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姓李氏
요 諱臯
며 字子蘭
이요 謚曰成
이라 其先王明
이 以太宗子
러니 絶復封
하야 傳五王至成王
하니라
成王嗣封이 在玄宗世하니 葢於時年十七八이라 紹爵三年에 而河南北兵作하야 天下震擾하니
王奉母太妃逃禍民伍
하야 得間走蜀從天子
하니라 天子念之
하사 自都水使者拜左領軍衛將軍
이라가 轉
하니라
王生十年而失
이라 哭泣哀悲
하니 弔客不忍聞
이라 喪除
에 痛
하고 委己於學
하니라
稍長에 重知人情하고 急世之要하야 恥一不通하니라 侍太妃從天子于蜀하니 旣孝旣忠하고 持官持身하니 內外斬斬이라
由是朝廷滋欲試之於民
하니라 上元元年
에 除溫州長史
하야 刺史事
하니라
江東新刳於兵
하고 郡旱饑
하야 民
走
하야 死無弔
하니라
王及州하야 不解衣하고 下令掊鎻擴門하야 悉棄倉實與民하야 活數十萬人하니라
奏報
하니 升秩少府
하니라 하야 仍徙秘書兼州別駕
라가 하니 하니라
法成令修하야 治出張施하니 聲生勢長하니라 觀察使噎媢不能出氣하야 誣以過犯하니 御史助之하야 貶潮州刺史하니라
王之遭誣在理에 念太妃老하야 將驚而戚하야 出則囚服就辯하고 入則擁笏垂魚하야 坦坦施施하니라
卽貶于潮에 以遷入賀하니라 及是然後에 跪謝告實하니라
斂兵荊黔洪桂伐之나 二年尤張이라 於是以王帥湖南하야 將五萬士하야 以討良爲事하니라
王至則屏兵
하고 投良以書
하야 中其忌諱
하니 良羞畏乞降
이나 進退
하니라
王卽假爲使者하야 從一騎하고 踔五百里하야 扺良壁하야 鞭其門하고 大呼호되 我曹王來受良降이어늘
良今安在
오하니 良不得已
하야 迎拜
하고 盡降其軍
하니라
太妃薨에 王棄部하고 隨喪之河南葬하니라 及荊에 被詔責還하니라
會梁崇義反일새 王遂不敢辭以還하니라 升秩散騎常侍하니라
明年
에 李希烈反
하니 遷御史大夫
하야 授節帥江西以討希烈
하니라 命至
에 王出止外舍
하야 禁無以家事
我
라하니라
裒兵大選江州
하야 群能著職
하고 王親敎之
之法
하고 하니라
艦步二萬人
으로 以與賊
하야 하야 踣之
하고 剜蘄之黃梅
하고 大鞣長平
하고 鏺廣濟
하고
掀蘄春하고 撇蘄水하고 掇黃岡하고 筴漢陽하니라 行跐汊川이라가 還大膊蘄水界中하야 披安三縣하야 拔其州하고 斬僞刺史하니라
標光之北山
하고 𦧟隨光化
하고 梏其州
하니라 하야 하고 還開軍受降
하니라 大小之戰
이 三十有二
요 取五州十九縣
이라 民老幼婦女不驚
하고 市賈不變
하며 田之果穀
에 下無一跡
이라 加銀靑光祿大夫 工部尙書
라가 改戶部
하고 하야 眞食三百
이라 王之在兵
에 天子西巡于梁
하니라 希烈北取汴鄭
하고 東略宋圍陳
하고 西取汝
하고 薄東都
하니라 王坐南方北向
하야 落其
하니 賊死
不能入寸尺
이라 亡將卒十萬
이요 하니라
王始政於溫
하고 終政於襄
하니라 恒平物估
하야 賤斂貴出
하니 民用有經
하니라 하고 使令
하며 無所宿
하니 府中不聞急步疾呼
하니라 治民用兵
에 各有
하니 世傳爲法
하니라 任
도 偕盡其力能
하니라 薨贈右僕射
하니라 元和初
에 以子道古在朝
로 更贈太子太師
하니라
道古는 進士하야 司門郞하고 刺利, 隨, 唐, 睦이라가 徴爲少宗正兼御史中丞하고 以節督黔中하니라
朝京師
에 改命觀察鄂, 岳, 蘄,
, 安, 黃
하고 提其師以伐蔡
하니라
且行에 泣曰 先王討蔡하고 實取(汚)[沔], 蘄, 安, 黃하야 寄惠未亡이어늘 今余亦受命有事於蔡라
而四州適在吾封하니 庶其有集하리라 先王薨于今二十五年이요
吾昆弟在而墓碑不刻無文은 其實有待니 子無用辭하라 乃序而詩之하노라
成王之作
은 一自其躬
이라 文被明章
하고 武薦畯功
이라 하여 이라
以報于宗하고
以昭于王이라
王亦有子로되
處王之所하며
唯舊之視라
昌黎每自喜陳言之去라 故曹成王碑當亦屬公得意之文이라
而愚見則以務去陳言이라가 却行穿鑿生割하니 亦昌黎病處나 特其識正而語確이라 故學者不能訾니라
문장에 精爽(정신)이 담겨 있으나 字句가 生割(생경)하니, 昌黎의 本色을 면치 못하였다.
