愈之
故起居舍人君
은 以道德文學伏一世
하니라 其友四人
에 其一范陽盧君東美
라
少未出仕
에 皆在江淮間
하니 天下大夫士謂之
라하니라
或曰 夔嘗爲相하니 世謂相夔라 四人者雖處而未仕나 天下許以爲相이라 故云이라
大曆初에 御史大夫李棲筠이 由工部侍郞爲浙西觀察使하니라
當是時
하야 中國新去亂
하야 多避處江淮間
이러니 嘗爲顯官得名聲
하야 以
自任者以千百數
라
大夫莫之取
하고 獨晨衣朝服
으로 從騎吏入
舍請盧君
하니라
君時始任戴冠
이나 通詩書
하야 與其群日講說周公孔子
하야 以相
하고 하니 未有捨所爲爲人意
하니라
旣起從大夫에 天下未知君者는 惟奇大夫之取人也不常이 必得人이라하고
其知君者는 謂君之從人也非其常守가 必得其從이라하니라
其後爲太常博士監察御史河南府司錄考功員外郞
하고 而終
하니라 在官擧其職
하니라
夫人李姓이니 隴西人이라 君在에 配君子無違德하고 君沒에 訓子女得母道甚이라 後君二十年에 年六十六而終하니라
將合葬
에 其子暢命其孫立曰 乃祖
靡不聞
이나 然其詳而信者
는 宜莫若吾先人之友
라
先人之友無在者
하고 有季曰愈
라 能爲古文
하야 業其家
하니
是必能道吾父事業이리라 汝其往請銘焉하라 立于是奉其父命奔走來告어늘
愈謂立曰 子來宜也라 行不可一二擧요 且吾之生也後하야 不與而祖接하니 不得詳也라
其大者莫若衆所與니 觀所與衆寡면 玆可以審其德矣라 乃祖未出而處也에 天下大夫士以爲與古之夔皐者侔하고
且可以爲相이라하니 其德不旣大矣乎아 講說周公孔子하야 樂其道하고 不樂從事於俗이로되
得所從
하야 不擇外內奮而起
하니 其
不旣合於義乎
아 銘如是
면 可以示于今與後也與
아하니 立
曰
라하니라
君祖子輿는 濮州濮陽令이요 父同은 舒州望江令이라 夫人之祖延宗은 鄆州司馬요 父進成은 鄜州洛交令이라
男三人이니 暢申易이요 女三人은 皆嫁爲士人妻하니라
墓在河南緱氏縣梁國之原이라 其年月日은 元和二年二月十日云이라
篇中의 말은 모두 虛景이니, 단지 李棲筠이 從事를 辟差한 것을 案件으로 삼았을 뿐이다.
나의 長兄인 故 起居舍人君(韓會)은 道德과 文學으로 온 세상 사람들을 탄복시킨 분이다. 장형께는 벗이 네 사람 있었는데, 그중의 한 사람이 范陽의 盧東美 君이다.
出仕하기 전인 소싯적에 네 사람이 모두 長江과 淮水 사이에 거주하였는데, 천하의 사대부들은 그들을 ‘四夔’라고 일렀다.
그 뜻은 그들의 道가 옛날의 夔나 皐陶와 대등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어떤 이는 “夔가 일찍이 재상에 올랐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그를 ‘相夔’라고도 한다. 그러나 네 사람은 비록 은거하고 出仕하지 않았으나 천하 사람들이 네 사람을 宰相이 될 만하다고 許與하였기 때문에 그렇게(四夔) 부른 것이다.”라고 하였다.
大曆 初年(唐 代宗 元年)에 御史大夫 李棲筠이 工部侍郞에서 浙西觀察使가 되었다.
이때에는 중원이 막 安史의 亂에서 벗어난 때여서 사대부들이 대부분 난리를 피해 와서 長江과 淮水 사이에 살았는데, 그중에는 일찍이 高官에 올라 명성을 얻어 老成한 故舊로 자부하는 자가 수백 수천이었다.
그런데도 大夫(李棲筠)는 아무도 취하지 않고, 홀로 새벽에 朝服 차림으로 말을 탄 官吏만 대동하고 시골의 村舍로 가서 盧君에게 出仕하기를 요청하였다.
