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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韓愈(3)

당송팔대가문초 한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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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한유(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按田弘正本傳컨대 世多臣順大節이나 昌黎公特其以六州還朝廷一事하고 而頌美之詞特詳銘中하니 甚得體
元和八年十一月壬子 上命丞相元衡, 丞相吉甫, 丞相絳하야 召太史 尙書比部郞中韓愈至政事堂하고
傳詔曰 田弘正始有廟京師하니 朕惟弘正先祖父 厥心靡不嚮帝室이나 訖不得施일새 乃以敎付厥子하니라
維弘正銜訓事嗣 朝夕不怠일새 以能迎天之休하야 顯有丕功하니라
維父子繼忠孝하니 予維寵嘉之하노라 是以命汝愈銘하노니 欽哉하라
惟時臣愈承命悸恐이라 明日詣하야 拜疏辭謝 하다
退하야 伏念昔者魯僖公 能遵其祖하니 周天子實命其史臣克하야 作爲之詩하야 使聲于其廟하야 以假魯靈하니라
今天子嘉田侯服父訓不違하야 用康靖我國家하니 蓋寵銘之 所以田氏之祖考
而臣適執筆隷太史하여하니 其何以辭리오
謹案 魏博節度使, 銀靑光祿大夫, 檢校工部尙書, 兼魏州大都督府長史, 御史大夫, 沂國公田弘正 北平盧龍人이라
故爲하야 忠孝畏愼하니라 其子幼弱이로되 하니
人吏不附하고 迎弘正於其家하야 使領軍事하니라
弘正籍其軍之衆 與六州之人하야 還之朝廷하고 悉除河北故事하야 比諸州 故得用爲帥하니라
已而 復贈其父故滄刺史兵部尙書하고 母夫人鄭氏梁國太夫人하니라
得立廟祭三代하니 曾祖都水使者府君 祭初室하고 祖安東司馬贈襄州刺史府君 祭二室하고 兵部府君 祭東하니라 其銘曰
唐繼古帝하니
海外受制
하야
以驚하니
群黨하야
河北失平이라
號登元和하야
하야
하니
咸順指令이라
魏土
戲兵하니
吏戎하야
莫保腰頸이라
人曰田侯
其德可倚라하야
叫譟奔趨하야
하니
田侯攝事하야
奉我이라
束縛弓戈하고
이라
提壃籍戶하야
來復이라
帝欽良臣하사
曰維錫予
嗟我六州
始復故初로다
告慶于宗하고
以降命書호되
하고
豹尾神旗
櫜兜戟纛하고
以長魏師하라하시니
田侯稽首하야
臣愚不肖
迨玆有成
祖考之敎로이다
帝曰兪哉
維汝하니
予思乃父하야
追秩夏卿하고
嫓德娠賢하니
梁國是榮하노라
田侯作廟
相方視阯하고
見于蓍龜하니
祖考咸喜
田侯
兩有文武하니
訖其外庸이면
可作로다
咨汝田侯
勿亟勿遲하고
覲饗式時하야
爾祖爾思하라


03. 魏博節度觀察使 沂國公先人廟碑銘
〈≪舊唐書≫와 ≪新唐書≫에 실린〉 田弘正本傳을 상고하면 세상에서는 그가 신하로서 큰 절개를 지킨 것을 대단하게 여겼으나, 昌黎公은 특별히 그가 여섯 개의 를 가지고 조정에 귀순한 한 가지 일을 기록한 부분을 고쳐 쓰고서, 찬미하는 말을 특별히 銘文 안에 자세히 말하였으니 의 체제에 매우 부합한다.
元和 8년(813) 11월 壬子日에 황제께서 丞相 武元衡, 丞相 李吉甫, 丞相 李絳에게 명하여 太史尙書比部郞中 韓愈政事堂으로 불러,
다음과 같은 詔書를 전하셨다. “田弘正은 처음부터 家廟京師에 있었다. 이 생각건대 전홍정의 조부와 부친은 그 마음이 조정을 향해 있지 않은 적이 없었으나 끝내 그 마음을 실현하지 못하였기에, 이에 그 자손에게 유언을 남겼다.
전홍정은 교훈을 가슴에 새기고[] 家業을 계승하는 일을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았으므로 하늘이 내린 복을 받아 드러나게 큰 공을 세웠다.
저들 父子가 서로 이어 충성하고 효도하였으니 나는 저들을 가상히 여긴다. 그러므로 너 한유에게 명하여 碑銘을 짓게 하니, 삼갈지어다.”
이때 韓愈는 명을 받들고 두렵고 불안하였다. 그래서 이튿날 東上閤門으로 가서 를 올려 사절하였으나 황제께서 윤허하지 않으셨다.
