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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韓愈(3)

당송팔대가문초 한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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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한유(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序袁氏世系千餘年若一線이나 中多荊棘하야 句字不可讀이라 系之以韻 似追雅頌이라
袁公滋旣成廟하고 明歲二月 自荊南以朝京師하야 留六日하야 得壬子春分하야 率宗親子屬하고하니라
旣事 退言曰 嗚呼遠哉 維世傳德이여 襲訓集余러니 乃今有濟로다
今祭 旣不薦金石音聲하니 使工歌詩 이면 其奚以於長久리오
하니 如具著先人名跡하고 因爲詩繫之語下 於義其可리라
雖然이나 余不敢이니 必屬篤古而達於詞者하라하고 遂以命愈하니라
愈謝非其人이나 不獲命일새 則謹條袁氏本所以出 與其世系里居
起周歷漢魏晉隋入國家以來 高曾祖考所以
公之所以 有槪有詳하고 而綴以詩하노라
其語曰 하니 陳公子有爲大夫食國之地袁鄕者한대 其子孫世守不失하니 因自別爲袁氏하니라
春秋世 陳常壓於楚하야 與中國尤疏로되 袁氏猶니라
常居陽夏하니 陽夏至晉屬陳郡이라 故號陳郡袁氏 하야 唱業於前하고
하야 懷德於身하니 袁氏遂大顯하니라 連世有人하야 終漢連魏晉 分仕南北하니라
始居華陰하야 爲拓拔魏鴻臚하니 鴻臚諱恭 生周梁州刺史新縣孝侯諱穎하고 孝侯生隋左衛大將軍諱溫한대
去官居華陰타가 武德九年 以大耋薨하니 始葬華州하니라
左衛生南州刺史諱士政하고 南州生當陽令諱倫한대 於公爲曾祖
當陽生朝散大夫石州司馬諱知玄하고 司馬生贈工部尙書咸寧令諱曄한대 是爲皇考
袁氏 舊族이요 而當陽 以通經爲儒로되 位止縣令하고 石州 用春秋持身治事로되 爲州司馬以終하고
咸寧 備學而貫以一하고 文武隨用하고 謀行功從하야 出入有立이로되 不爵于朝하니라
比三世宜達而窒 歸成後人이니 數當于公하니라
公惟曾大父大父皇考比三世 存不大夫食이나 歿祭在子孫이라 惟將相能致이나 世彌遠이면 禮則益不及이라
在愼德行業治하고 圖功載名하야 以待上可라하고 無細大 無敢不敬畏하며 無早夜 無敢不思하니라
成于家하고 進于外하야 以立于朝하야 自侍御史歷工部員外郞, 祠部郞中, 諫議大夫, 尙書右丞, 華州刺史, 金吾大將軍하니라
由卑而鉅호대 莫不官稱하니라 遂爲宰相하야하고 仍持節將蜀滑襄荊하니 略苞河山하니라
秩登祿富하야 以有廟祀하니 具如其志하니라 又垂하야 以敎無忘하니 可謂大孝로다 詩曰
袁自陳分하야
初尙이라
越秦造漢하야
博士發論하고
司徒任德하야
忍不錮人하니
收功厥後하야
五公重尊이라
晉氏于南
來處華下
鴻臚孝侯

南州勤治하야

當陽躭經하야
唯義之畏
石州하니
學專春秋
懿哉咸寧
不名一休 하야
與時
是生孝子하니
天子之宰
出把將符
群州承楷
以立廟하고
祿以備器
由曾及考
同堂異置

其筵肆肆
維袁之廟
孝孫之爲
順勢卽宜하야
以諏以龜하고
以平其巇하야
屋牆持持
孝孫來享하고
來拜廟庭이라
陟堂進室하야
親登하니
肩臑胉骼이요
其樽이라
降登受
于慶爾成이라
維曾維祖
維考之施
于汝孝嗣
以報以祗하라
凡我有今

