篇中憂讒이라 始則述傳與者之言하고 再則托己之自爲解하고 三則不能無憂하고
四則又自爲解하고 五則又入李翰林之竝相하고 末復自爲解하니라
元和元年六月十日에 愈自江陵法曹詔拜國子博士하니라 始進見今相國鄭公하니
公賜之坐
하고 且曰 吾見子某詩
나 吾時在翰林
이라 職親而地禁
일새 不敢
이로라
今爲我寫子詩書爲一通以來하라 愈再拜謝하고 退錄詩書若干篇하야 擇日時以獻하니라
於後之數月에 有來謂愈者曰 子獻相國詩書乎아 曰 然하다
曰 有爲讒於相國之座者曰 韓愈曰 相國徵余文일새 余不敢匿이라 相國豈知我哉리오하니 子其愼之하라
愈應之曰 愈爲御史
에 하야 同遷于南者凡
이러니 獨愈爲先收用
하니 相國之賜大矣
라
百官之進見相國者는 或立語以退로되 而愈辱賜坐語하니 相國之禮過矣라
四海九州之人
이 自百官以下
로 欲以其
徹相國左右者多矣
로되
皆憚而莫之敢이어늘 獨愈辱先索하니 相國之知至矣라 賜之大하고 禮之過하고 知之至하니
是三者는 於敵以下受之라도 宜以何報오 況在天子之宰乎아
人莫不自知하니 凡適於用之謂才요 堪其事之謂力이라 愈於二者에 雖日勉焉而不迨어늘
束帶執笏立士大夫之行하야 不見斥以不肖가 幸矣니 其何敢敖於言乎아
夫敖雖凶德
이나 必有恃而敢行
이라 愈之族親鮮少
하야 無
之勢於今
하고
不善交人
하야 無
之友於朝
하며 無宿資蓄貨以釣聲勢
하며
弱於才而腐於力
하야 不能奔走乘機
以要權利
어늘 夫何恃而敖
리오
若夫狂惑喪心之人이 蹈河而入火하고 妄言而罵詈者라면 則有之矣리라 而愈人知其無是疾也하니
雖有讒者百人이라도 相國將不信之矣리라 愈何懼而愼歟아
旣累月에 又有來謂愈曰 有讒子於翰林舍人李公與裴公者하니 子其愼歟ㄴ저
愈曰 二公者는 吾君朝夕訪焉하야 以爲政於天下而階太平之治라
居則與天子爲
하고 出則與天子爲股肱
이니 四海九州之人
이 自百官以下
로 其孰不願忠而望賜
리오
愈也不狂不愚하야 不蹈河而入火하고 病風而妄罵하니 不當有如讒者之說也라
雖有讒者百人이라도 二公將不信之矣리라 愈何懼而愼이리오
旣以語應客
하고 夜歸
하야 私
曰
이라 市有虎
하고 而曾參殺人
은 讒者之效也
요
이라하시니 夫佞人
을 不能遠
이면 則有時而信之矣
리라 今我恃直而不戒
하니 禍其至哉
라하고
徐又自解之曰
는 聽者庸也
요 은 也
요 巷伯之傷
은 亂世是逢也
라
今三賢方與天子謀所以施政於天下而階太平之治하니 聽聰而視明하고 公正而敦大라
夫聰明則聽視不惑하고 公正則不邇讒邪하며 敦大則有以容而思하니
彼讒人者가 孰敢進而爲讒哉아 雖進而爲之라도 亦莫之聽矣리니 我何懼而愼이리오
旣累月에 上命李公相하시니 客謂愈曰 子前被言於一相이나 今李公又相하니 子其危哉ㄴ저
愈曰 前之謗我於宰相者를 翰林不知也오 後之謗我於翰林者를 宰相不知也라
今二公合處而會言에 若及愈면 必曰 韓愈亦人耳니 彼敖宰相하고 又敖翰林하야 其將何求리오
必不然이라하리라 吾乃今知免矣로라 旣而讒言果不行하니라
이 편의 글은 참언을 근심한 것이다. 처음에는 전해준 자의 말을 기록하고, 두 번째는 가탁하는 형식을 빌려 자기 스스로 해명하고, 세 번째는 근심이 없을 수 없음을 말하고,
네 번째는 또 스스로 해명하고, 다섯 번째는 또 李翰林이 승상이 된 것을 말하고, 끝에는 다시 스스로 해명하였다.
