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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韓愈(2)

당송팔대가문초 한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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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한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以交遊離合之情爲文하니 又一種風調
貞元中 하니라 李生之以侍御史管汴之鹽鐵이러니 日爲酒殺羊享賓客하니라
李生則尙與其弟學讀書하고 習文辭하야 以擧進士爲業하니라 愈於太傅府年最少 故得交李生父子間하니라
今愈以都官郞守東都省하고 侍御自衡州刺史爲하야 亦留此掌其府事하니 李生自湖南從事請告來覲하니라
於時 太傅府之士 惟愈與獨存하고 其外則李氏父子 相與爲四人이라
幸而集處하야 得燕而擧一觴相屬하니 此天也 非人力也
侍御與周君於今爲先輩成德하고 李生溫然爲君子하야 有詩八百篇 傳詠於時로되
惟愈也業不益進하고 行不加修 顧惟未死耳로라 往拜侍御어나 謁周君이어나 扺李生이면 退未嘗不發媿也
往時侍御盡費於朋友러니 及今則又不忍其三族之寒饑하야 聚而館之하니 疏遠畢至하야 祿不足以養이라
李生雖欲不從事於外 其勢不可得已也 重李生之還者皆爲詩하니 愈最故 故又爲序云하노라


08. 湖南 李正字를 전송한
벗과 서로 헤어지고 만나는 정을 글로 만들었으니, 또 하나의 風調(風格格調)이다.
貞元 연간에 내가 太傅 隴西公(董晉)을 따라가 汴州를 평정하였다. 이때 李生(李礎)의 아버지는 侍御史汴州鹽鐵을 관리하셨는데, 날마다 주연을 베풀고 을 잡아 賓客을 접대하였다.
당시 李生은 오히려 그 아우와 함께 글을 읽고 문장을 익혀 進士試에 응시할 것을 으로 삼았다. 나는 太傅幕府에서 나이가 가장 젊었기 때문에 李生父子와 교유할 수 있었다.
太傅 隴西公께서 薨逝하자,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軍司馬從事 등이 모두 살해되고, 侍御史(李仁鈞)도 참소를 입어 백성으로 강등되어 日南縣으로 유배되었다. 그로부터 5년 뒤에 나 또한 陽山縣令으로 좌천되었다.
지금 나는 都官員外郞으로 東都省을 지키고 있고, 侍御史衡州刺史親王府長史가 되어 역시 이곳에 머물러 王府의 일을 맡고 있으므로 李生湖南從事(幕僚)로서 휴가를 청해 와서 覲親하였다.
이때 지난날 太傅幕府에 있던 사람 중에 오직 나와 河南府司錄으로 있는 周君만이 살아 있고, 그 밖의 사람으로는 李氏 부자뿐이니, 서로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 넷뿐이었다.
그런데 헤어진 지 13년 만에 다행히 한곳에 모여, 잔치를 열고 술잔을 들어 서로 권하게[] 되었으니, 이는 하늘이 준 인연이지 人力으로 된 것이 아니다.
侍御史周君은 지금 德行을 성취한 先輩가 되었고, 李生은 온화한 君子가 되어 그가 지은 800편의 를 당시 사람들이 서로 전하며 읊조리고 있다.
그런데 오직 나만은 학업이 더 진전됨이 없고 덕행이 더 수양됨이 없으면서도 단지 죽지 않고 살아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侍御史를 찾아뵙거나 周君을 알현하거나 李生을 만나볼 때면 돌아온 뒤에 부끄러운 생각이 일지 않은 적이 없었다.
지난날 侍御史는 벗들을 접대하느라 有無(家財)를 다 소비하더니, 지금은 또 飢寒에 고생하는 三族을 차마볼 수 없어 그들을 모두 한곳에 모아 살게 하니, 소원한 친척들까지 모두 찾아와서 侍御史祿俸만으로는 그들을 부양하기에 부족하였다.
李生이 비록 外地로 가서 幕僚(從事) 노릇을 하지 않으려 해도 가정의 형편이 그리하지 않을 수 없다. 李生任地로 돌아가는 것을 애석[]하게 여기는 자들이 모두 를 지었다. 나는 그와 가장 오래된 벗이므로 또 이 를 지었다.


역주
역주1 送湖南李正字序 : 李正字는 李仁鈞의 아들 李礎로 貞元 19년(803)에 進士試에 급제하여, 元和 초년에 秘書省正子 및 湖南觀察推官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를 ‘正字’라 한 것이다. 이때 한유는 李礎의 부친 李仁鈞과 함께 汴州刺史 宣武節度使 董晉의 幕僚로 있었는데, 李礎가 湖南에서 휴가를 받고 와서 覲親하였다. 李礎가 돌아갈 때에 많은 사람들이 詩를 지어 전송하고, 한유는 이 序를 지어 송별하였다.
역주2 愈從太傅隴西公平汴州 : 太傅 隴西公은 汴州刺史‧宣武節度使 董晉을 이른다. 이때 전임 節度使 李萬榮이 병으로 눕자, 그 아들 李迺가 스스로 兵馬使가 되었는데, 軍人들이 또 李迺를 축출하였다. 汴州가 크게 혼란하니, 董晉이 幕僚들을 거느리고 가서 汴州를 평정하였다. 이때 한유는 董晉 幕下의 觀察推官이었다.
역주3 尊府 : 남의 아버지에 대한 존칭이다.
역주4 公薨軍亂……爲民日南 : 貞元 12년(796) 2월에 董晉이 죽자, 汴州의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軍司馬 陸長源과 判官(從事) 孟叔度 등이 모두 살해되고, 侍御史(李仁鈞)도 참소를 입어 백성으로 강등되어 日南縣으로 유배된 일을 이른다. 唐나라 제도는 3品官 이상의 죽음을 薨으로 칭한다.
역주5 親王長史 : 親王은 王으로 封해진 皇帝의 형제나 아들을 이르고, 長史는 王府의 일을 맡아 처리하는 官名이다.
역주6 河南司錄周君 : 周君은 이름이 君巢로, 이때 河南府司祿參軍으로 있었다.
역주7 離十三年 : 貞元 15년(799)에 서로 헤어졌다가 元和 5년(810)에 다시 만났으니, 헤어진 기간이 12년이다. 十三의 三은 二의 誤字인 듯하다.
역주8 有無 : 家財를 이른다.

당송팔대가문초 한유(2) 책은 2020.12.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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