通篇句字氣皆太史公髓요 非昌黎本色이라 今書畫家亦有效人而得其解者하니 此正見其無不可處라
元和二年四月十三日夜
에 愈與吳郡張籍閱家中舊書
타가 得
所爲張巡傳
하니라
翰以文章自名
하야 爲此傳頗詳密
이라 然尙恨有闕者
하니 不爲
立傳
이요 又不載雷萬春事首尾
라
遠雖材若不及巡者
나 開門納巡
하고 位本在巡上
이나 하야 無所疑忌
하고 竟與巡俱守死
하야 成功名
하니라
城陷而虜하야 與巡死先後異耳라 兩家子弟材智下하야 不能通知二父志하고
遠誠畏死
면 何苦守尺寸之地
하야 하야 以與賊抗而不降乎
아
當其圍守時하야 外無蚍蜉蟻子之援이나 所欲忠者는 國與主耳라
而賊語以
이라하니 遠見救援不至
하고 而賊來益衆
하곤 必以其言爲信
이요
外無待而猶死守로되 人相食且盡하니 雖愚人亦能數日而知死處矣라 遠之不畏死亦明矣라
烏有城壞其徒俱死어늘 獨蒙媿恥求活가 雖至愚者라도 不忍爲어늘 嗚呼라 而謂遠之賢而爲之邪아
說者又謂 遠與巡分城而守러니 城之陷이 自遠所分始라하야 以此詬遠하니 此又與兒童之見無異라
人之將死엔 其臟腑必有先受其病者요 引繩而絶之에도 其絶必有處어늘
觀者見其然
하고 從而尤之
하니 其亦不達於理矣
로다 小人之好議論
하고 가 如是哉
ㄴ저
如巡遠之所成就가 如此卓卓이로되 猶不得免하니 其他則又何說가
當二公之初守也에 寧能知人之卒不救하고 棄城而逆遁가 苟此不能守면 雖避之他處何益이리오
及其無救而且窮也에 將其創殘餓羸之餘하야 雖欲去나 必不達이리라
二公之賢으로 其講之精矣라 守一城하야 捍天下하고
以千百就盡之卒로 戰百萬日滋之師하야 蔽遮江淮하고 沮遏其勢하야 天下之不亡이 其誰之功也아
當是時하야 棄城而圖存者를 不可一二數요 擅強兵하고 坐而觀者가 相環也로되
不追議此
하고 而責二公以死守
하니 亦見其自比於逆亂
하야 設
而助之攻也
로다
其老人往往說巡遠時事云
호대 也
에 賀蘭嫉巡遠之聲威功績出己上
하야 不肯出師救
하고
愛霽雲之勇且壯하야 不聽其語하고 強留之하야 具食與樂하고 延霽雲坐하니
霽雲慷慨語曰 雲來時에 睢陽之人이 不食月餘日矣니 雲雖欲獨食이나 義不忍이요 雖食이라도 且不下咽이라하고
因拔所佩刀하야 斷一指하니 血淋漓어늘 以示賀蘭하니 一座大驚하야 皆感激爲雲泣下하니라
雲知賀蘭終無爲雲出師意하고 卽馳去하야 將出城에 抽矢射佛寺浮圖하니 矢著其上甎半箭이어늘
曰 吾歸破賊하고 必滅賀蘭하리라 此矢所以志也라하니라 愈貞元中過泗州에 船上人猶指以相語하니라
城陷에 賊以刃脅降巡이나 巡不屈하니 卽牽去하야 將斬之하니라
又降霽雲
하니 雲未應
하니라 巡呼雲曰
아 男兒死耳
언정 不可爲不義屈
이라하니
雲笑曰 欲將以有爲也라 公有言하니 雲敢不死리오하고 卽不屈하니라
張籍曰 有于嵩者하니 少依於巡하고 及巡起事에 嵩常在圍中하니라
籍大曆中에 於和州烏江縣見嵩하니 嵩時年六十餘矣라 以巡初嘗得臨渙縣尉에 好學無所不讀이라
籍時尙小하야 粗問巡遠事요 不能細也라 云 巡長七尺餘요 鬚髥若神이라
嘗見嵩讀漢書하고 謂嵩曰 何爲久讀此오 嵩曰 未熟也라 巡曰 吾於書에 讀不過三徧이로되 終身不忘也라하고
因誦嵩所讀書하니 盡卷不錯一字하니라 嵩驚하야 以爲巡偶熟此卷이라하야 因亂抽他帙以試하니 無不盡然이라
嵩又取架上諸書하야 試以問巡하니 巡應口誦無疑하니라
嵩從巡久나 亦不見巡常讀書也하고 爲文章에 操紙筆立書요 未嘗起草하니라
初守睢陽時
에 士卒
萬人
이요 城中居人戶亦且數萬
이로되 巡因一見問姓名
이면 其後無不識者
라
巡怒
면 鬚髥輒張
하니라 及城陷
에 賊縛巡等數
坐
하고 且將戮
에 巡起
하니
其衆見巡起하고 或起或泣이어늘 巡曰 汝勿怖하라 死는 命也라하니 衆泣不能仰視하니라