曹成王은 姓이 李氏이고 諱가 臯이며 字가 子蘭이고 謚가 成이다. 그 先王 李明이 太宗의 아들로 曹王에 봉해졌는데, 〈李明이 죽은 뒤에〉 封國이 끊겼다가 다시 封함을 받아 5代를 전하여 成王에 이르렀다.
成王이 선왕의 封國을 承繼한 것은 玄宗 때이니, 그때 成王의 나이 열일고여덟이었다.
封爵을 승계한 지 3년이 되던 해에 河南과 河北의 군대가 반란(安史의 亂)을 일으켜 천하가 진동하니,
成王은 母后인 太妃를 모시고 민간으로 피란하였다가 틈을 타 蜀으로 도주하여 天子를 따랐다. 天子는 그를 귀여워해 都水使者에서 左領軍衛將軍에 제수하셨다가, 뒤에 國子司業 秘書少監으로 轉職시켰다.
成王은 열 살 때에 先王을 여위었는데, 哭하는 소리가 애절하니 弔問客들이 차마 들을 수 없었다. 喪期를 마치고는 富豪家 〈자제의 오만한〉 버릇을 통렬히 씻어버리고 자신을 학문에 맡겼다.
조금 자란 뒤엔 人情(民情)을 아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세간의 요긴한 일을 急務로 여겨 이 중에 하나라도 통달하지 못하면 수치로 여겼다.
太妃를 모시고 蜀으로 가서 天子를 따랐으니 효도와 충성을 다한 것이고, 官職를 지키고 몸을 지켰으니 안과 밖이 整肅하였다.
이로 인해 조정에서는 더욱 그를 백성을 〈다스리는 地方官에〉 임용하고자 하였다.
上元 원년(760)에 溫州長史에 제수되어 刺史의 일을 兼攝하였다.
이때 江東은 새로 兵禍를 입었고, 溫州郡은 가뭄으로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모두 도망가서 사람이 죽어도 弔喪하는 자가 없었다.
成王은 溫州에 부임하여 채 옷도 갈아입기 전에, 창고의 자물쇠를 깨부수고 창고문을 활짝 열어 창고 안의 糧穀을 모두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라고 명하여 수십만 인을 살렸다.
奏章을 올려 이 일을 보고하니, 품계를 올려 少府에 임명하였다.
袁賊(反賊 袁晁)을 討平함에 미쳐[與] 秘書少監으로 승진하고 溫州別駕를 겸임하였다가 管轄區域[部]이 無事하다고 보고하니, 정식으로 衡州刺史에 임명하였다.
〈衡州刺史가 되어서는〉 法規를 만들고 條令을 실행하여 정치가 張施(部署)에서 나오니 명성이 생기고 세력이 커졌다. 〈그러자〉 觀察使 辛京杲는 질투로 마음이 답답해[噎媢]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 成王이 법을 범하였다고 무함하니, 御史가 관찰사를 도와 成王을 潮州刺史로 左遷시켰다.
楊炎이 道州를 떠나 조정으로 들어가 德宗의 宰相이 되어, 성왕을 衡州刺史로 복귀시켜 전에 당했던 억울한 무함을 씻어주었다.
성왕이 무함을 당해
審理를 받고 있을 적에 연로하신
太妃께서 놀라 슬퍼하실 것을 염려하여, 심리를 받으러 갈 때는
罪囚服을 입고 가서 변론하고, 돌아올 때는
笏을 끼고
魚符(
魚形의
符信)를 차고서 편안하고 즐거운 모습을 지었다.
