海於天地間에 爲物最鉅하니 自三代聖王으로 莫不祀事하니라
컨대 而南海神
最貴
하야 在北東西三神河伯之上
하니 號爲祝融
이라
天寶中
에 天子以爲古爵莫貴於公侯
라 故海嶽之祝
과 犧幣之數
를 하니 所以致崇極於大神
하니라
今王亦爵也어늘 而禮海嶽尙循公侯之事하고 虛王儀而不用하니 非致崇極之意也라
由是冊尊南海神爲廣利王
하고 祭式
을 與次俱昇
하니라 因其故廟
하야 易而新之
하니
在今廣州治之東南海道八十里의 扶胥之口와 黃水之灣하니라
常以立夏氣至에 命廣州刺史行事祠下하고 事訖驛聞하라하시니라
而刺史常節度五嶺諸軍하고 仍觀察其郡邑하니 於南方事無所不統이라
地大以遠이라 故常選用重人하니 旣貴而富하야 且不習海事니라
又當祀時
하야는 海常多大風
일새 將往
에 皆
하고 旣進
에 觀顧怖悸
라
故常以疾爲解
하고 而委事於其副
하니라 其來已久
라 故
에 上雨旁風
이로되 無所蓋障
하며
牲酒瘠酸도 取具臨時하며 水陸之品이 狼籍籩豆하며 薦裸興俯가 不中儀式이라
吏滋不供하니 神不顧享이라 盲風怪雨가 發作無節하야 人蒙其害하니라
元和十二年
에 始詔用前尙書右丞國子祭酒魯國
爲廣州刺史兼御史大夫
하야 以殿南服
하니라
公正直方嚴
하고 中心樂易
하니라 祇愼所職
하야 治人以明
하고 事神以誠
하야 內外單盡
호되 不爲
하니라
至州之明年將夏
에 自京師至
하니 吏以時告
하니라 公乃
하고
誓群有司曰 冊有皇帝名하니 乃上所自署라 其文曰 嗣天子某는 謹遣官某敬祭하노라
其恭且嚴如是하시니 敢有不承가 明日에 吾將宿廟下하야 以供晨事하리라
明日吏以風雨白이나 不聽하다 於是州府文武吏士凡百數가 交謁更諫이나 皆揖而退하니라
公遂陞舟에 風雨少弛하야 櫂夫奏功하고 雲陰解駁하야 日光穿漏하고 波伏不興하니라
에 載暘載陰
이러니 에 天地開除
하야 月星明穊
하니라
五鼓旣作
하고 牽牛正中
에 公乃盛服執笏
하고 以入
하니 文武賓屬
이 俯首聽位
하야 各執其職
하니라
牲肥酒香
하고 罇爵淨潔
하며 降登有數
하니 神其醉飽
하고 海之百靈秘怪
도 畢出
하야 하야 來享飮食
이라
闔廟旋艫하니 祥飊送颿하고 旗纛旄麾가 飛揚晻藹하니라
鐃鼓嘲轟하고 高管噭譟하며 武夫奮櫂하고 工師唱和하니
穹龜長魚가 踊躍後先하고 乾端坤倪가 軒豁呈露라 祀之之歲에 風災熄滅하야 人厭魚蟹하고 五穀胥熟이라
明年祀歸면 又廣廟宮而大之하야 治其庭壇하고 改作東西兩序와 齋庖之房하고 百用具修라
明年其時에 公又固往하야 不懈益虔하니 歲仍大和하야 耋艾歌詠하니라
始公之至
에 盡除他名之稅
하고 하며 四方之使
를 不以資交
하여 以身爲帥
하니라
燕享有時하고 賞與以節하니 公藏私畜하야 上下與足하니라
於是免屬州負逋之緡錢卄有四萬과 米三萬二千斛하며 賦金之州의 耗金一歲八百이라 困不能償을 皆以丐之하고
加西南守長之俸
하고 誅其尤無良不聽令者
하니 由是皆
愼法
하니라
人士之落南不能歸者와 與流徙之冑百卄八族에 用其才良하고 而廩其無告者하며
其女子可嫁
에 與之錢財
하야 令無失時
하니 하야 地方數千里
에 不識盜賊
하야
山行海宿에 不擇處所하니라 事神治人이 其可謂備至耳矣로다
咸願刻廟石以著厥美하고 而繫以詩일새 乃作詩하노라 曰
南海
는 祝融之宅
이라 卽祀于旁
에 帝命南伯
이라 吏惰不躬
이러니 正自今公
이라
明用享錫하야
右我家邦이라
惟明天子
惟愼厥使로다
我公在官하니
神人致喜로다
海嶺之陬
旣足旣濡하니
胡不均弘하야
俾執事樞오
公行勿遲하며
公無遽歸어다
匪我私公이라
神人具依니라
제사 지내는 일로 文案을 만들어 묘사한 神采(고상한 풍채)가 찬란하다.
