貞元中
에 하니라 李生之
以侍御史管汴之鹽鐵
이러니 日爲酒殺羊享賓客
하니라
李生則尙與其弟學讀書하고 習文辭하야 以擧進士爲業하니라 愈於太傅府年最少라 故得交李生父子間하니라
今愈以都官郞守東都省
하고 侍御自衡州刺史爲
하야 亦留此掌其府事
하니 李生自湖南從事請告來覲
하니라
於時
에 太傅府之士
에 惟愈與
獨存
하고 其外則李氏父子
니 相與爲四人
이라
에 幸而集處
하야 得燕而擧一觴相屬
하니 此天也
요 非人力也
라
侍御與周君於今爲先輩成德하고 李生溫然爲君子하야 有詩八百篇이 傳詠於時로되
惟愈也業不益進하고 行不加修나 顧惟未死耳로라 往拜侍御어나 謁周君이어나 扺李生이면 退未嘗不發媿也라
往時侍御
盡費於朋友
러니 及今則又不忍其三族之寒饑
하야 聚而館之
하니 疏遠畢至
하야 祿不足以養
이라
李生雖欲不從事於外나 其勢不可得已也라 重李生之還者皆爲詩하니 愈最故라 故又爲序云하노라
벗과 서로 헤어지고 만나는 정을 글로 만들었으니, 또 하나의 風調(風格과 格調)이다.
貞元 연간에 내가 太傅 隴西公(董晉)을 따라가 汴州를 평정하였다. 이때 李生(李礎)의 아버지는 侍御史로 汴州의 鹽鐵을 관리하셨는데, 날마다 주연을 베풀고 羊을 잡아 賓客을 접대하였다.
당시 李生은 오히려 그 아우와 함께 글을 읽고 문장을 익혀 進士試에 응시할 것을 業으로 삼았다. 나는 太傅의 幕府에서 나이가 가장 젊었기 때문에 李生의 父子와 교유할 수 있었다.
太傅 隴西公께서 薨逝하자,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軍司馬와 從事 등이 모두 살해되고, 侍御史(李仁鈞)도 참소를 입어 백성으로 강등되어 日南縣으로 유배되었다. 그로부터 5년 뒤에 나 또한 陽山縣令으로 좌천되었다.
지금 나는 都官員外郞으로 東都省을 지키고 있고, 侍御史도 衡州刺史로 親王府의 長史가 되어 역시 이곳에 머물러 王府의 일을 맡고 있으므로 李生이 湖南의 從事(幕僚)로서 휴가를 청해 와서 覲親하였다.
이때 지난날 太傅의 幕府에 있던 사람 중에 오직 나와 河南府의 司錄으로 있는 周君만이 살아 있고, 그 밖의 사람으로는 李氏 부자뿐이니, 서로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 넷뿐이었다.
그런데 헤어진 지 13년 만에 다행히 한곳에 모여, 잔치를 열고 술잔을 들어 서로 권하게[屬] 되었으니, 이는 하늘이 준 인연이지 人力으로 된 것이 아니다.
侍御史와 周君은 지금 德行을 성취한 先輩가 되었고, 李生은 온화한 君子가 되어 그가 지은 800편의 詩를 당시 사람들이 서로 전하며 읊조리고 있다.
그런데 오직 나만은 학업이 더 진전됨이 없고 덕행이 더 수양됨이 없으면서도 단지 죽지 않고 살아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侍御史를 찾아뵙거나 周君을 알현하거나 李生을 만나볼 때면 돌아온 뒤에 부끄러운 생각이 일지 않은 적이 없었다.
지난날 侍御史는 벗들을 접대하느라 有無(家財)를 다 소비하더니, 지금은 또 飢寒에 고생하는 三族을 차마볼 수 없어 그들을 모두 한곳에 모아 살게 하니, 소원한 친척들까지 모두 찾아와서 侍御史의 祿俸만으로는 그들을 부양하기에 부족하였다.
李生이 비록 外地로 가서 幕僚(從事) 노릇을 하지 않으려 해도 가정의 형편이 그리하지 않을 수 없다. 李生이 任地로 돌아가는 것을 애석[重]하게 여기는 자들이 모두 詩를 지었다. 나는 그와 가장 오래된 벗이므로 또 이 序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