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子司業竇公諱牟
요 라 六代祖敬遠
이 嘗封西河公
일새 大父同昌司馬
히 四代仍襲爵名
하니라
同昌諱胤이 生皇考諱叔向하니 官至左拾遺溧水令하고 贈工部尙書하니라
尙書於大曆初名能爲詩文하니라 及公爲文에 亦最長於詩라 孝謹厚重하니라
進士登第
에 佐六府五公
하고 八遷至檢校虞部郞中
하니라
元和五年에 眞拜尙書虞部郞中하고 轉洛陽令都官郞中澤州刺史하야 以至司業하니라
年七十四에 長慶二年二月丙寅以疾卒하니라 其年八月某日에 葬河南偃師先公尙書之兆次하니라
初
에 公善事繼母
하야 家居未出
하고 學問於江東
하니라 尙幼也
로되 名聲詞章
이 行于京師
하니 人
其至
하니라
及公就進士且試에 其輩皆曰 莫先竇生이라하니라 于時公舅袁高爲給事中하야 方有重名이러니 愛且賢公이나
然實未嘗以干有司하니라 公一擧成名而東이나 遇其黨必曰 非我之才라 維吾舅之私라하니라
其佐昭義軍也
에 遇其
하야 公
하야 以定其危
하니라 後將盧從史
는 重公不遣
하고 奏進官職
하니라
公視從史益驕不遜하고 僞疾經年이라가 轝歸東都하니라 從史卒敗死로되 公不以覺微避去爲賢告人하니라
公始佐崔大夫縱留守東都하고 後佐留守司徒餘慶하니라 歷六府五公한대 文武細麤不同이나
自始及終
히 於公無所
有彼此言者
하니라 六府從事幾且百人
이라 有愿姦易險賢不肖不同
이로되
公一接以和與信하니 卒莫與公有怨嫌者하니라 其爲郞官令守에 愼法寬惠不刻하니라
敎誨於國學也에 嚴以有禮하고 扶善遏過하며 益明上下之分하야 以躬先之하니 恂恂愷悌하야 得師之道하니라
公一兄三弟니 常群庠鞏이라 常은 進士로 水部員外郞하고 朗䕫江撫四州刺史하니라
群은 以處士徵하야 自吏部郞中拜御史中丞하야 出帥黔容以卒하니라
庠은 三佐大府하고 自奉先令爲登州刺史하니라 鞏亦進士로 以御史佐淄靑府하야 皆有材名하니라
公子三人에 長曰周餘는 好善學文하고 能謹謹致孝하야 述父之志에 曲而不黷하니라
次曰某와 曰某는 皆以進士貢이라 女子三人이라 愈少公十九歲라 以童子得見이러니 於今四十年이라
始以師視公하고 而終以兄事焉이라 公待我一以朋友하고 不以幼壯先後致異하니 公可謂篤厚文行君子矣로다 其銘曰
後去觀津하야
而家平陵이라
遙遙厥緖를
夫子是承이라
我敬其人하고
我懷其德이라
作詩孔哀를
質于幽刻하라
중간에 빈말을 많이 하여 精神(문장)을 點綴(더욱 아름답게 꾸밈)하였다.
國子司業 竇公은 諱가 牟이고 字가 아무개이다. 6대조 竇敬遠이 일찍이 西河公에 봉해졌기 때문에 同昌郡司馬를 지낸 祖父에 이르기까지 연속 4代 동안 西河公이란 爵名을 承襲하였다.
동창군사마 諱 胤이 두공의 父親 諱 叔向을 낳았는데, 官職이 左拾遺 溧水縣令에 이르고, 工部尙書에 추증되었다.
공부상서는 大曆(代宗의 연호) 초년에 詩文에 능하다는 명성이 났는데, 두공이 문장을 지음에 미쳐서도 詩가 가장 뛰어났다. 두공은 사람됨이 효성스럽고 공손하며 인정이 많고 언행에 무게가 있었다.
進士試에 참가해 급제한 뒤에 6府에서 다섯 公(節度使)을 보좌하였고, 여덟 차례 승진하여 檢校虞部郞中에 이르렀다.
元和 5년(810)에 정식으로 尙書虞部郞中에 제수되었고, 洛陽令‧都官郞中‧澤州刺史를 거쳐 國子司業에 이르렀다.
74세인 長慶 2년(822) 2월 丙寅日에 병으로 卒하였다. 그해 8월 아무 날에 河南府 偃師縣에 있는 先親 尙書公의 墓域에 장사 지냈다.
당초에 竇公은 繼母를 잘 섬겨 집안에만 기거하고 出仕를 구하지 않았으나, 學問이 江東에 소문났다.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명성과 문장이 京師에 파다하니 사람들은 그가 경사로 오기를 기다렸다.