元和 元年 6월 10일에 나는 江陵의 法曹參軍에서 詔命을 받들고 와서 國子博士에 제수되었다. 처음 나아가 지금의 相國 鄭公을 알현하니,
鄭公께서 나에게 자리를 내어주시고서 “내가 자네의 아무 詩를 보았으나, 내가 그때 翰林學士여서 職務가 皇上과 가깝고, 있는 곳이 禁中이어서 감히 그대와 交遊할 수 없었네.
이제 나를 위하여 자네의 詩와 書(文) 한 통씩을 써서 가지고 오라.”고 하기에, 나는 두 번 절하고 致謝하고서 물러나와 詩와 書 몇 편을 기록하여 날을 잡아 올렸다.
그로부터 몇 달 뒤에 어떤 자가 와서 나에게 “그대가 相國에게 詩와 書를 올렸느냐?”고 묻기에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였더니,
그자가 “어떤 자가 상국의 座前에서 그대를 참소하기를 ‘韓愈가 「相國이 나에게 문장을 요구하기에 내 감히 숨기 않았으니, 상국께서 아마 나를 알아주실 것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그대는 조심하라.”고 하였다.
내가 대답하였다.
“내가 御史로서 德宗朝에 죄를 얻어 함께 남방으로 左遷된 자가 셋이었는데, 유독 나만이 먼저 收用되었으니, 相國의 은혜가 크다.
百官이 상국을 謁見할 때에 혹은 서서 몇 마디 하고는 물러나는데, 나에게는 앉아서 말할 수 있는 은혜를 베푸셨으니 나에 대한 상국의 禮遇가 過分하셨다.
四海 九州 사람과 백관 이하의 〈관원 중에〉 자기의 詩文[業]을 상국의 좌우에 올리고 싶어 하는 자가 많다.
그런데도 모두 두려워하며 감히 올리지 못하는데, 유독 나만은 상국께서 먼저 요구하시는 은혜를 입었으니, 나에 대한 상국의 知遇가 지극하시다. 은혜가 크고 예우가 과분하고 지우가 지극하였으니,
이 세 가지는 신분이 나보다 낮은 사람에게 받더라도 어떻게 보답해야 마땅할지 모를 지경인데, 하물며 천자의 재상임에랴?
사람 중에는 자기를 잘 알지 못하는 자가 없다. 쓰임에 적합한 것을 재주라 하고, 그 일을 감당할 만한 것을 힘이라 한다. 나는 이 두 가지에 대해 비록 날마다 노력해도 미칠 수 없는데,
띠를 매고 笏을 잡고서 士大夫의 行列 속에 서 있으면서 不肖하다는 이유로 물리침을 받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니, 어찌 감히 말을 오만하게 할 수 있겠는가?
오만이란 것이 비록 凶德(惡德)이지만 반드시 믿는 데가 있어야 감히 행할 수 있다. 나는 族親이 드물어서 현재 의지할 만한 세력이 없고,
사람들과 잘 사귀지 못하여 조정에 서로 사양하고 서로 목숨을 아끼지 않을 벗이 없으며, 저축한 재물이 없어서 名聲과 勢力을 낚을 수 없으며,
재능과 역량이 부족해서 달려가 기회를 이용해 권세에 빌붙어[扺巇] 권리를 구할 수도 없는데, 무엇을 믿고 오만하게 굴겠는가?
만약 미쳐서 실성하여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며 헛된 말로 남을 함부로 꾸짖는 자라면 이럴 수 있겠지만, 나에게 이런 병이 없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고 있으니,
비록 백 사람이 나를 참소하더라도 相國께서는 아마도 믿지 않으실 것이다. 내 무엇이 두려워 조심하겠는가?”
몇 달이 지난 뒤에 또 어떤 사람이 와서 나에게 “翰林舍人 李公(李吉甫)과 裴公(裵垍)에게 그대를 참소하는 자가 있으니 그대는 조심하라.”고 하기에,
내가 대답하였다.