刻詩하야
維以告之하노라


02. 袁氏先人廟碑
1천여 년 이어온 袁氏世系를 마치 한 끈에 꿴 것처럼 서술하였으나, 중간에 난삽한 곳이 많아 字句를 읽을 수 없다. 그러나 뒤에 이어놓은 韻文을 뒤따른 것 같다.
袁公 先人廟宇를 세우고, 이듬해 2월에 荊南節度史로서 京師로 와서 황제를 알현하고서 엿새를 머물러 壬子日 春分이 되자, 親屬의 자제들을 거느리고서 三室少牢로써 제사를 올렸다.
제사를 마친 뒤에 물러나 말하기를 “아! 오래되었도다. 대대로 을 전해온 지가. 遺訓을 계승할 책임이 내 몸에 있는데, 오늘에야 완수하였다.
오늘 제사에 이미 金石音樂을 올리지 못하였으니, 歌詩에 능한 자를 시켜 祖先功烈을 기재하고 모습을 묘사하게 하지 않는다면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는 후손들을 어찌 장구히 敎誨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다행히 희생을 매어두는 碑石이 있으니, 그 비석에 先人의 명성과 업적을 상세히 기재하고, 이어 를 지어 기재한 글 아래에 附記한다면 아마도 도의에 맞을 것이다.
비록 그러나 나는 감히 지을 수 없으니 반드시 옛것을 좋아하고 文詞에 달통한 사람에게 부탁하라.”고 하고, 마침내 나 韓愈에게 지으라고 명하였다.
나 한유는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고 사양하였으나, 승낙을 받지 못하였다. 이에 袁氏의 근본이 나온 곳, 世系, 모여 살던 곳을 삼가 기록하였다.
나라로부터 시작해 拓拔魏(北魏)‧(北周)‧를 거쳐 나라에 들어온 이후로 高祖曾祖께서 몸소 고생해가며 후손을 보호하여 에게 복이 내리게 한 내용과,
공이 때를 만나 장군이 되고 詔命을 받들어 조정에 들어오게 된 까닭을 대략 서술하기도 하고 상세히 서술하기도 하고서 를 지어 붙였다.
碑文은 아래와 같다. 武王의 후손을 나라에 세워주었다. 나라 公子 중에 大夫가 되어 나라 땅 袁鄕食邑으로 받은 자가 있었는데, 그 자손이 그 땅을 대대로 지켜 잃지 않았다. 그러므로 따로 로 삼았다.
春秋時代나라는 항상 나라의 압제를 받아 중국과의 왕래가 더욱 소원하였으나, 袁氏는 오히려 드러난 업적이 있어 譜錄할 만하였다.
원씨는 항상 陽夏에 거주하였는데, 양하는 나라 때에 와서 陳郡에 소속되었다. 그러므로 陳郡袁氏로 불리었다. 博士 袁固儒學闡明하고 黃老를 억제하여 앞에서 儒業을 제창하였고,
司徒 袁安에 이르러 몸에 도덕을 품었으니, 袁氏가 드디어 크게 드러났다. 世代마다 인재가 나와서 이 망하고 에 이르기까지 남북에 흩어져 벼슬하였다.
華陰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拓拔魏(北魏)의 鴻臚가 되었다. 鴻臚인데 北周梁州刺史 新縣孝侯 을 낳았고, 孝侯나라 左衛大將軍 을 낳았다.
은〉 관직을 버리고 華陰으로 가서 살다가 武德 9년(626)에 大耋(80)의 연세로 薨逝하시니 비로소 華州에 장사 지내었다.
左衛南州刺史 士政을 낳고, 南州當陽令 을 낳았는데, 이가 에게 曾祖가 되신다.
當陽朝散大夫 石州司馬 知玄을 낳고, 司馬贈工部尙書 咸寧令 을 낳았는데, 이가 皇考(先考)이시다.
袁氏舊族이고 當陽經典에 통달해 儒生이 되었으되 職位縣令에 그쳤고, 石州는 ≪春秋≫의 법을 사용해 몸을 지키고 일을 처리하였으되 州司馬로 죽었고,
咸寧은 두루 배워서 一以貫之하고 文德武略를 필요에 따라 사용하고 計謀를 시행하면 功效가 뒤따라서 出仕하고 隱遁함에 모두 수립함이 있었으되 조정에서 爵位를 주지 않았다.
가까이 3()는 顯達함이 마땅한데 막혔던 것은 성공을 후손에게 돌리기 위함이었으니, 그 운수가 에게 닥쳤다.
