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諱道古
요 字某
니 曹成王子
라 其先王明
은 以太宗子王曹
러니 하야 而至成王
하니라
成王諱皐
니 有功
間
하고 以多才能能行賞誅
로 爲名
하다
公以
하야 獻文輿三十卷
하야 拜校書郞集賢學士
하고 四遷至宗正丞
하다
憲宗卽位하야 選擢宗室에 遷尙書司門員外郞하고 以選爲利隨唐睦州刺史타가 遷少宗正하다
元和九年에 以御史中丞持節鎭黔中하다 十一年來朝타가 遷鎭鄂州하다
以鄂岳道兵會平淮西하니 以功加御史大夫하다 十三年에 徵拜宗正이라가 轉左金吾하다
上卽位하야 以先朝時嘗信妄人柳泌能燒水銀爲不死藥하야 薦之하니 泌以故起閭閻氓爲刺史나
하다 其年九月三日
에 以疾卒于貶所
하니 年五十三
이라
長慶元年詔曰 左降而死者는 還其官以葬하라하니 遂以其年某月日葬于東都某縣하다
公三娶
하다 元配韋氏諱脩
니 脩生子紘
하다 紘爲
하고 女貢嫁崔氏
하다
夫人
이요 父士佺
은 蓬山令
이라 次配崔氏諱葯
은 生綽紹綰
하다
女會는 嫁鄭氏季毗하다 夫人父昭는 嘗爲京兆尹하다 今夫人韋氏無子라 父光憲은 光祿卿이라
其葬用古今禮하야 以元配韋氏夫人祔而葬하고 次配崔氏夫人於其域異墓하다
公宗室子로 生而貴富로되 能學問하야 以中科取名하다 善自傾下하고 以交豪傑일새 身死賣宅以葬하다 銘曰
太支於今
에 其尙有封
이러니 當公弟兄
하야 未續又亡
이라 其遷于南
에 라
誰黜不復
하고 而以喪歸
아 하니 萬里于畿
라 하야 以哀
하노라
04. 唐故 昭武校尉 守左金吾衛將軍 李公의 墓誌銘
솔직하게 서술하였다. 그러나 중간에 있는 諷刺가 美稱한 곳과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다.
公은 諱가 道古이고 字가 아무개이니 曹成王의 아들이다. 그 先王 李明은 太宗의 아들로 曹에 王으로 봉해졌는데, 封爵이 끊겼다가 다시 봉해져서 5代를 전해 成王에 이르렀다.
성왕은 諱가 皐인데, 建中과 貞元 연간에 功이 있었고, 재능이 많고 賞罰를 잘 시행하는 것으로 명성이 났다.
지금도 당시 內外의 文武大臣을 꼽을 때면 반드시 성왕을 그 사이에 넣는다.
公은 進士에 及第하여 ≪文輿≫ 30권을 올리고서 校書郞 集賢學士에 제수되고, 네 차례 승진하여 宗正丞에 이르렀다.
憲宗이 즉위하여 宗室을 선발하실 때에 尙書司門員外郞으로 승진하고, 利州‧隨州‧唐州‧睦州 등의 刺史로 뽑혔다가 少宗正으로 옮겼다.
元和 9년(814)에 御史中丞으로 符節을 가지고 〈나가 관찰사가 되어〉 黔中을 鎭守하였다. 원화 11년(816)에 조정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 鄂州를 진수하였다.
鄂岳道의 군대를 거느리고 會戰하여 淮西를 평정하니, 그 공으로 御史大夫에 加官되었다. 원화 13년(818)에 부름을 받고 들어가 宗正에 제수되었다가 左金吾로 옮겼다.
皇上(唐 穆宗)께서 즉위하시었다. 先朝(先帝, 唐 憲宗) 때에 李公(李道古)은 일찍이 妄人(터무니없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인 柳泌이 水銀을 끓여 不死藥을 만들 수 있다고 믿고서 그를 先帝에게 천거하였기 때문에 平民인 柳泌을 기용하여 刺史로 삼았다.
그러나 〈유필의 불사약이〉 효험이 없었으므로 〈今上(唐 穆宗)께서 벌을 내리시어 李公을〉 循州司馬로 貶職시키셨다. 그해 9월 3일에 貶謫된 곳에서 죽으니, 나이가 53세셨다.
長慶 元年(821)에 下詔하기를 “폄직되어 地方官으로 左遷되었다가 죽은 자는 원래의 官爵으로 환원시켜 장사 지내도록 하라.”고 하니, 마침내 그해 아무 달 아무 날에 東都(洛陽)의 아무 縣에 장사 지냈다.
公은 장가를 세 번 드셨다. 初娶 韋氏는 諱가 脩인데, 脩는 아들 紘을 낳았다. 紘은 進士試에 참가하였고, 딸 貢은 崔氏에게 출가하였다.
부인은 隋나라 때 雍州牧使를 지낸 鄖公 韋叔裕의 5世孫이고 부친 韋士佺은 蓬山縣令을 지냈다. 再娶夫人 崔氏는 諱가 葯인데, 綽‧紹‧綰을 낳았다.
딸 會는 鄭季毗에게 출가하였다. 부인의 부친 崔昭는 일찍이 京兆尹을 지냈다. 지금의 부인 韋氏는 자식이 없다. 부친 韋光憲은 光祿卿을 지냈다.
公의 장례는 고금의 禮에 따라 초취 韋氏夫人은 祔葬(合葬)하고 재취 崔氏夫人은 같은 瑩域에 무덤을 달리하였다.
公은 宗室의 자제로 나면서부터 富貴하였으되, 능히 학문을 하여 과거에 급제해 명성을 취하였다. 겸손과 공경으로 사람을 대하고 호걸과 교유하기를 좋아하였기에 죽은 뒤에 집을 팔아서 장사를 지내야 했다. 銘은 다음과 같다.
太宗의 支孫이 지금까지
여전히 封國을 가졌더니
공의 형제에 이르러
잇지 못하고 또 잃으셨네
남쪽으로 옮겨갔을 때에
비로소 쇠하는 나이였으니
뉘 알았으랴 쫓겨가 돌아오지 못하고
죽어서 돌아올 줄을
海豐이 아득히 머니
京師에서 만 리 길이네
공의 일생을 기재하고서
애도하며 서술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