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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韓愈(3)

당송팔대가문초 한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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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한유(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唐大家韓文公文抄 卷12 碑銘
歸安 鹿門 茅坤 批評
孫男 闇叔 茅著 重訂
序烏氏世系及戰功處 錯綜而鬯이라
元和五年 天子曰 하야 夸謾兇驕하야 出不遜言하니 其執以來하라
其四月 中貴人承璀卽誘而縛之하니 其下皆甲以出하야 操兵趨譁어늘
牙門都將烏公重胤 當軍門叱曰 天子有命하시니 從有賞하고 敢違者斬하리라 於是士皆斂兵還營이어늘 卒致從史京師하니라
壬辰 詔用烏公爲銀靑光祿大夫河陽軍節度使兼御史大夫하고 封張掖郡開國公하니라
居三年 河陽稱治하니 詔贈其父工部尙書하고 且曰 其以廟享하라하시니 卽以其年營廟於京師崇化里하니라
軍佐竊議曰 先公旣位常伯이로되 而先夫人無加命하야 號名差卑하니 於配不宜라하다
語聞 詔贈先夫人劉氏沛國太夫人하니라 八年八月 廟成하니 하니라
祀自左領府君而下하고 作主于第하야 乙巳 升于廟하니라
하고 譜於하며 列於하니 在莒者存 在齊有餘枝鳴 皆爲大夫 秦有獲 爲大官이라
其後世之江南者家鄱陽하고 處北者家張掖하며 或入夷狄爲君長하니라
唐初 察爲左武衛大將軍하니 實張掖人이라 其子曰令望이니 爲左領軍衛大將軍하고
孫曰蒙이니 爲中郞將한대 是生贈尙書諱承玼字某하니라
烏氏自莒齊秦大夫以來 皆以材力顯이러니 及武德以來 始以武功爲名將家하니라
開元中 尙書管平盧先鋒軍하야 契丹하고 從戰捺祿하야하니라
渤海擾海上하야 至馬都山하니 吏民逃徙失業하니라
尙書領所部兵塞其道하야 하야 綿四百里 深高皆三丈하야 寇不得進하니 民還其居하니라
歲罷運錢三千萬餘하니라 黑水室韋以騎五千來屬麾下하니 邊威益張하니라 其後與耿仁智謀하야 說史思明降하니라
思明復叛하니 尙書與兄承恩謀殺之라가 事發族夷하고 尙書獨走免하니라
李光弼以聞하니 詔拜冠軍將軍守右威衛將軍檢校殿中監하고 封昌化郡王石嶺軍使하니라
積粟厲兵하야 出入耕戰타가 以疾去職하니라 貞元十一年二月丁巳 薨於華陰告平里하니 年若干이라 卽葬于其地하니라
二子 大夫爲長이요 季曰重元이니 爲某官하다 銘曰
烏氏在唐하야
有家于初로다

二祖紹居로다
中郞少卑하야
屬于尙書로다
不償其勞하니
乃相大夫로다
授我하야
制有疆墟하고
하야
以有宗廟로다
作廟天都하야
以致其孝로다
右祖左孫
爰饗其報리라
云誰無子
無孫이리오
克對無羞
乃惟有人이라
念昔平盧
爲艱爲瘁
大夫承之하야
危不棄義
四方其平하야
士有하니
來覲來齋하야
以饋黍稷이라