袁公은, ‘曾大父大父皇考 3대는 生存時大夫俸祿을 누리지 못하셨으나, 돌아가신 뒤에 자손에게 제사를 받으신다. 오직 장군이나 宰相이라야 각종 器物을 갖춘 제사를 올릴 수 있으나, 그것도 세대가 멀어지면 祭禮가 더욱 미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오로지 덕행과 사업을 삼가고 공훈을 도모하고 명성을 남겨 조정의 허가를 기다리기에 달렸을 뿐이다.’라고 생각하고서,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감히 敬畏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낮이건 밤이건 감히 생각하지 않음이 없었다.
집안에서 〈德業을〉 이룬 뒤에 밖으로 나아가 조정에 진출하여 侍御史로부터 시작해 工部員外郞祠部郞中諫議大夫尙書右丞華州刺史金吾大將軍歷任하였다.
낮은 관직으로부터 높은 관직에 올랐으되, 거친 관직마다 그 직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함이 없었다. 드디어 宰相이 되어 〈百官의 우열을〉 분별하여 밝히는 황제의 정사를 돕고, 이어 符節을 가지고 나아가 蜀州滑州襄州荊州를 통솔[]하니, 다스리는 지역이 河山(國土)을 포괄하였다.
官位가 올라가고 祿俸이 많아져서 사당을 세워 祖先의 제사를 지내게 되었으니, 모든 일이 뜻대로 된 것이다. 또 공적을 드러낸 비석을 남겨 〈후손들에게〉 잊지 않도록 가르쳤으니 大孝라고 이를 수 있다. 는 다음과 같다.
袁氏나라에서 갈려나와
처음에는 곤란한 일을 겪었지
나라를 지나 나라에 와서
博士(轅固)는 儒學의 논의를 일으켰고
司徒(袁安)는 도덕을 임무로 삼으시어
차마 남을 禁錮하지 않으셨는데
후손들이 그 보답을 받으시어
다섯 분이 연달아 존귀해지셨네
나라가 남쪽으로 천도하니
원씨는 華陰으로 와서 살았지
鴻臚(袁恭)와 孝侯(袁穎)는
用人에 취사가 적합하였지
南州刺史(袁士政)는 정치에 근면하여
최상의 등급 받고도 해이하지 않았고
當陽縣令(袁倫)은 경전을 좋아하여
오직 만을 두려워하셨지
石州司馬(袁知玄)는 공업과 덕행이 혁혁하여
학문은 ≪春秋≫를 전공하셨지
아름다운 咸寧縣令(袁曄)은
한 가지 덕으로 이름나지 않으셨네
고난으로 나가고 성공을 피하고서
당시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셨네
이분이 孝子 낳으시니
천자의 재상 되었네
장군의 부절 가지고 나가면
모든 고을이 모범으로 받들었지
의 등급에 맞게 사당을 세우고서
녹봉으로 기물을 마련하였지
증조부에서 부친까지 신주를
같은 의 각 방에 안치하였네
측백나무 판자에 소나무 기둥
안치한 의자가 나란히 놓여 있네
袁氏의 사당은
효성스런 자손들이 세운 것
地勢가 순한 곳을 찾아가서
점을 쳐서 자리를 정하고서
험한 곳 깎아내고 평지로 만들고서
세운 집과 담 장엄하기도 하구나
효성스런 자손들 와서 제물 바치고
내려와 묘정에서 절을 올리네
당으로 올라 묘실로 들어가서
몸소 제기에 제물을 올리는데
앞다리 정강이뼈 어깨뼈 넓적다리뼈이고
잔에는 맑은 玄酒를 채워놓는다
내려와 뜰에서 절 올리고 올라가 당에서 胙肉 받으면
경사스러운 제사가 끝난다
                 籩                                        鉶 籩 鉶
증조부와 조부 그리고
부친께서 복을 베푸셨으니
너희 효성스런 후손들은
보답하고 공경하라
우리에게 오늘이 있는 것은
근본이 아니면 무엇을 생각하랴
희생을 매어두는 돌에 시를 새겨
앞으로 올 후손들에게 고하노라


