篇中에 特序世系及拜官爵과 卒年月日與葬處하고 篇末에 次行事하니 皆虛景이라
公諱復이요 字茂紹니 河東人이라 曾大父元簡은 大理正이요 大父曠은 御史中丞京畿採訪使요
引正大疑하야 有寵代宗朝하니라 屢辭官不肯拜하니라 卒贈工部尙書하니라
公擧
하야 拜
官尉
하니라 에 召公主書記
러니 三遷至侍御史
하니라
入朝
하야 歷殿中侍御史
하고 累遷至刑部郞中
하니라 에 改河南少尹
하니 輿至官
하야 若干日卒
하니
元和三年四月二十三日
이라 享年五十
이라 夫人博陵崔氏
는 少府監頲之女
라
男三人이니 璟質皆旣冠이요 其季始六歲니 曰充郞이라
하야 得公卒之四月壬寅
하야 遂以其日葬東都芒山之陰杜翟村
하니라
公幼有文하야 年十四에 上時雨詩하니 代宗以爲能이라하야 將召入爲翰林學士한대
尙書公請免曰 願使卒學하노이다 丁後母喪에 上使臨弔하고
又詔尙書公曰 父忠而子果孝로다 吾加賜以厲天下하노니 終喪必且以爲翰林하리라
其在徐州府에 能勤而有勞하고 在朝에 以恭儉守其職하니 居喪必有聞하니라
待諸弟友以善敎하고 館嫠妹하고 畜孤甥에 能別而有恩이라
歷十一官而無宅于都하고 無田于野하야 無遺資以爲葬하니 斯其可銘也已로다 銘曰
裴爲顯姓이나
入唐尤盛하야
支分族離하야
各爲大家하니라
惟公之系는
德隆位細하니
曰子曰孫이
厥聲世繼라
이 이라 하야 幼壯若一
이라 何壽之不遐
며 而祿之不多
오 가 其又信然耶
아
篇中에 다만 世系 및 제수된 官爵, 卒한 年月日과 장사 지낸 곳만을 서술하고, 篇末에 行事를 서술하였는데, 모두 虛景(상상 속의 景物)이다.
公은 諱가 復이고 字가 茂紹니 河東 사람이다. 曾祖父 裵元簡은 大理正을 지냈고, 祖父 裵曠은 御史中丞 京畿採訪使를 지냈고,
부친 裵虬는 氣魄과 智略이 있어 과감히 諫爭함으로 인해 諫議大夫가 되어,
〈前人의 事例를〉 인용해 증거로 삼아 크게 의심스러운 문제를 해결하였으므로 代宗朝에 寵臣이 되었다. 그러나 누차 관직을 사양하고 받으려 하지 않았다. 죽은 뒤에 工部尙書에 추증되었다.
公은 賢良科에 뽑혀 同官縣의 縣尉에 제수되었다. 僕射 南陽公(張建封)이 徐州에 開府하였을 때 公을 불러 書記에 임명하였는데, 세 차례 승진하여 侍御史에 이르렀다.
조정으로 들어가 殿中侍御史를 거쳐 누차 승진하여 刑部郞中에 이르렀다. 병이 위중해지자 다시 河南少尹에 제수하니, 병든 몸을 수레에 싣고 任地로 갔다가, 며칠 만에 죽었으니,
바로 元和 3년(808) 4월 23일이다. 향년이 50세이다. 夫人 博陵 崔氏는 少府監 崔頲의 따님이다.
아들 셋을 두었는데, 璟과 質은 모두 冠禮를 거행하였고, 막내는 이제 막 여섯 살로 이름은 充郞이다.
葬日을 점치니 公이 卒한 4월 壬寅日이 좋다고 나왔다. 그래서 드디어 그날에 東都 芒山 북쪽의 杜翟村에 장사 지냈다.
公은 어려서부터 文才가 있었는데, 14세 때에 〈時雨詩〉를 올리니 代宗께서 재능이 있다고 여겨, 불러들여 翰林學士로 삼으려 하셨다.
그러자 공의 부친 尙書公이 명을 거두시기를 청하며 “그 아이로 하여금 學業을 마치게 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後母의 喪을 당하자 황상께서 사자를 보내어 弔問하고,
또 尙書公에게 “아비가 충신이다 보니 아들도 과연 효자이다. 내 정해진 賞格 외의 賞을 더 내려 천하 사람들을 격려하고자 하니, 喪을 마치면 반드시 翰林學士로 삼을 것이다.”라는 내용의 조서를 내리셨다.
公이 徐州府에서 직책을 맡고 있을 때에는 근면하여 공로가 있었고, 조정에 있을 때에는 공손과 검약으로 관직을 지켰으니, 居喪할 때에도 반드시 명성이 있었을 것이다.
아우들을 友愛로 대하여 잘 가르치고, 과부가 된 누이를 데려다가 친정에 살게 하고, 고아가 된 생질을 데려다 길렀는데, 누이에게는 능히 〈남녀간의〉 분별을 지키고 생질에게는 은혜를 베풀었다.
열한 개의 관직을 거쳤으되 都城 안에는 집 한 채 없고, 들에는 밭 한 뙈기 없어서 장사 지낼 만한 재산을 남긴 것이 없었으니, 이것으로 그의 銘을 지을 만하다. 銘은 다음과 같다.
裴는 유명한 성씨이지만
唐나라에 들어와 더욱 융성해서
지파가 나뉘고 종족이 갈라져
각기 大家가 되었네
오직 공의 계파만은
덕 높았으되 지위 미세했으니
자자손손이
대대로 그 명성 이어가리
晉陽의 안색이
화열하고 공경스럽네
멀리함도 없고 가까이함도 없어
아이나 어른이나 똑같이 대했네
어찌 수명이 길지 못하고
어찌 복록이 많지 못하였는가
덕이 있는 사람 뒤끝이 좋다 하니
그 말이 어찌 사실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