01. 烏氏廟碑銘
烏氏世系戰功을 서술한 곳은, 對偶를 피하기 위해 글자를 도치시켜가며 글을 엮었으나[錯綜] 문장이 유창[]하다.
元和( 憲宗의 연호) 5년(810)에 天子께서 “盧從史가 처음에는 군대를 사용해 恒州의 〈王承宗을 토벌하기를〉 건의하더니, 마침내 은밀히 寇賊(王承宗)과 연합하여 스스로 잘난 체하며 흉악하고 거만하여 불손한 말을 하니, 그자를 잡아 오라.”고 하셨다.
그해 4월에 宦官[中貴人] 承璀가 가서 그를 유인해 잡았다. 그러자 그 부하들이 모두 갑옷을 입고 나와서 무기를 들고 뛰어다니며 시끄럽게 떠들었다.
그러자 牙門都將 烏公 重胤軍門을 가로막고 큰소리로 꾸짖기를 “天子께서 ‘순종하는 자에겐 을 주고 감히 어기는 자는 斬首하라.’고 명하셨다.”고 하였다. 이에 군사들이 모두 무기를 거두고 軍營으로 돌아가니, 마침내 從史京師押送하였다.
〈원화 5년 4월〉 壬辰日皇帝詔書를 내려 烏公銀靑光祿大夫 河陽軍節度使 兼御史大夫에 임용하고 張掖郡開國公하였다.
절도사로 있은 지 3년에 河陽이 잘 다스려진 것으로 칭송되니, 황제가 조서를 내려 그의 부친(烏承玼)을 工部尙書追贈하셨다. 그리고 또 “廟宇를 세워 享祀하라.”고 하시니, 즉시 그해에 京師崇化里廟宇營建하였다.
軍佐(補佐)들이 사사로이 의논하기를 “先公께서는 이미 常伯(工部尙書)의 에 오르셨으나, 先夫人께는 贈職이 없어서 號名이 약간 낮으니 配位로 합당하지 않다.”고 하였다.
이 말이 보고되자, 황제께서 조서를 내려 先夫人 劉氏에게 沛國太夫人을 추증하였다. 원화 8년(813) 8월에 廟宇가 완성되니 三室을 같은 廟宇에 모셨다.
제사는 左領府君으로부터 시작해 아랫대로 내려오면서 지내고, 神主府第에서 만들어 乙巳日廟宇에 올려 모셨다.
烏氏는 ≪春秋≫에 실려 있고 ≪世本≫에 系譜가 있고 ≪姓苑≫에 列記되어 있는데, 나라의 烏存나라의 烏餘烏枝鳴은 모두 大夫였고, 나라의 烏獲大官을 지냈다.
그 후손으로 江南에 있는 자는 鄱陽에 거주하고, 江北에 있는 자는 張掖에 거주하며, 夷狄의 나라로 들어가서 君長이 된 자도 있다.
나라 초기에 烏察左武衛大將軍이 되었는데, 실로 張掖 사람이다. 그 아들 烏令望左領軍衛大將軍을 지내고,
손자 烏蒙中郞將이었는데, 이분이 尙書에 추증된 承玼 아무개를 낳았다.
烏氏 세 나라의 大夫가 된 뒤로 모두 材力(능력)으로 顯達했는데, 武德( 高宗의 연호) 이후로 武功으로써 名將家門이 되기 시작하였다.
開元( 玄宗의 연호) 중년에 尙書(烏承玭)가 平盧先鋒軍를 관리하였는데, 契丹을 연파하고서 捺祿의 전투에 참가하여 可突干을 패주시켰다.
渤海海上(해변)에서 소요를 일으켜 馬都山까지 쳐들어오니, 관리와 백성이 모두 도주하여 生業을 잃었다.
그러자 尙書는 휘하부대의 병사를 거느리고서 발해군의 진로를 막으려고 4백 리에 걸쳐 3 깊이의 참호를 파고 3장 높이의 堡壘를 쌓아 敵軍이 진입할 수 없게 하니, 백성들이 자기들의 住居로 돌아왔다.
해마다 運送費 3천만 을 절감하였다. 黑水室韋騎兵 5천을 거느리고 와서 麾下歸屬하니 邊軍의 위세가 더욱 확장되었다. 그 뒤에 耿仁智와 함께 모의하여 史思明을 설득해 항복시켰다.
사사명이 다시 배반하자, 尙書는 그의 형 烏承恩과 함께 모의하여 그를 살해하려다가 일이 발각되어 가족이 몰살당하고 尙書만이 홀로 도주하여 죽음을 면하였다.
李光弼이 이 일을 上奏하니 황제께서 조서를 내려 冠軍將軍 守右威衛將軍 檢校殿中監에 제수하고 昌化郡王 石嶺軍使하셨다.
尙書께서는 군량을 비축하고 兵器를 예리하게 연마하여 나가면 전투하고 들어오면 耕作하다가 질병으로 에서 물러나셨다. 貞元 11년(795) 2월 丁巳日華陰 告平里에서 약간의 年歲薨逝하시니, 華陰 땅에 장사하였다.
아들 둘을 두셨는데, 大夫(烏重胤)가 長子이고, 某官 重元季子이다. 은 다음과 같다.
烏氏나라에 와서
비로소 명문가로 알려졌네
左武衛大將軍左領軍衛大將軍의 관직에
두 할아버님이 서로 이어서 거하셨네
中郞將께선 지위가 좀 낮으셔서
尙書公으로 이어졌네
공로를 보상받지 못하였으니
하늘이 大夫(烏重胤)를 보우하셨네
우리 대부에게 병권을 주시어
강역을 통제하게 하시고
제수가 갖추어지고 의 등급도 높아
종묘까지 가지시었네
천자의 도성에 사당을 세워
아들로서의 효도 바치게 하시니
右室의 조부와 左室의 손자가
응당 그 보답을 누리시리라
누군들 아들 없으며
누군들 손자 없으랴
선조를 면대해 부끄럽지 않은 것은
훌륭한 후인이 있어서이지
옛날 平盧軍의 선봉 되셨을 때
참으로 어렵고 고달팠는데
대부가 그 뒤를 이으시어
위급해도 의리 버리지 않으셨지
사방이 평정되어
선비들 안식할 수 있으니
재계하고 찾아와 알현하고서
黍稷을 제물로 올리리라