“두 公은 우리 皇上께서 천하를 태평에 올려놓는 정치를 하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자문하는 대상으로,
조정에 있으면 천자의 중요한 신하[心膂]가 되고 外職으로 나가면 천자의 중요한 보좌[股肱]가 되니, 四海 九州의 사람들과 百官 중에 그 누가 〈두 분께〉 충성하여 두 분께 은혜 받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나는 미치지도 않았고 어리석지도 않아서, 물과 불에 뛰어들지도 않고 미쳐서 함부로 남을 욕하지도 않았으니, 당연히 참소하는 자의 말과 같은 행위는 없었다.
〈그렇다면〉 비록 백 사람이 참소하더라도 두 公은 아마도 믿지 않으실 것이다. 내 무엇이 두려워 조심하겠는가?”
客에게 이렇게 대답하고서 밤늦게 집으로 돌아와서 스스로 책망하였다.
“아! 세 사람이 차례로 저자에 호랑이가 있다고 말하자 〈사람들이 믿고,〉 세 사람이 차례로 曾參이 사람을 죽였다고 말하자 〈曾參의 母親이 믿은 것은〉 讒言의 효과이다.
≪詩經≫에 ‘저 참소하는 자를 잡아다가 호랑이에게 던져주리라. 호랑이가 먹지 않거든 北方에 던져주리라. 북방이 받지 않거든 昊天에 던져주리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讒言을 傷心하여 지극히 미워한 말이다.
또 ≪詩經≫에 ‘亂이 처음 생기는 것은 진실하지 못한 말을 용납한 데서 비롯하고, 亂이 또 생기는 것은 君子(在位者)가 讒言을 믿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처음에는 의심하였으나 종당에는 믿은 것을 이른 것이다.
孔子께서 ‘佞人(말 잘하는 사람)을 멀리하라.’고 하셨으니, 佞人을 멀리하지 않으면 때로 그를 믿는 경우가 생길 것이다. 지금 나는 나의 정직만을 믿고 참언하는 자를 경계하지 않았으니, 아마도 禍가 이를 것이다.”
또 천천히 스스로 해명하였다.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있다는 말을 믿은 것은 듣는 자가 용렬하기 때문이고, 曾參이 사람을 죽였다는 말을 믿은 것은 아들에 대한 사랑이 총명을 어지럽혔기 때문이고, 巷伯이 傷心한 것은 난세를 만났기 때문이다.
지금 세 賢人께서 바야흐로 천자와 더불어 천하를 태평에 올려놓을 정치를 圖謀하시니, 〈耳目이〉 총명하시고 〈心事가〉 公正하고 敦大(敦厚寬大)하시다.
聰明하면 보고 들음이 〈분명하여 讒言에〉 현혹하지 않고, 公正하면 讒邪(참소하는 간사한 사람)를 가까이하지 않고 敦大하면 남의 말을 받아들이되 깊이 생각하니,
저 참소하는 자 중에 누가 감히 나가서 참언을 올리겠는가? 비록 나가서 참소한다 해도 듣지 않으실 것이니, 내 무엇이 두려워 조심하겠는가?”
몇 달 뒤에 皇上께서 李公을 임명하여 宰相으로 삼으시니, 客이 나에게 “그대가 전에는 한 재상 앞에서만 참소를 당하였으나, 이제 李公께서 또 재상이 되셨으니 그대는 아마도 위태로울 것이다.”라고 하기에
내가 말하였다.
“전에 재상께 나를 비방한 일을 翰林께서 모르셨고, 뒤에 한림께 나를 비방한 일을 재상께서 모르셨지만,
이제는 두 분이 한곳에서 〈公務를 보고 계시니〉 한곳에 모여 말씀을 나누시다가 만약 話題가 나에게 미치면 틀림없이 ‘韓愈도 사람인데, 저자가 재상에게 오만하게 굴고 또 한림에게 오만하게 굴어, 장차 무엇을 구하겠다는 것인가?
반드시 그렇지 않으리라.’고 하실 것이니, 나는 이제야 비방에서 면하게 되었음을 알았다.”
뒤에 讒言이 과연 일어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