역주
역주1 袁氏先廟碑 : 이 碑文은 元和 11년(816)에 韓愈가 袁滋(749~818)의 부탁을 받고 지은 것이다. 원자는 원화 9년(814) 9월에 荊南節度使에 除授되었다. 원화 12년(817)에 형남에서 京師로 돌아와 祠堂을 세우고서 한유에게 비문을 부탁한 것이다.
역주2 旂節 : 唐나라 제도에 節度使에게 軍事를 專制하는 旌과 節을 주었는데, 旌은 賞賜의 專權을 상징하고 節은 刑殺의 전권을 상징한다.
역주3 少牢 : 제사에 牛‧羊‧豕 3牲을 올리는 것을 太牢라 하고, 양과 돼지만을 올리는 것을 少牢라 한다.
역주4 三室 : 사당 안의 세 龕室을 이른다. 龕室은 사당 안에 신주를 안치하는 欌이다.
역주5 載烈象容 : 빛나는 업적을 기재하고 그 형용을 묘사함이다.
역주6 飭稚昧 : 飭은 가르침이고, 稚昧는 어려서 우매함이다.
역주7 敬繫羊豕幸有石 : 제사에 쓸 희생을 사당이나 묘소 앞에 세워놓은 돌기둥에 매어두는 것으로 麗(이)牲之石이라고 이른다. 전하여 비석의 뜻으로 쓰인다. ≪禮記≫ 〈祭義〉에 麗牲이란 말이 보인다.
역주8 拓拔魏周 : 拓拔은 拓跋로도 쓴다. 남북조시대에 拓跋氏가 세운 北魏와 宇文氏가 세운 北周를 가리킨다.
역주9 劬躬燾後 委祉于公 : 劬躬은 몸소 고생함이고, 燾後는 후손을 庇護함이고, 委祉는 복을 내림이니, 곧 몸소 고생해가며 자손을 비호하였기 때문에 복이 공에게 내렸다는 말이다. 委에는 下垂의 뜻이 있다.
역주10 逢將承應 : 기회를 만나 장군이 되고, 皇命을 받들어 조정에 入侍함이다.
역주11 周樹舜後陳 : 周 武王이 帝舜의 後孫 嬀滿(규만)을 陳에 封해 帝舜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역주12 相加 : 서로 왕래하며 交遊함이다.
역주13 班班見 可譜 : 드러난 업적이 있어 譜錄할 만하다는 말이다.
역주14 博士固 申儒遏黃 : 博士固는 漢 景帝 때 박사로 轅固 또는 轅固生이라고 한다. 申은 闡明함이고 遏은 抑止함이니, 곧 儒學을 천명하고 黃老(道敎)를 억지하였다는 말이다. 漢 景帝 때 博士 轅固가 ≪老子≫를 좋아하는 竇太后와 함께 儒家와 道家의 우열을 논하여 유학을 提高한 것을 이른다.
역주15 司徒安 : 袁安(?~A.D.92)이다. 後漢 때 사람으로 字는 邵公이다. 蜀郡太守로 있을 때에 역모사건을 심리해 4백여 인을 석방하고, 司徒가 되어서는 外戚의 전횡에 맞서 정도를 지키고 아첨하지 않았다.(≪後漢書≫ 〈袁安傳〉)
역주16 備物 : 高官의 제사에 사용하는 器物을 이른다.
역주17 贊辨章 : 贊은 輔佐함이고, 辨은 변별함이고, 章은 밝힘이니, 곧 百官의 優劣을 변별하는 황제의 정치를 보좌함이다.
역주18 顯刻 : 공적을 드러내는 비석을 이른다.
역주19 蹇連 : 困難함이다. 連도 難의 뜻이다.
역주20 用適操捨 : 用은 用人이고, 適은 적합함이고, 操捨는 取捨이니, 곧 사람을 씀에는 취사가 적합하였다는 말이다.
역주21 取最不懈 : 最는 上等을 뜻한다. 옛날에 節度使가 郡守나 縣令의 성적을 조사해 조정에 보고할 때, 上을 最, 下를 殿으로 기록하였다.
역주22 烈烈 : 功業과 德行이 밝게 드러남이다.
역주23 趨難避成 : 성공의 길을 마다하고 고난의 길을 택하였다는 말로, 곧 벼슬을 마다하고 시골에서 생활한 것을 말한다.
역주24 泛浮 : 浮沈과 같은 말인 듯하다. 부침은 세상과 어울려 지냄이다.
역주25 : 禮數이다. 禮數는 신분에 맞는 禮의 등급이다.
역주26 柏版松楹 : 소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측백나무 판자로 깔개를 만든 神主를 안치하는 의자인 듯하다.
역주27 籩鉶(형) : 모두 祭器의 이름으로, 籩은 과일과 포 등을 담는 대그릇이고, 鉶은 발이 셋인 국그릇이다.
역주28 玄淸 : 제사에 술 대신 올리는 맑은 찬물이다. 이를 玄酒라 한다.
역주29 : 제사에 올렸던 고기이다. 이를 胙肉이라 한다.
역주30 非本曷思 : 未詳이다. 혹 “우리에게 오늘이 있는 것은 모두 조상님들 덕이니, 근본에 보답하는 일 아니면 무엇을 생각하겠느냐?”는 말이 아닌지 모르겠다.
역주31 牲繫 : 제사에 쓸 희생을 매어두는 비석이다.

당송팔대가문초 한유(3) 책은 2020.12.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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