以客形主로되 而立論奇高하고 造語怪偉하니 當是昌黎大文字라
하야 專用武勝
이러니 遭世衰
하야 無明天子
하니 遂虎呑諸國爲雄
하니라
諸國旣皆入秦爲臣屬
하야 秦無所取利
하니 上下相賊害
타가 卒
하니라
徐處得地中
하야 文德爲治
러니 及偃王誕當國
하야 益除去刑爭末事
하고 凡所以
一出於仁義
하니라
當此之時하야 周天子穆王無道하야 意不在天下하고 好道士說하야
四方諸侯之爭辯者
가 無所
하야 咸
於徐
하야 于徐之庭者
가 三十六國
이요 하니라
穆王聞之恐
하야 遂稱受命
하야 命
御
하고 長驅而歸
하야 하니라
徐不忍鬪其民하야 北走彭城武原山下하니 百姓隨而從之가 萬有餘家라
偃王死에 民號其山爲徐山이라하고 鑿石爲室하야 以祠偃王하니라
偃王雖走死失國
이나 民戴其嗣爲君如初
하니라 는 祖孫相望
하니라
自秦至今히 名公巨人이 繼跡史書하니라 徐氏十望에 其九皆本於偃王이나 而秦後迄玆無聞家하니라
天於柏翳之緖에 非偏有厚薄이라 施仁與暴之報가 自然異也ㄹ새니라
衢州는 故會稽太末也라 民多姓徐氏하고 支縣龍丘에 有偃王遺廟하니라
或曰 偃王之逃戰에 不之彭城하고 之越城之隅하며 棄玉几硏於會稽之水라하고
或曰 徐子章禹旣執于吳에 徐之公族子弟散之徐揚二州間하야 卽其居立先王廟云이라
開元初
에 이 相屬爲刺史
하야 帥其部之同姓
하야 改作廟屋
하고 載事于碑
하니라
後九十年에 當元和九年하야 而徐氏放이 復爲刺史하니라 放字達夫로 前碑所謂今戶部侍郞이 其大父也라
春行視農할새 至于龍丘하야 有事于廟러니 思惟本原하야 曰 故制觕樸下窄하야 不足以揭虔妥靈하고
而又梁桷赤白하야 陊剝不治하고 圖像之威가 䵝昧就滅하고 藩拔級夷하고 庭木禿缺이라
祈甿日慢
하야 祥慶弗下
하니 州之群支
가 不獲蔭庥
라 余惟遺紹
로 而
하니
不卽不圖하야 以有資聚면 罰其可辭아 乃命因故爲新하니 衆工齊事하야
是歲에 州無怪風劇雨하고 民不夭厲하며 穀果完實하니
民皆曰 耿耿祉哉
라 로다 乃相與請辭京師
하야 歸而鑱之於石
하니라
辭曰
秦傑以顚하고
徐由遜緜이라
秦鬼久饑하고
徐有廟存이라
婉婉偃王은
惟道之耽이라
以國易仁
하야 爲笑于頑
이라 自初擅命
으로 고 歷短詈長
하니 有不償亡
이라 課其利害
하면 孰與王當
고
姑蔑之墟는
太末之里니
誰思王恩하야
立廟以祀오
王之聞孫이
世世多有하니
唯臨玆邦하야
廟土實守라
堅嶠之後
에 達夫廓之
하야 王歿萬年
에 라 王孫多孝
하야 世奉王廟
라 達夫之來
에 先愼詔敎
하야
盡惠
하고 不主於神
이라 維是達夫
知孝之元
이라 太末之里
와 姑蔑之城
에 廟事時修
하야 仁孝振聲
하니
宜寵其人
하야 以及後生
이라 嗟嗟維王
이여 雖古誰亢
고 王死于仁
하고 以暴喪
이라 文追作誄
하야 刻示茫茫
하노라
按 偃王事不見傳記어늘 昌黎特採世所傳小說하야 撰次本末이라
而其議論歸本處에 當以徐之公族子弟祠偃王於其土爲是라
客으로서 주인을 드러내었는데, 논리를 세운 것이 奇高(기묘하고 高雅함)하고 말을 만든 것이 怪偉(怪異)하니, 昌黎의 大文字(뛰어난 문장)로 여겨짐이 마땅하다.