바다는 천지 사이에서 가장 거대한 物體이니 三代의 聖王으로부터 제사 지내지 않은 적이 없었다.
傳記를 상고하건대, 南海神의 지위가 가장 尊貴하여, 北‧東‧西 세 神 및 河伯의 위에 있으니, 祝融이라 호칭한다.
天寶 연간에 天子께서 “옛날의 爵位에는 公‧侯보다 존귀한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四海와 五嶽의 祝文과 희생과 폐백의 數를 〈公‧侯의 例를〉 모방해 따랐으니, 이는 大神에게 지극한 존경을 바치기 위함이었다.
지금의 王도 爵位인데, 四海와 五嶽을 예우함에 있어 오히려 公‧侯의 禮[事]를 따르고 王의 의식은 비워두고 쓰지 않으니, 지극한 존경을 바치는 뜻이 아니다.”라고 하셨다.
이로 인해
南海神을 책봉해 높여
廣利王으로 삼고,
祝‧
號와 제사의 의식을
神의 지위와 함께 올렸다.
南海神의
舊廟를 고쳐 새롭게 지었는데,
南海神祠圖(≪三才圖會≫)
지금의 廣州 治所에서 동남쪽 뱃길로 80리의 〈지점인〉 扶胥口와 黃水灣에 있다.
항상 立夏 절기가 오면 廣州刺史에게 명하여 〈직접 가서〉 사당 아래에서 제사를 지내고 제사를 마치고는 驛馬를 달려 보고하게 하였다.
刺史는 항상 五嶺의 諸軍을 節度(통솔)하고, 또 각 郡‧邑의 관리들을 관찰하니, 남방의 일에 다스리지[統] 않는 것이 없다.
嶺南은 땅이 광대하고 〈도성과의〉 거리가 멀므로 항상 〈조정의〉 重臣 중에서 뽑아 〈刺史로 보냈으니,〉 이미 신분이 고귀하고 녹봉이 풍부하여 바다에 관한 일에 익숙하지 못하다.
또 제사를 지낼 때가 되면 항상 바다에 큰 바람이 많기 때문에 제사 지내러 가려 할 때에는 모두 근심하고 번민하며 이미 出發[進]한 뒤에는 앞뒤를 돌아보며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역대의 자사들은〉 항상 병을 핑계로 제사 지내는 일을 副官에게 맡겼다. 이렇게 해온 지가 이미 오래이므로 明宮(神廟)과 齋廬(齋室)가 위로는 비가 새고 옆으로는 바람이 들어오는데도 지붕을 덮지도 벽을 가리지도 않았으며,
희생은 비쩍 마르고 술은 시어 터졌는데, 그마저도 제사 때가 되어서야 마련하며, 水産品과 토산품이 담긴 籩豆가 어지러이 놓여 있으며, 祭物을 올리고 降神할 때에 몸을 일으키고 굽히는 것이 儀式에 맞지 않았다.
官吏가 갈수록 더욱 제사를 올리지 않으니[不供], 神이 제사를 흠향하지 못하였다. 〈이에〉 세찬 바람과 사나운 비가 무시로 발작하여 백성들이 그 해를 입었다.
元和 12년에 비로소 詔書를 내려 전 尙書右丞 國子祭酒 魯國 孔公(孔戣)을 廣州刺史 兼御史大夫에 임명하여, 南方을 鎭守[殿]하게 하였다.
孔公은 사람됨이 正直하고 엄숙하며 마음이 화열하고 平易하였다. 오직 맡은 바의 職務에만 謹愼하여, 백성을 嚴明하게 다스리고 신을 정성으로 섬겨, 內外(治人과 事神)에 정성을 다하면서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廣州에 부임한 이듬해 여름 무렵에 京師로부터 祝冊이 내려오니 관리가 〈立夏〉 때가 되었다고 아뢰었다. 孔公은 이에 목욕재계하여 몸을 깨끗이 하고 祝冊을 살피고서,
모든 有司들에게 맹세하기를 “祝冊에 皇帝의 이름자가 있으니, 이는 바로 황제께서 직접 쓰신 것이다. 그 祝文에 ‘先皇의 뒤를 이은 天子 아무개는 삼가 某官 某를 보내어 공경히 제사를 올린다.’라고 하셨다.
황제께서 공경하고 엄숙하심이 이와 같으니 감히 명을 받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일 나는 장차 神廟 아래에서 유숙하고서 새벽에 제사를 올리겠다.”라고 하였다.
이튿날 관리가 바람이 불고 비가 온다고 아뢰었으나, 孔公은 듣지 않았다. 이에 廣州府의 文武官 수백 인이 번갈아 謁見하고서 간하였으나, 모두 揖하고서 물러나왔다.
孔公이 마침내 배에 오르니 비바람이 조금 누그러져서 사공이 힘을 다해 배를 젓고, 검은 구름이 군데군데 벗겨져 그 사이로 햇빛이 새어나왔으며, 파도도 일지 않고 잠잠하였다.
