父惲은 河南溫縣尉로 娶陳留太守薛江童女하야 生六子하니라 君最後生하야 愛於其父母하니라
年少長
에 喜學
하야 學無所不通
이나 最深於
하야 以人之始生年月日所直日辰支干相
斟酌
하야
推人壽夭貴賤利不利
하되 輙先
其年時
면 百不失一二
하니라
學者就傳其法
호되 初若可取
나 卒然失之
라 도 莫能與其校得失
이라
進士及第
하고 試
入等
하야 補祕書正字
나 母喪去官
이라가 卒喪
하고 太子校書
하니라
하야 授伊闕尉
하야 佐水陸運事
하니라 에 以公爲運佐如初
하니라
未幾
에 御史臺疏
호되 言行能高
하니 不宜用外府
라하니 卽詔爲
하니라 半歲
에 分部東都臺
라가 遷殿中侍御史
하니라
元和八年四月에 詔徵하야 旣至에 宰相欲白以爲起居舍人하니라
其年十月戊申에 葬河南洛陽縣하니 距其祖澠池令府君僑墓十里라
君昆弟六人이러니 先君而沒者四人이라 其一人嘗爲鄭之滎澤尉러니
信道士長生不死之說하야 旣去官에 絶不營人事하니라
故四門之寡妻孤孩
와 與滎澤之妻子
의 衣食百須
가 하니라
自初爲伊闕尉하야 佐河南水陸運使로 換兩使하고 經七年不去는 所以爲供給敎養者니라
及由蜀來
하얀 輩類御史皆樂在朝廷進取
로되 君獨念寡
分司東出
하니 嗚呼
라 其仁哉
ㄴ저
君亦好道士說하야 於蜀得祕方하야 能以水銀爲黃金하야 服之冀果不死하니라
將疾
에 謂其友衛中行大受韓愈退之曰 吾夢大山裂
하야 流出赤黃物如金
이라 曰 是所謂
者
니 라하니라
君旣沒
에 愈追占其夢曰
이요 라 裂而流赤黃
은 疽象也
요 大還者
는 大歸也
니 其告之矣
니라
妻范陽盧氏
는 鄭滑節度使兼御史大夫群之女
로 與君合德
하야 하니라
男三人이니 長曰初니 協律이요 次曰彪요 其幼曰還이니 適三歲라 女子九人이라 銘曰
殿中侍御史 李君은 이름이 虛中이고 字가 常容이다. 그의 11대조 李沖이 拓拔氏(北魏) 때에 고위직에 올라 명성을 드날렸다.
父親 李惲은 河南 溫縣의 縣尉를 지냈고, 陳留太守 薛江童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여섯을 낳았다. 이군은 가장 뒤에 태어난 막내여서 부모에게 寵愛를 받았다.
李君이 장성한 뒤엔 배움을 좋아하여 배운 것을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었으나, 五行書에 가장 조예가 깊어서 사람이 출생한 年‧月‧日‧時에 해당하는 地支와 天干의 相生과 相剋으로 衰‧死‧王(旺)‧相을 짐작하여
그 사람의 壽夭‧貴賤‧利不利를 推算하되 매양[輒] 〈그 사람이 출생한 年‧月‧日‧時로 그 사람의 壽夭‧貴賤‧利不利를〉 推測[處]하면 백에 한둘도 틀리지 않았다.
그 학설이 深廣하고 優美하여 關鍵(중요한 부분)을 분석하는 방법이 복잡하고 번다하여 어지럽게 뒤섞이고 중복 출현하였다.
그리하여 배우는 자가 그에게 가서 그 術法을 傳受받되 처음에는 배울 듯하지만 끝내는 배우지 못하였다. 星官이나 曆翁도 그와 得失(優劣)을 따질 수 없었다.
李君은 進士에 급제한 뒤에 吏部에서 주관하는 書判試에 응시해 합격하여 祕書省 正字에 補任되었으나 母親喪으로 인해 관직에서 떠났다가 상을 마친 뒤에 太子校書에 選補되었다.
