張巡이다. 天寶 14년(755)에 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張巡은 眞源縣令이었는데, 그의 上司인 樵郡太守 楊萬石이 적에게 投降하니, 장순은 군대를 이끌고 雍丘로 들어가서 군대를 일으켜 적과 對抗해 잔약한 군대로 強敵에게 승리를 거두어 탁월한 戰功을 세웠다.
肅宗 至德 2년(757)에 許遠의 군대와 연합해 睢陽을 1년 가까이 지키다가 병사도 다하고 군량도 떨어져 성이 함락되자, 部將 雷萬春‧南霽雲 등 36인과 동시에 殉國하였다. 同年에 조정에서 조서를 내려 장순을 御史中丞에 제수하였기 때문에 ‘張中丞’이라 한 것이다.
역주2 李翰 : 張巡의 벗으로 睢陽에 寓居하면서 장순이 戰守하던 일을 직접 보았다. 장순이 죽은 뒤에 사람들이 그가 政府를 배반하고 敵에게 投降하였다고 誣陷하니, 마침내 〈張巡傳〉을 지어 唐 肅宗에게 올려 장순의 功績과 氣節을 드러내었다.
역주3 許遠 : 安史의 반란 때에 睢陽太守였는데, 眞源縣令 장순과 협력하여 수양을 굳게 지켰고, 성이 함락된 뒤엔 포로가 되어 轞車에 실려 洛陽으로 가던 도중 偃師에서 살해되었다.
역주4 授之柄而處其下 : 唐 肅宗 至德 2년(757) 정월에 敵將 安慶緖의 部將 尹子奇가 군사 13만을 이끌고서 睢陽으로 달려왔다. 睢陽太守 許遠이 張巡에게 위급함을 알리니, 장순이 寧陵에서 군대를 이끌고서 수양으로 들어왔다, 허원이 장순에게 “나는 나약하여 兵事를 익히지 못하였으나, 公(장순)은 智勇을 겸비하셨지요. 나는 공을 위해 지키겠으니, 공은 나를 위해 싸워주십시오.”라고 하고서, 이후로는 전투의 중요한 일은 모두 장순이 지휘하게 하고, 허원은 뒤에서 부지런히 接應하는 일을 맡았다. 이때 장순은 職位가 眞源縣令이니, 지위가 허원의 아래에 있었다.
역주5 辭服 : 항복하기를 청함이다.
역주6 食(사)其所愛之肉 : 睢陽이 포위되어 식량이 다 떨어지고, 참새와 쥐조차 다 없어져서 먹을 것이 없으니, 장순은 愛妾을, 허원은 童奴를 죽여 士卒을 먹였다고 한다. ≪新唐書 張巡傳≫
역주7 國亡主滅 : 장순이 雍丘를 지키고 있을 때에 賊將 令狐潮가 이렇게 말하여 장순이 항복하도록 유인한 것이다.
역주8 不樂成人之美 : ≪論語≫ 〈顔淵〉에 “君子는 남의 아름다운 일은 이루어주고, 남의 惡한 일은 이루어주지 않는다. 小人은 이와 반대이다.[君子成人之美 不成人之惡 小人反是]”란 말이 보인다.
역주9 淫辭 :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황당한 말이다.
역주10 愈嘗從事於汴徐二府 : 從事는 唐代에 幕僚의 通稱이었다. 貞元 12년(796)에 한유는 汴州에서 宣武軍節度使 董晉의 推官을 맡고, 貞元 15년에 徐州에서 武寧軍節度使 張建封의 추관을 맡았던 때를 이른다.
역주11 雙廟 : 장순과 허원이 죽은 뒤에 숙종이 장순을 楊州大都督에, 허원을 荊州大都督에 追贈하고서 睢陽에 廟를 세워 歲時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두 사람을 合祀하기 때문에 ‘雙廟’라 한 것이다.
역주12 南霽雲之乞救於賀蘭 : 南霽雲이 賀蘭에게 구원을 요청한 것이다. 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鋸野尉 張沼가 군대를 일으켜 反賊을 토벌할 때에 南霽雲을 발탁해 장군으로 삼았다. 南霽雲은 뒤에 尙衡의 先鋒이 되어, 使命을 받들고 睢陽에 왔다가 장순이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을 보고 감동하여 드디어 장순의 部將이 되었는데, 뒤에 장순과 함께 殉國하였다. 賀蘭進明이 이때 河南節度使로 重兵을 거느리고 臨淮에 주둔하고 있었다.
역주13 南八 : 南霽雲의 排行이 여덟째이기 때문에 ‘南八’이라 칭한 것이다.
역주14 : 近(가까움)이다.
역주15 (人十)[十人] : 저본에는 ‘人十’으로 되어 있으나, ≪韓文考異≫에 의거하여 ‘十人’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6 : 오줌이다. ≪春秋左氏傳≫ 定公 3년조에 “夷射姑 旋焉(夷射姑가 이곳에 오줌을 누었다.)”이라 하였는데, 杜預의 注에 “旋은 小便이다.[旋 小便]”라고 하였다.
역주17 陽陽 : 편안해 만족한 모양이다.
역주18 訟理 : 訴訟함이다.

당송팔대가문초 한유(2) 책은 2020.12.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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