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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韓愈(3)

당송팔대가문초 한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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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大家韓文公文抄 卷13 墓誌銘
歸安 鹿門 茅坤 批評
孫男 闇叔 著 重訂
劉昌裔 爲人多倜儻澹宕하고 而公之文亦稱이라
公諱昌裔 字光後 本彭城人이라 曾大父諱承慶 朔州刺史 大父巨敖 好讀老子莊周書하야 爲太原晉陽令하니라
再世宦北方일새 樂其土俗하야 遂著籍太原之陽曲하고 曰 自我爲此邑人可也 何必彭城이리오 父訟 贈右散騎常侍하니라
公少好學問하야 始爲兒時 重遲不戲하야 恒若有所思念計畫이라
及壯自試하야 以開邊將이나 하다하야 從道士遊하다
久之 蜀人苦寇掠 公單船往說하니 琳感欷하야 雖不卽降이나 約其徒不得爲虐하니라
琳降 公常隨琳不去러니 琳死 脫身亡하야 하니라
建中中 招起之하니 爲環檄 指摘切刻하다 納悔恐動心하니 皆疑惑氣懈하다 環封奏其本하니 德宗稱焉하다
環之會下濮州하고하야 救寧陵襄邑하고陳州城下 公常在軍間하다
環領陳許軍 公因爲陳許從事하다 以前後功勞 累遷檢校兵部郞中御史中丞營田副使하다
乘環喪하야 引兵叩城 留後上官說咨以城守하다
所以能擒誅叛將하고 爲抗拒하야 令敵人不得其便하다 圍解 拜陳州刺史하다
하야 引軍走陳州하야 求入保하니 公自城上揖謝全義曰 公受命詣蔡러니 何爲來陳
公無恐하라 賊必不敢至我城下리라 明日 領步騎十餘하고 扺全義營하니
全義驚喜하야 迎拜歎息하고 殊不敢以不見舍望公하다 改授陳許軍司馬하다
上官說死 拜金紫光祿大夫檢校工部尙書하야 代說爲節度使하다
命界上吏하야 不得犯蔡州人하고 曰 俱天子人이니 奚爲相傷
少誠吏有來犯者어늘 捕得縛送曰 彼人하니 公宜自治之하라
少誠慚其軍하고 亦禁界上暴者하니 兩界耕桑이나 吏不하다 封彭城郡開國公하고 就拜尙書右僕射하다
元和七年 得疾하야 視政不時하다 八年五月 하야 過其地하야 防穿不補하야 沒邑屋하고 流殺居人하다
拜疏請去職卽罪하니 詔還京師하다 卽其日 與使者俱西하다 大熱이로되 旦暮馳不息하니 疾大發하다
左右手轡止之로되 公不肯曰 吾恐不得生謝天子라하다 上益遣使者勞問하고 勅無亟行하시다
至則不得朝矣 天子以爲恭이라하야 卽其家拜檢校左僕射右龍武軍統軍知軍事하다
十一月某甲子薨하니 年六十二 上爲之一日不視朝하고 贈潞州大都督하고 命郞弔其家하다
明年某月某甲子 葬河南某縣某鄕某原하다
公不好音聲하고 不大爲居宅하니 於諸帥中獨然이라 夫人 邠國夫人武功蘇氏
子四人이라 嗣子光祿主簿縱 學於樊宗師하니 士大夫多稱之
長子元一 朴直忠厚하고 便弓馬하야 爲淮南軍衙門將하다 次子景陽景長 皆擧進士하다
葬得日하고 相與選使者하야 哭拜階上하야 使來乞銘하다 銘曰
提將之符하고
尸我一方이라
配古侯公하고
維德不爽이라
我銘不亡이면
後人之慶이라


01. 尙書左僕射 右龍武軍統軍 劉公墓誌銘
劉昌裔는 사람됨이 뜻이 크고 기개가 높으며 욕심이 없고 마음이 한가로웠는데, 韓文公의 문장 또한 〈유창예의 인품과〉 걸맞다.
昌裔이고 光後이니 본래 彭城 사람이다. 증조부 承慶朔州刺史를 지냈고, 조부 巨敖老子莊周의 글을 읽기를 좋아하였는데, 太原府 晉陽縣令을 지냈다.
두 대에 걸쳐 북방에서 벼슬하였기 때문에 그 지방의 풍속을 좋아하여 마침내 太原 陽曲縣入籍하고서 “나부터는 이 고을 사람이 되어도 좋으니, 굳이 貫籍彭城으로 쓸 것이 뭐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부친 右散騎常侍에 추증되었다.
少年 때부터 배우고 묻기를 좋아하여, 아이 때부터 행동이 진중하고 느려 장난을 치지 않아, 마치 항상 무엇을 궁리하거나 계획하는 바가 있는 것 같았다.