역주
역주1 烏氏廟碑銘 : 이 碑銘은 韓愈가 烏重胤(761~827)의 부친을 위해 지은 것이다. 叛賊 吳元濟를 생포하고 淮西를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오중윤의 부친 烏承玭에게 조정에서는 工部尙書를 追贈하고 廟宇를 세우도록 명하였다.
역주2 盧從史始立議用師于恒 乃陰與寇連 : 元和 4년(809) 3월에 成德軍節度使 王士眞이 죽자, 그 아들 王承宗이 스스로 留後가 되어, 그해 10월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喪中에 있던 盧從史가 은밀히 왕승종을 誅殺할 계책을 올리니, 황제는 다시 그를 昭義軍節度使에 起復하고서 왕승종을 토벌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進軍하지 않고 도리어 암암리에 왕승종과 내통하였다.(≪舊唐書≫ 〈盧從史傳〉)
역주3 三室同宇 : 3世를 한 廟堂에 모신 것이다. 三室은 烏重胤의 증조부 左領公, 조부 中郞公, 부친 尙書公을 모신 사당 안의 세 龕室을 이른다. 龕室은 사당 안에 신주를 안치하는 欌이다.
역주4 烏氏著於春秋 : 魯 昭公과 魯 襄公의 ≪春秋左氏傳≫ 기사에 ‘烏存’‧‘烏枝鳴’‧‘烏餘’ 등이 보인다.
역주5 世本 : 書名으로 黃帝 이래의 帝王‧諸侯 및 公卿大夫의 系譜를 기록하였다.
역주6 姓苑 : 南朝 宋의 何承天(370~447)이 지은 책으로, 姓氏에 관한 책이다.
역주7 屬破 : 連破함이다.
역주8 : 北方 遊牧民族의 하나였는데, 뒤에 契丹에 병합되었다.
역주9 可突干 : ?~734. 可突于라고도 한다. 唐나라 때 거란의 귀족 수령이었다.
역주10 壍原累石 : 참호를 파고 돌로 堡壘를 쌓음이다.
역주11 (右)[左]武左領 : 저본에는 ‘右武’로 되어 있으나, 本集에 의거하여 ‘左武’로 바로잡았다. 左武는 烏重胤의 高祖父인 左武衛大將軍 烏察을, 左領은 증조부인 左領軍衛大將軍 烏令望을 이른다.
역주12 戎節 : 兵符이다. 곧 兵權을 뜻한다.
역주13 數備禮登 : 名位에 맞는 制數(법도)가 갖추어지고 예의 등급도 높다는 뜻이다.
역주14 (其有)[孰其] : 저본에는 ‘其有’로 되어 있으나, 本集에 의거하여 ‘孰其’로 바로잡았다.
역주15 怠息 : 安息함이다.

당송팔대가문초 한유(3) 책은 2020.12.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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