貞元十七年九月丁卯
에 隴西
合葬其皇祖考貝州司法參軍楚金
과 皇祖妣淸河崔氏夫人于汴州開封縣某里
하니라
其世曰 由
六世至司空
하고 司空之後二世爲刺史淸淵侯
하고 由侯至于貝州
히 凡五世
라
其德行曰 事其兄如事其父하고 其行不敢有出焉하니라 其夫人事其姒如事其姑하고 其於家不敢有專焉하니라
其在貝州에 其刺史不悅於民하야 將去官에 民相率讙譁하야 手瓦石하고 胥其出擊之하니라
刺史匿不敢出하니 州縣吏由別駕已下不敢禁하니라 司法君奮曰 是何敢爾오하고
屬小吏百餘人
하야 持兵
以出
하야 立木而署之曰 刺史出
에 民有敢觀者
면 殺之木下
하리라하니 民聞皆驚
하야 相告散去
하니라
其葬曰 翺旣遷貝州君之喪于貝州
하야 于開封
하고 遂遷夫人之喪于楚州
하야 八月辛亥
에 至于開封
하야 壙于丁巳
하고
墳于九月辛酉
하고 窆于丁卯
하니라 人謂李氏
는 世家也
라 侯之後五世仕
나 蘊必發
이니 其起而大乎
ㄴ저
四十年而其兄之子衡은 始至戶部侍郞하고 君之子四人은 官又卑라 翺其孫也로되 有道而甚文하니 固於是乎在아
公(韓愈)은 李翺와 아주 잘 아는 사이였는데, 그 祖父의 墓誌銘을 간단명료하게 서술한 것이 이와 같았다.
貞元 17년(801) 9월 丁卯日에 隴西 李翺가 그 皇祖考 貝州司法參軍 李楚金과 皇祖妣 淸河 崔氏夫人을 汴州 開封縣 아무 마을에 합장하였다.
昌黎 韓愈는 그 世系를 기록하고 그 德行을 드러내어 장사 지낸 정황을 기록하였다.
그 世系는 아래와 같다. 西涼 武昭王(李暠)으로부터 6世를 지나 司空(李沖)에 이르고, 司空의 뒤로 2세가 刺史 淸淵侯(李彬)이고, 淸淵侯로부터 貝州(李楚金)에 이르기까지 모두 5世이다.
李君의 德行은 아래와 같다. 형님을 부모처럼 섬기고 행실은 감히 법도에 벗어남이 없었다. 그 夫人은 맏동서를 시어머니처럼 섬기고 집안에서 감히 專斷함이 없었다.
李君이 貝州의 司法參軍으로 있을 때에 그곳 刺史가 백성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자사가 임기를 마치고 떠나려 할 때에 백성들은 서로 이끌고 衙門 앞에 모여 시끄럽게 떠들면서 손에 기와 조각이나 돌을 들고서 刺史가 나오면 치려고 기다렸다.
刺史가 숨어서 감히 나오지 못하니, 州縣의 別駕 이하의 관리들이 감히 금지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司法君(李楚金)이 격분해 “이놈들이 어디 감히 이런 짓을 하느냐?”라고 하고,
下吏 1백여 인을 모아놓고서 兵仗(몽둥이처럼 생긴 兵器)을 들고 나가서 나무를 세워놓고 〈그 나무에〉 “刺史가 나올 때에 감히 바라보는 백성이 있으면 이 나무 아래에서 죽일 것이다.”라고 써놓게 하니, 백성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놀라 서로 이 말을 일러주면서 흩어져 떠났다.
後任 刺史가 와서 李君을 추가로 발탁해 임용하니, 貝州가 이때부터 크게 다스려졌다.
이군의 安葬에 대한 일은 아래와 같다. 李翺가 이미 貝州君의 喪柩를 貝州에서 옮겨와 開封에 草殯하고서, 드디어 夫人의 喪柩를 8월 辛亥日에 楚州에서 開封으로 옮겨와서 丁巳日에 구덩이를 파고,
9월 辛酉日에 봉분을 만들고 丁卯日에 〈李君과 부인의 상구를 동시에〉 下棺하였다. 사람들은 李氏를 世家라 한다. 淸淵侯 이후로 5代 동안 出仕가 순조롭지 못하였으나 쌓인 것은 반드시 드러나기 마련이니 아마도 興盛하여 크게 顯達할 것이다.
40년 뒤에 이군의 형의 아들 李衡이 처음으로 戶部侍郞에 이르렀고, 이군의 네 아들은 모두 관직이 낮았다. 이고는 이군의 손자인데 道가 있고 문장에 능하니, 〈쌓인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란 것이〉 본래 이고의 身上에 있었던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