巡就戮時
에 顔色不亂
하고 如平常
하니라 遠
은 寬厚長者
라 貌如其心
하니라
與巡同年生이나 月日後於巡일새 呼巡爲兄하니라 死時年四十九니라
嵩貞元初死於亳宋間하니라 或傳嵩有田在亳宋間이러니 武人奪而有之한대
嵩將詣州
라가 爲所殺
하니라 嵩無子
하니라 張籍云
하니라
全篇의 字句와 氣槪가 모두 太史公의 骨髓이고 昌黎의 本色이 아니다. 지금의 書畫家 중에도 남의 작품을 본받다가 그 정신[解]을 터득하는 자가 있다. 여기에서 昌黎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것을 볼 수 있다.
元和 2년(807) 4월 13일 밤에, 나는 吳郡 사람 張籍과 함께 집에 있는 옛 書籍들을 열람하다가 李翰이 지은 〈張巡傳〉을 발견하였다.
李翰은 문장으로 自負[自名]하여, 이 傳을 지은 것이 자못 자상하고 세밀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한스럽게도 빠진 것이 있으니, 許遠을 위해 傳을 짓지 않은 것과 또 雷萬春 사적의 시말을 기재하지 않은 것이다.
許遠의 재능이 비록 張巡만 못한 것 같지만 睢陽城의 문을 열어 장순을 맞아들이고, 職位가 본래 장순보다 上位였음에도 兵權을 장순에게 주고 자기는 그의 부하로 처신하면서 의심하거나 시기함이 없었고, 끝내 장순과 함께 지키다가 죽어 功名을 이루었다.
城이 함락되자 사로잡혀 〈죽었는데〉 장순과는 단지 먼저 죽고 뒤에 죽은 차이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두 집안 子弟들은 재능과 지혜가 低劣해 그 부친들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張家의 자제들은〉 장순은 被殺되었는데 許遠은 포로가 되었다고 하면서 〈허원이〉 죽음을 두려워해 賊에게 降服을 청한[辭服] 것으로 의심하였다.
허원이 진실로 죽음을 두려워하였다면 무엇 때문에 고생스럽게 작은 성을 지키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죽여 그 고기를 사졸에게 먹여가면서까지 적과 대항하며 항복하지 않았겠는가?
그가 포위된 성을 지킬 때에 성 밖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의 지원도 없었으나, 충성하고 싶었던 것은 나라와 임금뿐이었다.
그런데 賊들이 ‘나라는 망하고 임금은 죽었다.’고 말하니, 許遠은 구원병은 오지 않고 賊兵만 더욱 많아지는 것을 보고서 반드시 적의 말을 사실로 믿었을 것이고,
밖에 기대할 援軍이 없는데도 오히려 목숨을 걸고 지켰으되,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어 거의 씨가 마르는 지경이 되었으니, 비록 바보라도 며칠이면 죽게 될 것을 알았을 것이다.
〈이로써 보면〉 許遠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어찌 성이 함락되어 부하들이 모두 죽었는데 자기 혼자만 치욕을 무릅쓰고 살기를 구하였겠는가?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자라도 차마 그리하지 않을 것인데, 아! 허원처럼 賢明한 사람이 그리했을 것으로 여기는가?