魚符(≪集古虎符魚符考≫)
潮州刺史로 좌천되었을 때에 太妃께 들어가서 승진되었다고 축하하였다. 그러다가 이번에 무함을 벗은 뒤에야 태비께 무릎 꿇고 사죄하면서 사실을 고하였다.
당초에 觀察使 辛京杲가 포학하여, 衙將 王國良을 파견[使]해 변방을 지키게 하니, 王國良이 武岡縣에서 戍軍 만여 명을 이끌고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조정에서는〉 荊州‧黔州‧洪州‧桂州의 군대를 불러모아 叛軍을 토벌하였으나, 2년이 되도록 〈평정되지 않고〉 그 세력이 더욱 커졌다.
이에 成王을 湖南觀察使로 삼아 군사 5만을 거느리고 가서 王國良을 토벌하게 하였다.
성왕은 戰地로 가서 즉시 부대를 철수시키고, 王國良에게 편지를 보내어 〈投降을 권하였는데〉 그가 꺼리고 숨기려는 것을 정확히 말하니, 王國良은 부끄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여 항복하고 싶어 하면서도 의심하여 진퇴를 결정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성왕은 즉시 使者로 가장해 한 騎兵을 侍從으로 대동하고서 500리를 달려 王國良의 軍營으로 가서 채찍으로 그 문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부르기를 “나 曹王이 王國良의 항복을 받으러 왔는데,
王國良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라고 하니, 王國良은 깜짝 놀라[錯愕] 마지못해 나와 맞이해 절하고, 그 군대를 모두 항복시켰다.
太妃가 薨逝하자, 성왕은 官府의 일을 버리고[棄部] 喪柩를 모시고 河南으로 가서 장사 지내려고 하였는데, 荊州에 이르렀을 때에 〈돌아오라고〉 꾸짖는 詔書를 받고 돌아왔다.
이때 〈山南節度使〉 梁崇義가 배반하였기 때문에 성왕은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官階가 올라 散騎常侍가 되었다.
이듬해 〈淮寧軍節度使〉 李希烈이 배반하니, 성왕은 御史大夫로 승진하여 江西節度使의 符節을 받고 가서 李希烈을 토벌하였다.
詔命이 이르자, 성왕은 바깥채로 나가 起居하며 “私家의 일을 나에게 고하지 말라.”고 禁令을 내렸다.
그리고 江西에 군사들을 한곳에 모아놓고서 대대적으로 人才를 선발하여 재능이 있는 자들에게 모두 관직을 주고서[著職], 성왕이 직접 摶力‧勾卒‧嬴越의 兵法을 가르치고, 패전하면 그 무리에게 벌을 내리고 승리하면 그 부대에 상을 내리겠다고 하였다.
水軍과 陸軍 2만 명을 거느리고 賊과 교전하여 蔡山의 賊을 섬멸하여 무너뜨리고, 蘄州 黃梅縣에서 賊將의 목을 베고, 長平의 적을 유린하고 廣濟의 적을 무찌르고,
蘄春縣을 함락하고 蘄水縣을 공격하고, 黃崗縣을 탈취하고, 漢陽縣을 제압하였다.
汊川縣을 공격하려다가 돌아와서, 蘄水縣 경내에서 크게 교전하여 安州의 세 縣을 갈라놓고서[披] 安州를 함락하여 적이 세운 刺史를 斬首하였다.
光山縣의 北山을 공격하고, 隨州의 光化縣을 점령하고서 隨州를 포위하였다.
未成年者 열 사람 중에 한 사람을 군사로 뽑아 隨州 동북의 厲鄕을 구원하고 돌아와서 軍門을 활짝 열고 적군의 항복을 받았다. 〈이번 토벌에〉 크고 작은 전투가 32차례였고, 공격해 탈취한 곳이 5州 19縣이었다. 민간의 늙은이나 어린이, 부녀자들이 놀라지 않았고 시장의 물가에 변동이 없었으며, 과일나무 밑이나 곡식을 심은 전지에는 사람 발자국이 나지 않았다.
銀靑光祿大夫에 加資되어 工部尙書에 제수하였다가 戶部尙書에 改授되고, 다시 荊南과 襄州의 節度使가 되어 300戶를 食邑으로 받았다.