물러나와 삼가 생각건대, 옛날에 僖公이 그 先祖 伯禽功業[]을 준수하니, 나라 天子께서 그 史臣 史克에게 명하여 〈〉‧〈有駜〉‧〈泮水〉‧〈閟宮〉 등의 를 짓게 하여 〈나라에 주어〉 그 종묘에서 노래하여 나라 先君들의 魂靈을 오게 하였다.
지금 천자께서 田侯(田弘正)가 부친의 遺訓을 실행[]하고 어기지 않음으로써 우리 국가를 편안하게 한 것을 가상하게 여기셨으니, 대체로 恩寵을 내려 碑銘을 짓게 하신 것은 田氏祖考慰安하기 위함이시다.
그런데 이 마침 史筆을 잡고 史館에 속한 史官으로서 皇上의 명을 받았으니, 어찌 사절할 수 있겠는가?
삼가 고찰하건대, 魏博節度使 銀靑光祿大夫 檢校工部尙書 兼魏州大都督府長史 御史大夫 沂國公 田弘正北平 盧龍 사람이다.
옛 위박절도사 휘하의 장군으로 충성하고 효도하며 모든 일에 조심하고 삼갔다. 田季安이 죽었을 때에 그 아들이 어렸는데도 〈職位世襲하는〉 종전의 관례[故事]에 따라 그 부친을 대신하니,
인민과 관리들이 복종하지 않고 田弘正의 집으로 와서 그를 맞이해 가서 軍務를 주관하게 하였다.
그러자 전홍정은 그 군대의 숫자와 여섯 의 인민을 장부에 기록하여 朝廷에 귀속시키고, 河北에 〈직위를 세습하던〉 종전의 관례를 다 없애고서 다른 와 같이 〈조정의 임명을 받게〉 하였다. 그러므로 전홍정이 魏博節度使에 임명된 것이다.
이윽고 조정에서 다시 그 부친인 옛 滄州刺史兵部尙書에, 母夫人 鄭氏梁國太夫人에 추증하였다.
廟宇를 세워 3를 제사 지냈는데, 曾祖 都水使者 府君은 1에서 제사하고, 祖考 安東司馬 贈襄州刺史 부군은 2에서 제사하고, 兵部 부군은 東室에서 제사하였다. 은 다음과 같다.
나라가 옛 제왕의 일 계승하니
바다 밖 나라들도 통제받았네
오랜 태평에 젖어 있다가
땅의 도적에 크게 놀랐네
반역의 도당들 서로 연결해
河北의 평화를 잃게 하였네
元和 연간에 이르러
큰 성인께서 나라 경영하시어
바람 일고 햇볕 비추니
모두 명령에 순종하였네
산 높고 땅 넓은 魏州에서
어린아이가 병권을 희롱하니
관리와 군사들 괴로워하고 원한 품었네
목숨 부지 못할까 봐
사람들 말하네 田侯
그 덕이 의지할 만하다고
떠들어대며 달려가서
그의 집 문 앞에서 일어나기 청하였네
전후가 일을 맡자
우리 황제의 명 받들어
무기를 묶어두고
예의의 준칙 고찰하였네
관할하는 지역의 戶籍 가지고
와서 국가의 상법 회복하였네
황제께서 어진 신하 존중하시어
그대에게 상을 준다고 말씀하셨네
아 우리 여섯 개의 들이
비로소 원래의 상태로 회복되었다
경사를 宗廟에 고하고서
조서를 내리시되
은 포대에 넣어 간직하고
표범 꼬리로 장식한 장군의 깃발과
활집과 투구 창과 큰 기를 세우고
가서 魏博 군대를 통솔하라” 하셨네
節
전후는 머리 조아리며 아뢰기를
“신은 어리석고 불초하오나
지금 성취한 것은
父祖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하니
황제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너는 충신이고 효자이니
내 너의 아비를 생각하여
兵部尙書에 추증하고
너의 어미는 有德者의 아내 되어 어진 아들 낳았으니
梁國夫人에 봉하여 영예롭게 하노라”
전후가 廟宇를 세울 적에
방위를 보고 터를 살펴
시초점 치고 거북점 치니
조상님들 다 기뻐하신다 하네
과감하고 굳센 전후시여
文德武略을 겸비하였으니
지방관의 임기를 마치신 뒤에는
황제의 보좌 되시리라
아 그대 전후시여
서둘지도 말고 늦추지도 말고
적당한 때에 가서 제사 올리고서
그대의 조상님들 생각하소서


역주
역주1 魏博節度觀察使沂國公先廟碑銘 : 沂國公은 田弘正(764~821)의 封號이다. 本名은 興인데, 魏‧博‧相‧貝‧衛‧澶 등 6州를 가지고 귀순하니, 唐 憲宗이 이를 가상히 여겨 弘正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魏‧博은 唐 代宗 즉위년인 寶應(762) 이래로 田承嗣가 節度使가 되어 將吏(文武官員)를 스스로 임용하고 조정에 貢賦도 바치지 않고 世襲制를 채택하였다. 大曆 13년(778)에 전승사가 죽자, 전승사의 조카 田悅이 節度留後가 되니, 전승사의 아들 田緖가 전열을 죽이고 제가 魏博節度觀察使가 되었다. 貞元 12년(796)에 전서가 죽으니, 그 아들 田季安이 절도유후가 되었다. 元和 7년(812)에 전계안이 죽으니, 그 아들 田懷諫이 절도유후가 되었는데, 그때 나이가 11세였다.