徐國과 秦國은 모두 柏翳에게서 나왔으니 姓이 嬴이다. 두 나라는 夏‧殷‧周 때에 모두 大功이 있었다.
秦나라는 서쪽 변방에 위치하여 오로지 무력만을 사용해 승리를 취하였는데, 世道가 쇠한 때를 만나 밝은 天子가 없자, 마침내 여러 나라를 倂呑하고서 〈西方의〉 영웅으로 자처하였다.
여러 나라들이 모두 秦나라에 귀순[入]해 신하가 되어 秦나라가 〈더 이상〉 이익을 취할 곳이 없게 되자 상하가 서로 해치다가 끝내 그 나라를 망치고 그 종족을 멸망시켰다.
徐國은 천하의 중앙(지금의 彭城)에 위치하여, 禮樂과 敎化[文德]로 나라를 다스렸는데, 偃王 誕이 國政을 담당함에 미쳐 刑罰과 競爭 등 말단의 일을 더욱 제거하고,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養育하고 사방(이웃나라)을 대우하는 방법을 하나같이 仁義로써 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周나라 天子 穆王이 무도하여 마음이 천하의 일에 있지 않고 道士의 邪說을 좋아하여
여덟 필의 駿馬를 타고서 서쪽으로 유람을 떠나 西王母와 함께 瑤池 가에서 잔치를 열어 술을 마시고 노래하며 돌아오기를 잊었다.
그러자 사방의 爭訟하는 諸侯들이 質正할 곳이 없어서, 모두 徐國에 賓服(귀순)하여 玉帛‧죽은 짐승‧산 짐승 등의 禮物을 가지고 와서 徐國의 廟庭에 늘어놓은 나라가 서른여섯이었다. 또 붉은 활과 붉은 화살 등 상서로운 물건을 얻었다.
穆王은 이 소문을 듣고 두려워하여, 드디어 天命을 받았다고 稱하고서 造父에게 명하여 수레를 몰게 하여 먼 길을 달려 돌아와서 楚나라와 공모해 徐國을 토벌하려 하였다.
그러자 서언왕은 그 백성들을 차마 전쟁에 희생시킬 수가 없어서, 북쪽의 彭城 武源山 밑으로 도망가니 따르는 백성이 만여 戶였다.
偃王이 죽은 뒤에 백성들은 武源山을 徐山이라 호칭하고 바위를 깎아 石室을 만들고서 〈그 석실에서〉 偃王에게 제사를 올렸다.
偃王이 비록 도망해 〈타향에서〉 죽고 나라를 잃었으나, 백성들이 그 後嗣를 추대해 임금으로 삼아 받들기를 당초에 偃王을 받들 듯이 하였다. 駒王과 章禹는 祖孫이 서로 承繼하였다.
〈徐氏는〉 秦나라로부터 지금까지 명망 높은 貴人이 史書에 끊임없이 잇따랐다. 徐氏의 명망 있는 열 개 家門 중에 아홉 집은 모두 偃王의 후손인데, 秦나라의 후손 중에는 지금까지 명망 있는 가문이 없다.
이는 하늘이 柏翳의 후손들에 대해 치우치게 厚待하거나 薄待한 것이 아니라 仁政을 베풀고 暴政을 베푼 應報가 자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衢州는 옛날의 會稽 太末인데, 住民 중에 姓이 徐氏인 자가 많고, 衢州의 支縣(屬縣)인 龍丘에 偃王의 遺廟(古廟)가 있다.
혹자는 “徐偃王이 전쟁을 피해 도망갈 때에 彭城으로 가지 않고 越城의 邊境으로 가면서 玉几(옥으로 장식한 几案)와 벼루[硏]를 會稽의 물속에 버렸다.”고 하고,
혹자는 “徐子(徐나라 임금) 章禹가 吳나라에 잡혀간 뒤에 徐氏의 宗族子弟들이 徐州‧揚州 사이에 흩어져 살면서, 자신들이 사는 곳에 先王의 廟를 세웠다고 한다.”고 하였다.
開元 초기에 徐氏 姓을 가진 두 사람이 연달아 衢州刺史가 되어, 그 부하 중에 同姓인 자들을 거느리고 徐偃王의 사당을 改築하고서 그 일을 비석에 기재하였다.