성왕이 軍中에 있을 때에 天子가 서쪽 梁州로 逃走[巡]하였다. 李希烈이 북쪽으로 汴州와 鄭州를 취하고, 동쪽으로 宋州를 약탈하고 陳州를 포위하고, 서쪽으로 汝州를 탈취하고서 東都 가까이 다가왔다. 성왕은 南方을 鎭守하다가 북쪽을 향해 〈進軍해〉 적의 정예군을 격파하니, 적은 죽을힘을 다해 공격하였으나, 한 치[寸] 한 자[尺]도 앞으로 나오지 못하였고, 사망한 將卒이 10만이었다. 李希烈이 점령했던 남방의 여러 州들을 모두 收復되었다.
성왕은 溫州에서 政事를 시작하고 襄州에서 정사를 마쳤다. 그는 항상 物價를 안정시키는 데 〈뜻을 두어〉 값이 싸면 買入하고 값이 비싸면 放出하니, 백성들의 消費가 항상 일정하였다. 吏屬에겐 한마음이 되게 하고 백성에겐 법을 준수하게 하며, 집집마다 밝게 깨우쳐 간악한 자들이 몸을 숨길 곳이 없게 하니, 府中에 다급한 발자국소리나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백성을 다스리고 군대를 부리는 데에 각각 조리와 次序가 있으니, 세상에서는 이것을 전하여 본보기로 삼았다. 그가 임용한 馬彞와 장군 伊愼‧王鍔‧李伯潛도 모두 그 힘과 재능을 다하였다.
성왕이 薨逝하니 右僕射에 追贈하였다. 元和 초년에 그 아들 李道古가 조정의 官員이 되었으므로 다시 太子太師에 추증되었다.
李道古는 進士試에 급제하여 司門員外郞을 지내고, 利州‧隨州‧唐州‧睦州의 刺史가 되었다가 조정의 부름을 받고 올라와서 宗正寺少卿 兼御史中丞이 되었고 符節을 받아 黔中觀察使가 되었다.
京師로 와서 朝見하자 다시 鄂州‧岳州‧蘄州‧沔州‧安州‧黃州의 觀察使로 임명하고서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蔡州의 〈吳元濟를〉 토벌하게 하였다.
李道古는 떠날 때에 눈물을 흘리며 〈나에게〉 “先王(曹成王)께서 蔡州를 토벌하시고 沔州‧蘄州‧安州‧黃州를 취해 남기신 은혜가 아직 없어지지 않았는데, 이제 나 또한 조정의 명을 받고 蔡州를 토벌하게 되었다.
〈利州‧隨州‧唐州‧睦州〉 네 州가 마침 나의 관할이니 성공이 있기를 희망한다. 先王께서 薨逝하신 지 이제 25년인데,
우리 형제가 살아 있으면서도 墓碑를 새기지 않아 비문이 없는 것은 실로 그대를 기다려서이니 그대는 사양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에 序文을 짓고 詩를 붙인다.
辭는 다음과 같다.
태종의 아들 열세 사람 중에
曹王의 서열이 가장 막내셨네
이미 죽은 이도 있고 미천한 이도 있어
조왕께서 비로소 王位에 오르셨네
曹의 첫 번째 왕께서는
축출을 겁내다가 유배 중에 자살하였고
零陵王과 黎國公도
목숨 부지했단 말 듣지 못했네
조카와 숙부 번갈아 봉해져
세 왕이 빈 이름만 지니셨네
장구하게 백 년이 흐른 뒤에
비로소 成王께서 나오셨네
성왕께서 일어나신 것은
모두 자신의 능력이셨네
文治는 백성들에게 밝은 교화 입히고
武公은 나라에 큰 공을 바치셨네
죽어가는 초목 소생시키고 강한 세력 약화시키며
간사한 무리 누차 깨뜨리셨네
이로써 祖宗에 보답하고
성왕의 명성 드러내셨네
성왕 또한 아드님 두셨는데
성왕이 수복한 지방에 거처하며
오직 성왕의 옛 법을 지키셨네
일에 민첩하고 차례가 있어
공업을 이루어 선왕을 이으셨네
그 비석에 이 시를 새겨
끊임없이 나올 자손들에 보이노라
昌黎는 매양 진부한 말을 버리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므로 〈曹成王碑〉 또한 公의 뜻에 맞는 문장으로 돌리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진부한 말을 제거하는 데 힘쓰다가 도리어 견강부회하고 생잽이로 字句를 分割하였으니, 이 또한 昌黎의 결점이지만 그 식견이 바르고 말이 정확하다. 그러므로 학자들이 헐뜯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