壯年이 됨에 미쳐 스스로를 시험하기 위해, 吐藩의 땅을 개척하는 것으로 邊將을 설득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三蜀으로 들어가서 道士들과 어울려 지냈다.
얼마 후 蜀人들이 楊子琳의 노략질에 괴로워하자 이 홀로 배를 타고 가서 양자림을 설득하니, 양자림은 감동해 탄식하여 비록 즉시 항복은 하지 않았으나 그 무리들을 단속해 포악한 짓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양자림이 投降한 뒤에 은 항상 양자림과 어울려 지내며 떠나지 않더니, 양자림이 죽자 공은 몸을 빼내 도망하여 黃河 이북 지역에 出沒하였다.
建中 연간에 曲環을 초빙해 起用하니, 공이 곡환을 위해 李納에게 보내는 檄文을 지었는데, 잘못을 지적하여 꾸짖는 말이 엄하고 각박하였다. 이납이 悔恨과 두려움으로 마음이 흔들리니, 恒州魏州가 모두 疑惑(의심을 품음)하여 맥이 풀렸다. 곡환이 그 격문의 稿本密封上奏하니 德宗께서 칭찬하셨다.
곡환이 다른 군대들와 회합하여 濮州를 함락하고 白塔嶺에서 전투하여 寧陵襄邑을 구원하고, 陳州城 아래에서 李希烈을 공격할 때에 은 항상 곡환의 군중에 있었다.
곡환이 陳許軍을 거느리게 되자 陳許節度使從事가 되었다. 전후의 공로로 인해 누차 승진하여 檢校兵部郞中 御史中丞 營田副使가 되었다.
吳少誠이 곡환의 喪中을 틈타 군대를 이끌고 와서 許州城을 공격[]하니, 留後 上官說이 공에게 자문하여 死守하였다.
그러므로 叛將을 사로잡아 誅殺하고 항거하여 적이 편리한 기회를 탈 수 없게 하였다. 포위가 풀린 뒤에 陳州刺史에 제수되었다.
韓全義敗戰하고서 군대를 이끌고 陳州로 도망해 와서 성안으로 들어가 보전하기를 청하니, 공이 성 위에서 한전의에게 하고 사절하기를 “韓公께서는 蔡州로 가라는 皇命을 받으셨는데, 무엇 때문에 陳州로 오셨습니까?
한공께서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적이 감히 나의 성 아래까지 오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서 이튿날 步兵騎兵 10여 명을 거느리고서 한전의의 군영으로 가니,
한전의는 놀라고 기뻐하여 나아가서 劉公을 맞이해 절하고 탄식하였고, 감히 성안으로 들이어 머물게 하지 않았다 하여 劉公을 원망하지 않았다. 다시 陳許軍司馬에 제수되었다.
上官說이 죽자, 金紫光祿大夫 檢校工部尙書에 제수되어 上官說을 대신해 陳州節度使가 되었다.
공은 界上(邊境)의 관리들에게 명하여 蔡州의 인민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면서 “모두 천자의 인민인데, 무엇 때문에 서로 해칠 필요가 있느냐?”라고 하였다.
吳少誠官吏 중에 와서 침범하는 자가 있자, 체포해서 결박해 蔡州로 보내면서 말하기를 “저자가 그곳 사람이라고 詐稱[妄稱]하니 吳公께서 스스로 처리하심이 마땅하겠기에 〈잡아 보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吳少誠은 자기의 군대를 부끄러워하였고 또한 界上에서 노략질하는 것을 금지하니, 두 邊界耕地桑田이 맞닿아 있었으나 관리들이 責問[何問]하지 않았다. 彭城郡開國公에 봉해지고 尙書右僕射에 제수되었다.
元和 7년(812)에 병을 얻어 제때에 정사를 살피지 못하였다. 元和 8년(813) 5월에 他地에 발생한 홍수가 劉公管內를 지나면서 제방을 뚫었는데도 미처 보수하지 못하여 城邑民家들은 물속에 잠기고 사람들은 急流에 쓸려 죽었다.
이에 劉公를 올려 관직에서 물러나 죄를 받기를 청하니, 황제께서 조서를 내려 京師로 돌아오라고 명하셨다. 공은 그날로 使者와 함께 서쪽을 향해 출발하였다. 이때는 크게 더운 철인데도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쉬지 않고 달리다 보니 병이 크게 났다.
左右(侍從)가 손으로 고삐를 잡고 말을 멈추게 하려 하였으나, 공이 동의하지 않으면서 “나는 살아서 천자께 사죄하지 못하게 될까 두렵다.”라고 하였다. 皇上께서 다시 사자를 보내어 위문하시고, 유공에게 “너무 급히 오지 말라.”고 명하셨다.