노군은 이때 겨우 약관의 나이였으나 ≪
詩經≫과 ≪
書經≫에
精通하여 벗들과 더불어 날마다
周公과
孔子의
道를 강론하면서 서로 토론하고 연구[
磨礱]하며 서로 사상을 불어 넣고[
浸灌] 한가로이 거닐며 즐겁게 유람하였으니, 즐기는 바를 버리고 백성을 위해
出仕할 뜻이 없을 것 같았다.
周公 孔子
그러나 起用되어 大夫를 따르자, 천하에 노군을 모르는 자들은 대부가 사람을 취하는 방법이 예사롭지 않은 것은 반드시 얻을 만한 인재를 만났기 때문일 것이라고 기이하게 여겼고,
노군을 아는 자들은 노군이 그가 평소에 지키던 節操가 아닌데 남을 따른 것은 반드시 자기가 따를 만한 사람을 만났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노군은 뒤에 太常博士‧監察御史‧河南府司錄‧考功員外郞을 歷任하고 나이 〈54세에〉 생애를 마쳤다. 맡은 관직마다 그 職分을 훌륭히 처리하였다.
夫人은 姓이 李氏이니 隴西 사람이다. 盧君이 살았을 때는 君子의 配匹로 婦德에 위배됨이 없었고, 노군이 죽은 뒤에는 子女를 訓育함에 어머니의 도리를 다하였다. 부인은 노군이 죽은 지 20년 뒤에 66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쳤다.
合葬하려 할 때 부인의 아들 盧暢이 부인의 손자 盧立에게 명하기를 “네 祖父의 덕행과 공적[烈]은 듣지 못한 사람이 없다. 그러나 상세하고 신빙할 만한 내용을 알고 있는 이로는 아마도[宜] 우리 先人의 벗만 한 분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先人의 벗 중에 현재 생존한 분이 없고 단지 起居丈(韓會)의 季氏 韓愈만 있을 뿐이다. 그는 古文에 능하여 家業을 계승하였으니,
그라면 반드시 우리 부친의 사업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너는 가서 그분에게 墓誌銘을 청하라.”고 하였다. 盧立이 이에 그 부친의 명을 받들고 달려와서 나에게 고하기에,
내가 盧立에게 이르기를 “자네가 온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자네 조부의 德行은 한두 句로 거론할 수 없고, 또 나의 출생이 늦어서 자네 조부와 접촉하지 못하였으니 〈자네 조부의 정황을〉 상세히는 알지 못한다.
뭐니 뭐니 해도 자네 조부의 제일 큰 德은 대중이 칭찬하니, 칭찬하는 사람이 많은지 적은지를 보면 그분의 德行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자네 조부께서 出仕하지 않고 隱居했을 적에 천하의 士大夫들은 자네 조부를 옛날의 夔나 皐陶와 대등하다고 하고,
또 宰相이 될 것이라고 하였으니, 그 덕행이 이미 크지 않은가? 周公과 孔子를 강론하면서 그 道를 즐기고, 세속을 위해 官吏가 되기를 즐기지 않았으되,
따를 만한 분을 만나자 內外(京鄕)를 가리지 않고 분연히 일어났으니, 그분의 進退가 이미 道義에 부합하지 않았는가? 이와 같은 내용으로 墓誌銘을 지으면 今人과 後人에게 보여줄 수 있겠나?” 하고 물었더니, 盧立이 손을 모아잡고 절하며 “네, 네.”라고 대답하였다.
盧君의 祖父 盧子輿는 濮州 濮陽縣令을 지냈고, 父親 盧同은 舒州 望江縣令을 지냈다. 夫人의 祖父 李延宗은 鄆州司馬를 지냈고, 父親 李進成은 鄜州 洛交縣令을 지냈다.
아들 셋은 盧暢‧盧申‧盧易이고, 딸 셋은 모두 출가해 士人의 아내가 되었다.
무덤은 河南 緱氏縣 梁國原에 있다. 合葬한 일시는 元和 2년(807) 2월 10일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