河南尹이 奏章을 올려 〈이군을 추천하여〉 伊闕縣의 縣尉로 삼아 水陸轉運使의 일을 보좌하게 하였다. 옛 宰相 鄭公 餘慶이 후임 하남윤으로 와서도 여전히 이군을 轉運使의 보좌관으로 삼았다.
재상 武公 元衡이 劒南節度使로 나갈 때에 上奏하여 이군을 빼앗아 觀察推官으로 삼았다가 監察御史에 제수하였다.
오래지 않아 御史臺에서 上疏하기를 ‘〈이군처럼〉 말을 하면 실행하고 재능이 높은 사람을 地方官[外府]으로 쓰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하니, 즉시 조서를 내려 정식으로 御史에 제수하였다. 반년 뒤에 東都 御史臺의 職任을 맡았다가 殿中侍御史로 승진하였다.
元和 8년(813) 4월에 徵召하는 詔書를 받고 京師로 올라가자, 재상이 조정에 보고하고서 이군을 起居舍人으로 삼고자 하였다.
한 달이 지난 뒤에 등에 종기가 나서 6월 乙酉日에 卒하였으니 향년이 52세였다.
그해 10월 戊申日에 河南府 洛陽縣에 장사 지냈으니, 그의 祖父인 澠池縣令 李僑府君의 무덤과는 거리가 10리이다.
李君은 형제가 여섯이었는데, 이군보다 먼저 죽은 자가 넷이었다. 형제 중 한 사람은 일찍이 鄭州 滎澤縣의 縣尉를 지낸 적이 있는데,
죽지 않고 오래 살 수 있다는 道士의 말을 믿어, 관직을 버린 뒤에 인간의 일을 단절하고 경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네 집의 寡婦 및 孤兒, 滎澤尉의 妻子 등이 입고 먹을 것과 그 밖에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자를 모두 이군이 마련해야 했다.
처음 伊闕縣의 縣尉가 되어 河南水陸轉運使를 보좌한 때로부터 두 轉運使가 바뀌고 7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떠나지 않았던 것은 寡婦들을 먹여 살리고 孤兒들을 敎養하기 위해서였다.
蜀(四川)에서 京師로 돌아옴에 미쳐 同僚 御史들은 모두 朝廷에서 〈관직을 맡고〉 있으면서 進取하기를 좋아하였으나, 이군만은 유독 寡婦와 孤兒들의 부양을 위해 東都로 分司하기를 청하였으니, 아! 그는 참으로 仁者이다.
李君은 또한 道士의 說을 좋아하여 蜀에 있을 적에 祕方을 얻어 水銀을 製鍊해 黃金으로 만들어서 그것을 복용하고 참으로 죽지 않기를 바랐다.
병이 나려 할 때에 이군은 벗인 衛中行 大受와 韓愈 退之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 꿈에 큰 산이 갈라지더니 붉고 누런 물건이 흘러나오는데 마치 金 같았다. 左人(道士)이 말하기를 ‘이것은 이른바 大還이란 것이니, 곧 죽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군이 죽은 뒤에 내가 추후에 이군의 꿈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였다. “山은 艮이니 艮은 등이다. 산이 갈라져서 붉고 누런 물건이 흘러나온 것은 종기를 상징하고, 大還은 大歸(죽음)이니 꿈이 이미 〈종기로 죽을 것을〉 알려준 것이다.”
아내 范陽 盧氏는 鄭滑節度使 兼御史大夫 盧群의 따님으로 李君과 德이 같아 친척 중에 뒤에서 그를 비난하는 이가 없었다.
아들 셋을 두었는데, 長子는 이름이 初로 協律郞이고, 次子는 이름이 彪이고, 어린 막내는 이름이 還으로 이제 막 세 살이다. 딸은 아홉이다. 銘은 다음과 같다.
자기의 수명 채우지 않고 후인들에게 보태주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