유공이 경사에 도착해보니, 그 증상이 이미 천자를 알현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천자께서는 그를 공경스럽다고 여겨, 〈사람을 보내〉 공의 집으로 가서 檢校左僕射 右龍武軍統軍知軍事에 제수하게 하셨다.
11월 아무 甲子薨逝하니 향년이 62세셨다. 황상께서는 그를 위해 하루 동안 조화를 보지 않으시고서 공을 潞州大都督追贈하고 郞中에게 명하여 그의 집으로 가서 弔喪하게 하셨다.
이듬해 아무 달 아무 날에 河南府 아무 아무 아무 언덕에 장사 지냈다.
은 음악을 좋아하지 않고 주택을 거대하게 建造하지 않았으니 여러 節度使 중에 유독 공만이 그러하였다. 夫人邠國夫人 武功 蘇氏이다.
네 아들을 두었는데, 嗣子 光祿主簿 樊宗師에게 배웠는데, 많은 士大夫들이 그를 칭송한다.
長子 元一樸實하고 忠厚하며 弓馬에 익숙하여 淮南軍衙門將이 되었다. 次子 景陽景長은 모두 貢擧로 천거되어 進士試에 참가하였다.
葬日을 정하고서 〈유공의 아들들이〉 함께 使者를 선발한 뒤에 섬돌 위에서 하며 절하고서 나에게 사자를 보내어 와서 墓誌銘을 청하였다. 은 다음과 같다.
장수의 符節 가지고 와서
우리 지방을 다스리셨네
지위는 옛날의 제후와 대등하고
도덕 또한 어긋나지 않았네
나의 銘文 소멸되지 않는다면
후손들의 복이 되리라


역주
역주1 尙書左僕射右龍武軍統軍劉公墓誌銘 : 이 墓誌銘은 元和 9년(814)에 지은 것이다. 劉公은 劉昌裔(752~813)이다. 墓誌銘은 亡人의 事蹟‧德行‧生沒 年月日‧子孫錄 등을 陶版이나 石版에 새겨 무덤에 묻는 것이다.
역주2 吐蕃 : 옛날에 藏族이 세운 나라로 지금의 티벳이다.
역주3 說(세)干 : 說는 遊說함이고, 干은 벼슬을 구함이니. 곧 邊將을 설득해 벼슬을 구함이다.
역주4 不售 : 팔리지 않음이니, 곧 뜻을 이루지 못함이다.
역주5 三蜀 : 漢나라 초기에 蜀郡을 나누어 廣漢郡을 설치하고, 漢 武帝가 또 나누어 犍爲郡을 설치하였는데, 이를 일러 三蜀이라 한다.
역주6 楊琳 : 楊子琳이다. 大曆 3년(768)에 成都尹 崔寧이 황명을 받고 入朝하자, 양자림이 그 틈을 이용해 반란하여 瀘州에서 군대를 일으켜 精銳騎兵 수천을 이끌고 와서 成都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하였다.(≪新唐書≫ 〈崔寧傳〉)
역주7 沈浮河朔之間 : 沈浮는 出沒함을 뜻하고, 河朔은 黃河 이북이니, 곧 황하 이북 지역에 출몰하였다는 말이다.
역주8 曲環 : 陳許節度使이다.
역주9 李納 : 759~792. 平盧淄靑節度使 李正己의 아들로 아비가 죽은 뒤에 스스로 留後가 되어 반란을 일으켰다.
역주10 恒魏 : 恒은 成德節度使 李惟岳(?~782)을 가리키고, 魏는 魏博節度使 田悅(?~784)을 가리킨다.
역주11 白塔 : 白塔嶺을 이른다.
역주12 李希烈 : ?~786. 淮西節度使로 蔡州에 웅거하여 조정에 반항한 逆臣이다.
역주13 吳少誠 : ?~810. 蔡州節度使로 陳許節度使 曲環이 죽자, 멋대로 군대를 일으켜 許州를 공격해 함락한 逆臣이다.
역주14 (州)[公] : 저본에는 ‘州’로 되어 있으나, ≪韓文考異≫에 의거하여 ‘公’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5 韓全義 : ?~805. 陳州刺史이다.
역주16 妄稱 : 詐稱과 같다.
역주17 交跡 : 交界와 같은 말로, 兩邊의 耕地가 맞닿아 있음이다.
역주18 何問 : 呵問과 같으니, 곧 꾸짖어 캐묻는 것이다.
역주19 湧水出他界 : ≪新唐書≫ 〈劉昌裔傳〉에는 “元和八年 大水壞廬舍 溺居人(원화 8년에 큰물이 져서 民家를 무너뜨리고 거주하는 백성들을 溺死하게 하였다.)”으로 되어 있다. 이에 의거하여 湧水를 “큰물”로 번역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한유(3) 책은 2020.12.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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