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諱燕
이요 字燕奇
니 弘農華陰人也
라 大父知古
는 祁州司倉
하고
文誨
는 天寳中實爲平盧衙前兵馬使
하야 位至特進檢校太子賓客
하고 封弘農郡開國伯
하니라
에 公年幾二十
이라 進言于其父曰 大人守官
하니 宜不得去
어니와 王室在難
하니 某其行矣
리이다
其父爲之請于戎帥하야 遂率諸將校之子弟各一人하고 間道趨闕하야 變服詭行하야 日倍百里하니
天子嘉之하야 特拜左金吾衛大將軍員外置하고 賜勳上柱國하니라
大曆八年에 帥師納戎帥勉于滑州하니라 九年에 從朝于京師하니라
建中二年에 城汴州에 功勞居多하니라 三年에 從攻李希烈에 先登하니라
貞元二年에 從司徒劉公復汴州하니라 十二年에 與諸將執以城叛者하야 歸之于京師하다
事平에 授御史大夫하니 食實封百戸요 賜繒綵有加하니라 十四年에 年六十一로 五月某日에 終于家하니라
自始命左金吾大將軍으로 凡十五遷하야 爲御史大夫하니 職爲節度押衙右廂兵馬使 兼馬軍先鋒兵馬使요 階爲特進이요
勳爲上柱國
이요 爵爲淸邊郡王
으로 自三百戶至三千戸
하니 眞食五百戶
로 終焉
하니라
公
從軍
하야 四十餘年
에 敵攻無堅
하고 城守必完
이라
臨危蹈難이면 歔欷感發하야 乘機應會가 捷出神怪하니라
不畏義死하고 不榮幸生이라 故其事君無疑行하고 其事上無間言하니라
初에 僕射田公其母隔于冀州러니 公獨請往迎之하니라 經營賊城하고 出入死地하야 卒致其母하니
田公德之하야 約爲父子하니라 故公始姓田氏라가 田公終而後復其族焉하니라
嗣子通王屬良禎이 以其年十月庚寅葬公于開封縣魯陵岡하고 隴西郡夫人李氏祔焉하니라
夫人은 淸夷郡太守佑之孫이요 漁陽郡長史獻之女로 柔嘉淑明이러니 先公而殂하니라 有男四人과 女三人하니라
後夫人河南郡夫人雍氏는 某官之孫이요 某官之女로 有男一人과 女二人이러니 咸有至性純行하니라
夫人同仁均養하니 親族不知異焉이라 君子於是知楊公之德이 又行于家也니라
銘曰
烈烈大夫시여
逢時之虞하야
感泣辭親하야
從難于秦이라
維玆爰始하야
遂勤其事하야
四十餘年에
或裨或專하야
攻牢保危하다
爵位已隮에
旣明且愼하야
終老無隳하니라
魯陵之岡
이요 蔡河在側
이라 孝子
가 思顯勳績
하니 斵石於此
하야 式垂後嗣
하노라
순서에 따라 戰功을 서술한 것이 매우 통창하다. 그러나 문장이 힘차고 분방한 것은 太史公에 미치지 못한다.
公의 諱는 燕이고 字는 燕奇인데, 弘農郡 華陰縣 사람이다. 大父(조부) 知古는 祁州의 司倉을 지냈고,
烈考(부친) 文誨는 天寳 연간에 平盧軍衙前兵馬使에 임명되어 官位가 特進‧檢校太子賓客에 이르렀으며 弘農郡 開國伯에 봉해졌다.
公의 世代에 諸蕃(변경의 소수민족)과의 交易을 관장하였는데, 은덕과 신의가 드러나니 夷人(소수민족)들이 우러러 사모하였다.
安祿山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公의 나이 20세에 가까웠는데 그 부친께 進言하기를 “아버님께서는 관직을 지키셔야 하니 응당 떠나실 수 없지만, 王室이 危難에 처하였으니 제가 가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의 부친이 아들을 위해 戎帥(統帥)에게 요청해 〈허락을 받은 뒤에, 公은〉 마침내 여러 將校들의 자제 중에 각각 한 사람씩을 데리고, 남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옷을 바꾸어 입고 비밀스럽게 행군하여 하루에 200리씩을 〈달려 황제가 계시는 곳으로〉 달려가니,
天子께서 가상히 여겨 특별히 正員 외의 左金吾衛大將軍에 제수하고 上柱國의 勳爵을 내리셨다.