이 일을 이야기하는 자들은 또 “許遠과 張巡이 城을 나누어 지켰는데, 성의 함락이 허원이 지키던 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여, 이로써 허원을 비난하니, 이는 또 어린아이의 소견과 다를 것이 없다.
사람이 죽을 때에는 그 사람의 五臟과 六腑에 반드시 먼저 병이 든 곳이 있기 때문이고, 노끈을 당겨 끊을 때에도 반드시 끊기는 곳이 있는데,
傍觀者들은 이런 정황(죽고 끊김)만을 보고서 〈먼저 병이 든 부위와 끊어진 노끈만을〉 꾸짖으니, 이 또한 사리를 모르는 짓이다.
小人은 남을 평론하기만을 좋아하고 남의 아름다움을 이루어주기를 좋아하지 않음이 이와 같다.
張巡과 許遠은 성취한 공적이 이처럼 탁월한데도 오히려 남들의 비평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다른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張公과 許公 두 분이 처음 성을 지킬 적에, 어찌 남이 끝내 구원하지 않을 줄을 알고서 성을 버리고 지레 도망갈 수 있었겠는가? 만약 이곳을 지키지 못했다면 설령 다른 곳으로 도망갔다 하더라도 무슨 도움이 되었겠는가?
구원병이 오지 않은 데다 곤궁해졌을 적에 부상병과 주린 군사들을 이끌고서 떠나고자 해도 떠날 수 없었을 것이다.
두 公은 현명한 분들로서 守備의 방책을 헤아린 것이 정밀하였다. 한 城을 지켜 천하를 방어하고,
거의 죽어가는 천‧백의 군대로써 날마다 늘어나는 백만의 적군과 싸워 江淮 지역을 보호하고 적의 기세를 막아서, 천하가 망하지 않게 한 것이 누구의 공인가?
이때를 당하여 성을 버리고 도망가서 목숨을 보존하기를 도모한 자를 한둘로 셀 수 없고, 강성한 군대를 가지고도 앉아서 구경만 한 자가 사방에 널렸는데,
이런 무리들은 追究하지 않고 도리어 목숨을 걸고 城을 지킨 두 公을 꾸짖으니, 이에서 또한 저들은 자신을 난을 일으킨 叛賊에게 비유해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황당한 말을 만들어서 역적을 도와 두 분을 공격하는 것임을 볼 수 있다.
내 일찍이 汴州와 徐州 두 節度府의 幕僚로 있을 적에 누차 두 州 사이를 왕래하면서 이른바 ‘雙廟’란 곳에 직접 제사를 올린 적이 있었는데,
그곳 노인들이 이따금 張巡과 許遠의 일을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다.
“南霽雲이 賀蘭進明에게 援軍을 요청했을 적에, 賀蘭進明은 張巡과 許遠의 聲威(명성과 위엄)와 공적이 자기보다 올라갈 것을 시기하여 出兵해 구원하려 하지 않았으며,
南霽雲의 勇壯함을 좋아하여,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억지로 그를 잡아두어 〈자기의 막료로 삼으려고〉 酒食과 音樂을 갖추고서 南霽雲을 맞이해 자리에 앉혔다.
그러자 南霽雲은 義憤이 복받쳐 격앙된 어조로 ‘내가 이곳으로 올 때에 睢陽城 안의 사람들은 먹지 못한 지가 한 달도 넘었다. 내 비록 혼자 먹고 싶어도 의리로 보아 차마 먹을 수 없고, 설령 먹는다 해도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고서,
佩刀를 뽑아 손가락 하나를 잘라 피가 철철 흐르는 〈손을 들어〉 賀蘭進明에게 보여주니, 온 座中이 크게 놀라 모두 감격해 南霽雲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
南霽雲은 賀蘭進明이 끝내 자기를 위해 出兵할 의사가 없음을 알고는 즉시 말을 달려 떠났다. 城을 나가려 할 때에 화살을 뽑아 佛寺의 浮圖(佛塔)를 향해 쏘니, 화살의 절반이 불탑 상단의 벽돌에 박혔다.