犧牲을 살피던 저녁에는 개었다 흐렸다 하더니 제삿날 밤에는 천지가 활짝 개어 달과 별이 밝고 촘촘하였다.
5更을 알리는 북이 울리고 牽牛星이 하늘 한가운데에 뜨자, 이에 공공이 禮服을 갖추어 입고 笏을 들고 廟 안으로 들어가서 제사를 지내니, 文武官員과 賓屬(幕僚)들이 고개 숙여 명을 듣고는 자기들의 자리로 가서 각각 맡은 직무를 봉행하였다.
희생은 살지고 술은 향기로우며, 동이와 술잔이 정결하며, 오르내림이 禮數(儀節)가 있으니, 神도 아마 술에 취하고 음식에 배불렀을 것이고, 바다의 온갖 靈物과 怪物도 순식간[慌惚]에 모두 나와서 꿈틀대며 와서 음식을 흠향했을 것이다.
〈제사를 마치고서〉 廟門을 닫고 배를 돌리자, 상서로운 바람이 돛에 불어 배를 보내고 각종 깃발이 펄럭이며 하늘을 가려 컴컴하였다.
징과 북, 그리고 高音의 管樂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는 가운데 武夫들은 힘차게 배를 젓고, 樂工들은 서로 노래를 주고받았다.
큰 거북과 긴 물고기가 앞뒤에서 뛰어오르고, 하늘 끝과 땅 끝이 탁 트여 훤하게 드러났다. 제사를 지낸 해에는 風災가 없어 백성들이 고기와 게를 실컷 먹고 오곡이 모두 잘 여물었다.
이듬해 제사철이 돌아오면 또 廟宮(神廟)을 넓혀 키우고서 廟庭과 祭壇을 수축하고, 東‧西의 두 齋舍[序]와 齋室 및 廚房[庖]을 改築하고, 모든 用品을 모두 修理하였다.
이듬해 그때가 돌아오자, 공공은 또 굳이 가서 게을리하지 않고 더욱 정성을 다하니, 歲事(농사)가 연거푸[仍] 大豐[大和]이 들어서 늙은이들이 〈태평의〉 노래를 불렀다.
처음 공이 이곳에 부임했을 적에 다른 名目의 賦稅를 모두 없애고, 官에서 주는 俸祿으로 생활[衣食]하는 자 중에 없어도 될 만한 자는 罷職하였으며, 사방에서 온 使者들을 재물로 사귀지 않는 것을 몸소 실천해 모범을 보였다.
燕享(빈객을 접대하는 연회)에 일정한 시간을 두고 賞을 주는 데 절제를 두니, 公家나 私家에 재물[藏]이 쌓여 上下(公私)가 함께 풍족해졌다.
이에 屬州에서 오랫동안 내지 못한 稅金 24만 緡(千文)과 쌀 3만2천 斛을 면제해주고, 돈으로 稅를 바치는 고을의 耗金이 1년에 800냥인데 곤궁하여 償還하지 못한 것을 모두 면제[丐]해주었으며,
西南地方 守長들의 俸祿을 올려주고, 더욱 불량하여 명령을 듣지 않는 자들을 처벌하니, 이로 말미암아 守長들이 모두 스스로 체통을 소중히 여겨 법을 신중히 遵守하였다.
남방에 떨어져서 돌아가지 못한 士人과 流配人의 후손 128家族 중에 재능이 있거나 선량한 자를 등용하고, 호소할 곳이 없는 자에게는 양식을 지급하고,
출가시킬 때가 된 딸이 있는 집에는 돈과 재물을 주어 婚期를 잃지 않게 하였다. 이에 형벌과 은덕이 동시에 거행되어 수천 리 지역이 도적을 모르게 되어,
산길을 가거나 바다에서 묵거나 처소를 가리지 않았으니, 〈孔公은〉 神을 섬기고 사람을 다스린 것이 모두 지극했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모두 廟庭에 비석을 세워 그 아름다운 공적을 드러내고, 詩를 지어 붙이기를 원하기에 다음과 같이 시를 짓는다.
남해의 陰墟는
祝融의 邸宅이지
그 곁에서 제사 올릴 적에
황제께서 南伯에게 명하셨네
관리들 게을러 몸소 거행치 않더니
지금 공으로부터 바로잡혔네
神明이 황제가 내린 물건 흠향하고서
우리나라 도우셨네
영명하신 천자께서
사자를 신중히 선발하셨네
우리 공께서 관직에 계시니
신명과 백성들 크게 기뻐하였네
海嶺 모퉁이의 궁벽한 곳이
이미 풍족해 은택 입었으니
어찌 그 은택 고루 널리 펼치도록
공에게 권한 맡기지 않으시리오
공의 걸음 지체하지 마소
그렇다고 서둘러 돌아가지도 마소
내 사사로이 공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신명과 백성이 함께 의지하기 때문이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