代宗 寳應 2년(763) 봄에 公에게 조서를 내려 僕射 田公을 따라가 劉展을 평정하고, 또 田公을 따라가 河北을 함락[下]하게 하였다.
代宗 大曆 8년(773)에 군대를 거느리고 戎帥(節度使) 李勉을 호위해 滑州로 들여보냈다. 9년에 戎帥를 따라 京師로 가서 황제를 알현하였다.
德宗 建中 2년(781)에 汴州城 築造에 공로가 많았다. 3년에 戎帥를 따라 李希烈을 공격할 때에 먼저 城樓에 올라갔다.
貞元 2년(786)에 司徒 劉公(劉洽)을 따라 汴州를 수복하였다. 12년에 여러 장군이 叛亂者를 잡아 京師로 보냈다.
반란이 평정된 뒤에 御史大夫에 제수하니, 실제로 받아먹는 封戶가 100戶이고 추가로 繒綵를 하사하였다. 14년에 나이 61세로 5월 아무 날에 집에서 사망하였다.
처음 左金吾大將軍에 임명된 뒤로부터 모두 열다섯 차례 轉遷(승진)하여 御史大夫가 되었다. 公의 官職은 節度押衙右廂兵馬使 兼馬軍先鋒兵馬使이고 官階는 特進이며,
勳級은 上柱國이고 爵位는 淸邊郡王으로, 명의상의 食邑은 300戶에서 3,000戸까지이지만 실제로 마지막에 받은 식읍은 500戶였다.
公은 成童의 나이에 從軍하여 40여 년 동안, 적은 공격하면 굳게 버티는 자가 없었고, 성은 지키면 반드시 완전하였다.
危難을 당하면 탄식하고 분발하여 기회를 이용하고 시기를 맞추는 것이 귀신처럼 신속하였다.
의롭게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요행으로 사는 것을 영예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임금을 섬길 때에 머뭇거리는 행동이 없었고 윗사람을 섬길 때에 비난하는 말이 없었다.
당초에 僕射 田公의 母親이 冀州에 떨어져 있었는데, 公이 홀로 冀州로 가서 맞이해 〈오겠으니 허락해달라고〉 요청하였다. 〈田公이 허락하자, 公은 이에〉 賊城을 왕래하고 死地를 出入하여 마침내 그 모친을 모셔오니,
田公은 그의 德行에 감격하여 公과 父子의 義를 맺었다. 그러므로 公이 처음에는 姓을 田氏로 썼다가 田公이 죽은 뒤에 본래의 姓으로 회복하였다.
通王의 부하[屬]로 있는 嗣子 良禎이 그해 10월 庚寅日에 公을 開封縣 魯陵의 언덕에 장사 지내고, 隴西郡夫人 李氏를 合祔하였다.
夫人은 淸夷郡太守 李佑의 孫女이고 漁陽郡長史 李獻의 따님으로 유순하고 선량하며 賢淑하고 총명하였는데, 公보다 먼저 죽었다. 4男 3女를 두었다.
後娶夫人인 河南郡夫人 雍氏는 某官의 손녀이고 모관의 따님으로 1남 2녀를 두었는데, 모두 성품이 더없이 착하고 행실이 순정하였다.
夫人은 〈前室 소생과 자기 소생의 자녀들을〉 똑같이 사랑하여 공평하게 養育하니, 친척들도 차별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君子들이 여기에서 楊公의 德行이 가정에서도 행해졌음을 알았다.
銘은 다음과 같다.
강직하신 대부시여
국난의 시기 만나시어
눈물로 어버이 이별하고
秦으로 가서 국난 구원하셨네
이때부터 시작하여
국사에 진력하셨지
40여 년 동안
혹은 裨將으로 혹은 主將으로
견고한 적의 진지 공격하고 위험한 아군 성지 보위하셨지
작위가 높이 오른 뒤에는
지혜가 밝고 행동이 신중했으며
늙어 죽을 때까지 변함이 없으셨네
〈그 무덤〉 魯陵 언덕에 있는데
蔡河가 곁에 있네
효성 깊은 효자들
선인의 공적 드러내기 생각하리니
이 돌에 그 공적 새겨
후손들에 전해 보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