그로부터 90년 뒤인 元和 9년에 徐放이 다시 衢州刺史가 되었다. 徐放은 字가 達夫로 전의 비석에 이른바 ‘지금 戶部侍郞’이 바로 그 祖父이다.
그는 봄에 순행하며 농사를 시찰할 적에 龍丘에 이르러 徐偃王廟에 제사를 올렸는데, 〈그때〉 本原(뿌리)을 생각하며 말하였다.
“옛 廟宇가 거칠고 소박하며 낮고 좁아서, 정성을 바치기에도 神靈을 안치하기에도 부족하며,
또 들보와 서까래의 색깔이 흐려지고 벗겨져서 얼룩얼룩한데도 수선하지 않았으며, 위엄스러워야 할 圖像(肖像)이 시커멓게 변해서 보려 해도 보이지 않으며, 주위의 울타리는 다 뽑히고 섬돌은 무너져 평지가 되었으며, 정원의 樹木은 마치 대머리처럼 가지가 거의 없다.
기도하는 백성들이 갈수록 게을러져서 神靈이 祥慶(福)을 내리지 않으시니, 本州에 거주하는 여러 支孫들이 신의 비호를 받지 못한다. 나는 바로[惟] 徐偃王의 후예[遺紹]로 이 州의 政務를 주관하고 있으니,
〈廟宇를 改修하는 일을〉 착수[卽]하지도 않고 도모하지도 않으면서 재물만을 모은다[資聚]면 〈神의〉 懲罰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이에 명을 내려 옛 廟를 새롭게 改修하게 하니, 모든 工人이 일제히 일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아무 달 아무 날에 工匠이 完工을 보고하니, 廟中에서 성대하게 제사를 거행할 적에 州吏로 있는 宗卿(宗人)이 모두 와서 순서대로 서서 제사에 참여하였다.
이해에 衢州에는 폭풍과 폭우가 없었고, 夭死하거나 전염병에 걸린 백성이 없으며, 곡식과 과실이 풍성하니,
백성들이 모두 “福이 밝게 드러났음이여! 이 일이 묻혀 알려지지 않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고서, 이에 여러 사람이 함께 京師로 와서 碑文을 청해 받아 가지고 돌아가서 그 글을 비석에 새겼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秦나라는 포악하여 나라 망쳤고
徐나라는 겸손하여 오래도록 이어졌네
진나라 귀신은 오랫동안 굶었고
서나라 조상은 사당에서 제사 받았네
온화하고 유순하신 偃王은
오직 道만을 즐기셨네
나라를 仁義와 바꾸시어
흉악한 무리의 비웃음 사셨네
처음 멋대로 명한 때부터
姓이 몇 번이나 바뀌었든가
지속한 햇수는 짧고 욕먹는 기간은 기니
얻은 것이 잃은 것을 보상할 수 없네
그 이해를 따져보면
누가 언왕을 당할손가
姑蔑의 유허는
太末의 지역이니
누가 언왕의 은혜 생각하여
사당 세워 제사하였는가
언왕의 명망 있는 자손
대대로 많이 있으니
이 고장의 자사로 와서
사당을 실로 수호하였네
徐堅과 徐嶠 이후에
達夫가 확장하여
언왕이 죽은 지 만년이건만
처음 祔祭할 때와 같네
언왕의 자손에 효손들 많아
대대로 언왕의 사당에 奉祀하네
달부가 와서
먼저 백성 교도하였네
廟民에게 은혜 극진히 베풀고
신을 받드는 일에만 정신을 쏟지 않았네
이 달부는
효도의 본원을 알아
태말의 마을과
고멸의 성에서
사당에 제사를 철마다 거행하여
仁孝하다는 명성 진동하였으니
응당 그 사람 총애하여
후손에까지 그 총애 미치리
아 언왕이시여
비록 고인이 되었지만 누가 필적할 수 있으리
언왕은 인을 위해 죽었으나
진나라는 포학으로 망하였지
문자로 추기해 誄文을 지어
비석에 새겨 아득한 후인에 보이노라
고찰하건대, 偃王의 일이 傳記에 보이지 않는데, 昌黎가 특별히 세상에 전하는 小說에서 뽑아서 그 본말을 순서에 따라 엮은 것이다.
그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논한 곳에 徐氏의 宗族子弟들이 偃王을 그 지역에서 享祀하는 것을 옳게 여긴 것이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