이에 南霽雲은 ‘내 돌아가 적을 깨부수고서 반드시 〈돌아와서〉 賀蘭進明을 擊滅할 것이다. 이 화살이 〈맹서하는 나의 말을〉 기억[志]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貞元 年間에 泗州를 지났는데, 배 위의 사람들이 그때까지도 여전히 佛塔을 가리키며 화살이 박혔던 일을 서로 이야기하였다.
睢陽城이 陷落되자 賊이 張巡에게 칼날을 들이대고 항복하라고 위협하였으나 장순이 굴복하지 않으니, 즉시 끌고 가서 목을 치려 하였다.
또 적이 南霽雲에게 항복하라고 협박하니 南霽雲이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張巡이 南霽雲을 부르며 말하기를 “南八아, 사내는 죽을지언정 의롭지 못하게 굴복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니,
南霽雲이 웃으면서 “내 살아남아서 장차 큰 일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公께서 이리 말씀하시니 제가 감히 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고서 즉시 굴복하지 않았다.
張籍이 말하였다.
“于嵩이라는 자가 있는데, 어려서부터 張巡에게 의지하였고, 張巡이 군사를 일으켜 叛賊을 토벌할 때에 于嵩은 항상 적의 포위 속에 있었다.
내[籍]가 大曆 연간에 和州 烏江縣에서 于嵩을 만났는데, 그때 于嵩의 나이가 60여 세였다. 그는 張巡을 隨從한 공로로 처음 臨渙縣尉가 되었는데, 학문을 좋아하여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
그때 나는 아직 어려서 張巡과 許遠의 事跡을 대략 물었고 자세히 묻지 못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張巡은 키가 일곱 자 남짓하고 수염이 신선처럼 길었다.
일찍이 내[于嵩]가 ≪漢書≫를 읽는 것을 보고서, 나에게 「무엇 때문에 이 글을 그리 오래 읽느냐?」고 하기에, 내가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이다.」라고 하였더니, 張巡이 말하기를 「나는 글을 읽을 적에 불과 세 번이면 종신토록 잊지 않았다.」라고 하고서,
내가 읽던 글을 背誦하였는데, 한 卷이 다할 때까지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 나는 놀라, 장순이 우연히 이 책에만 익숙한 것이라고 여겨, 마음대로 다른 책을 뽑아 시험해보니 모두 다 그러하지 않음이 없었다.
내가 또 書架에 꽂힌 여러 권의 책을 뽑아 시험 삼아 장순에게 물어보았더니 말이 떨어지자마자 背誦하고 막힘이 없었다.
내가 장순을 隨從한 지 오래였으나, 평소에 장순이 讀書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고, 그가 문장을 지을 때도 紙筆을 들고 즉시 써내려갔고 草稿를 작성한 적이 없었다.
처음 睢陽城을 지킬 때에 士卒이 1만에 가까웠고, 성 안에 사는 民戶 또한 수만 호였으되, 장순은 〈어떤 일로〉 인해 한 번 만나 성명을 물으면 뒤에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없었다.
장순은 노하면 매양 수염이 곧추섰다. 睢陽城이 함락됨에 미쳐 적군이 장순 등 수십 인을 포박해 앉혀놓고서 죽이려 할 때에 장순이 일어나서 오줌을 누니,
〈함께 포로가 된〉 부하들은 장순이 일어난 것을 보고서 일어나는 자도 있었고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그러자 장순이 「너희들은 두려워하지 말라. 죽음은 정해진 운명이다.」라고 하니,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보지 못하였다.
張巡은 피살 될 때에 안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평상시처럼 화평하였다. 許遠은 관대하고 후덕한 어른으로 外貌가 그 內心과 같았다.
張巡과 같은 해에 출생하였으나 태어난 달과 날이 張巡보다 뒤였으므로 張巡을 兄으로 불렀다. 죽을 때의 나이가 49세였다.’라고 하였다.
于嵩은 貞元 初年에 亳州와 宋州(睢陽) 사이에서 죽었다. 或者가 전하는 말에 의하면, 亳州와 宋州 사이에 있는 于嵩의 田地를 武人이 빼앗아 소유하자,
于嵩이 州로 가서 소송하려다가 살해당하였다고 한다. 于嵩은 자식이 없다.”
張籍이 이렇게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