두공이 경사로 와서 進士試에 응시하려 하자 그 同輩들은 모두 “누구도 竇生을 능가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때 두공의 外叔 袁高가 給事中으로 있으면서 바야흐로 성대한 명성이 있었는데, 두공을 사랑하고 훌륭하게 여겼다.
그러나 실로 일찍이 有司(考官)에게 청탁한 일이 없었다. 두공은 한 번에 과거에 급제하고 동쪽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벗들을[黨] 만나면 반드시 “〈내가 급제한 것은〉 나의 재능이 아니라 외숙의 사사로운 교분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가 昭義軍節度使를 보좌할 때에 그 主將이 사망하는 일을 당하자, 두공은 잠시 節度使의 직무를 代理하여 위험한 국면을 안정시켰다. 후임으로 온 主將 盧從史는 두공을 重視하여 떠나보내지 않고 上奏하여 官職을 올려주었다.
두공은 노종사가 점점 교만하고 불손한 것을 보고는 1년이 넘도록 병이 난 체하다가 수레에 몸을 싣고 東都로 돌아왔다. 노종사가 마침내 실패해 죽었으되 두공은 자신이 노종사가 반역할 기미를 깨닫고서 미리 피해 간 것이 賢明하였다고 남에게 말하지 않았다.
竇公은 처음에 東都留守인 大夫 崔縱을 보좌하고 뒤에 東都留守인 司徒 鄭餘慶을 보좌하였다. 6府에서 다섯 公의 從事(幕僚)를 역임하였는데, 〈다섯 분의 節度使 중에는〉 文人도 있고 武士도 있어서 세밀함과 거칢이 같지 않았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두공에 대해서 원망하거나 의견을 달리한 분이 없었다. 6府의 從事(幕僚)가 거의 백여 인이어서, 〈그중에〉 질박[愿]한 자도 있고 간사한 자도 있으며, 평이한 자도 있고 陰險한 자도 있어서 어질고 어질지 못함이 같지 않았으나,
두공은 똑같이[一] 화목함과 진심으로 대하니 끝내 두공을 怨恨하는 자가 없었다. 그가 郞官과 縣令과 郡守가 되었을 때는 法令을 삼가 지키고, 백성을 너그럽고 자애롭게 대하고 각박하게 하지 않았다.
國學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에는 엄격하여 禮가 있었고, 善을 부추기고 과오를 막았으며, 더욱 상하의 분수를 밝혀 솔선수범하니, 성실하고 和樂하여 스승의 도리에 맞았다.
竇公에게는 형님 한 분과 아우 셋이 있으니, 竇常‧竇群‧竇庠‧竇鞏이다. 竇常은 進士에 급제하고서 水部員外郞을 거쳐 朗州‧䕫州‧江州‧撫州 등 네 州의 刺史를 지냈다.
竇群은 處士로서 부름을 받고 나가 吏部郞中으로 御史中丞에 제수되어, 黔中觀察使‧容管經略使로 나갔다가 卒하였다.
竇庠은 세 차례 節度使[大府]를 보좌하였고, 奉先縣令으로 登州刺史가 되었다. 竇鞏도 進士에 급제하고서 御史로서 淄靑節度使를 보좌하였다. 형제가 모두 賢才라는 명성이 있었다.
竇公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長子 竇周餘는 학문과 문장을 좋아하였으며, 부지런히 효도를 다하여 父親의 뜻을 계승함에 정성을 다해 부친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았다.
次子 아무와 아무는 모두 鄕貢進士이다. 딸도 셋을 두었다. 나는 두공보다 열아홉 살이 적다. 내가 童子 때에 公을 뵌 적이 있는데, 이제 이미 40년이 흘렀다.
처음에는 공을 스승으로 뵈었고 뒤에는 공을 兄으로 섬겼다. 公은 나를 한결같이 朋友로 대하였고, 내가 어리거나 장성하거나 전후로 지위에 변화가 있다 하여 달리 대하지 않았으니, 문장과 德行이 深厚한 군자라고 이를 만하다. 그 銘은 다음과 같다.
后緡이 구멍으로 도망쳐 나와서 가련한 유복자 낳았는데
夏王이 다시 집안을 일으켜 세워 竇를 氏로 삼았네
성인께서 놀라 황하에서 발길을 돌린 것은 竇鳴犢을 동류로 引證한 것이고
재상 竇嬰이 漢家의 黃老術을 제거하고 儒家의 궤도로 들게 하였네
뒤에 觀津을 떠나
平陵으로 가서 살았네
아득히 이어온 世系를
竇公께서 이으셨네
내 그분의 사람됨 공경하고
그분의 은덕 그리네
시를 지을 때에 매우 슬펐던 것을
이 誌銘에서 증명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