전홍정의 부친 田廷玠는 비록 전승사와 堂兄弟(종형제)였으나, 마음이 항상 조정으로 향하여 전승사 등과 함께 조정을 등지는 일을 하지 않았다. 전홍정은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여섯 州를 가지고 귀순하여, 唐나라 조정으로 하여금 失地를 회복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정을 離脫하는 河北의 국면을 깨뜨렸으니 意義가 매우 중대하다. 그러므로 韓愈가 銘文 중에 이 일을 강조해 서술하여 전홍정의 忠孝의 氣節(기개와 절조)을 드러낸 것이다.(≪新譯昌黎先生文集≫)
역주2 檼(은)括 : 기존의 문장을 改作함이다.
역주3 東上閤門 : 大明宮의 宣政殿 왼쪽 문이다.
역주4 不報 : 회답하지 않는다는 말로, 곧 允許하지 않음이다.
역주5 伯禽之烈 : 伯禽은 周公 旦의 아들로 魯나라에 封해졌다. 烈은 功이니, 곧 管叔과 蔡叔이 반란을 일으킨 뒤에 淮夷와 徐戎이 반란을 일으키자, 백금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여 魯나라를 안정시킨 일을 이른다.(≪史記≫ 〈魯周公世家〉)
역주6 駉駜泮閟 : ≪詩經≫ 〈魯頌〉에 실려 있는 네 篇의 이름이다.
역주7 休寧 : 安寧의 뜻인데, 여기에는 慰安의 뜻으로 쓰인 듯하다.
역주8 明命 : 帝王의 命을 이른다.
역주9 魏博諸將 : 田季安이 節度使일 때에 그 麾下의 衙內兵馬使로 있었던 것을 이른다.
역주10 田季安卒 : 元和 7년(812) 8월에 田季安이 32세의 나이로 사망하니, 11세인 그 아들 田懷諫이 軍務를 맡고, 田弘正을 都知兵馬使로 삼았다. 軍政이 田懷諫의 家僮 蔣仕則에 의해 결정되어 자주 장군을 교체하니, 諸將이 불복하여 田弘正을 맞이해 軍政을 맡게 하였다.
역주11 用故事代父 : 故事는 先例이니, 곧 선례를 따라 아버지의 관작을 世襲함이다.
역주12 (洲)[州] : 저본에는 ‘洲’로 되어 있으나, ≪五百家注昌黎文集≫에 의거하여 ‘州’로 바로잡았다.
역주13 (至)[室] : 저본에는 ‘至’로 되어 있으나, 本集에 의거하여 ‘室’로 바로잡았다.
역주14 海外受制 狎于太寧 : 本集에는 ‘海內臣制 洽于太寧’으로 되어 있다.
역주15 燕盜 : 安祿山의 반란을 이른다. 안녹산이 반란하여 세운 나라 이름이 ‘大燕’이다.
역주16 相維 : 서로 연결함이다.
역주17 大聖載營 : 大聖은 唐 憲宗을 이르고, 載營은 政事를 주재함이다.
역주18 風揮日舒 : 미풍이 불고 햇볕이 고루 비친다는 말로, 정치가 깨끗하고 사회가 안정됨을 비유한다.
역주19 嶪嶪 : 높고 큰 모양이다.
역주20 嬰兒 : 田懷諫을 이른다.
역주21 愁毒 : 고뇌하고 원한을 품음이다.
역주22 乘門請起 : 諸將들이 田弘正의 집으로 가서, 나와서 軍政을 맡아주기를 청한 것이다.
역주23 天明 : 天子를 이른다.
역주24 考校度程 : 考校는 비교해 고찰함이고, 度程은 예의의 격식이나 준칙을 이른다.
역주25 邦經 : 국가의 常法을 이른다.
역주26 旌節有韜 : 唐代에 節度使가 出行할 때에 세우는 儀仗으로, 旌은 賞罰의 專權을 상징하고, 節은 生殺의 전권을 상징한다. 韜는 旌과 節을 간직하는 포대이다.
역주27 (思)[忠] : 저본에는 ‘思’로 되어 있으나, ≪韓文考異≫에 의거하여 ‘忠’으로 바로잡았다.
역주28 曁曁 : 과감하고 굳센 모양이다.
역주29 承輔 : 輔佐이다. 옛날에 王者에게는 네 명의 보좌가 있었으니, 前疑‧後承‧左輔‧右弼이다.

당송팔대가문초 한유(3) 책은 2020.12.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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