范陽盧行簡이 將葬其父母할새 乞銘于職方員外郞韓愈曰 吾先世世載族姓書하니라 吾冑于拓拔氏之弘農守라
守後四代吾祖也로 爲沂錄事參軍하니라 五世而吾父也로 爲襄陽丞하니라
始吾父自曹之南華尉로 歷萬年縣尉하야 至襄陽丞하니라 以材任煩하고 能持廉名하니라
去襄陽則署鹽鐵府
하야 出入十年
에 常最其列
하니라 貞元十三年
에 終其家
하니 年六十七
이라 河南河陰
하니라
吾母燉煌張氏也로 王父瓘爲兗之金鄕令이라 先君歿而十三年에 夫人終하니 年七十三이라
從殯河陰하니라 生子男三人하니 居簡은 金吾兵曹요
行簡은 則吾니 其次也로 大理主簿佐江西軍이요 其幼可久라 女子嫁浮梁尉崔叔寶하니라
吾曰
을 近世儒莫學
이로되 獨行簡以其
學
하야 能名一世
러니 舍而從事於人
하야 以材稱
하니라
葬其父母
에 乞銘以圖長存
하니 是眞
矣
라 可銘也
라하고 遂以銘
하노라
弘農諱懷仁이요 沂諱璬요 襄陽諱某라 今年實元和六年이라
唐荊川曰 一篇俱是求文者自言이요 更不言一事하니라
范陽 盧行簡이 그 父母를 장사 지내려 할 때에 職方員外郞 韓愈에게 墓誌銘을 청하며 말하였다. “나의 祖先은 대대로 族姓書(族譜)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나는 拓拔氏(北魏) 때에 弘農太守를 지낸 분의 후손입니다.
弘農太守 이후로 4대째 되시는 분이 나의 祖父이신데 沂州의 錄事參軍을 지내셨습니다. 5대째가 나의 父親이신데 襄陽縣丞을 지내셨습니다.
처음에 나의 부친은 曹州 南華縣尉로부터 시작하여 萬年縣尉를 거쳐 襄陽縣丞에 이르렀습니다. 재능이 있어 煩多한 직무를 감당하셨고 청렴하다는 명예를 지키셨습니다.
襄陽을 떠나서는 鹽鐵府의 관리에 임명되셨는데, 염철부에 出入하는 10년 동안 동료 중에 성적이 항상 최고였습니다. 貞元 13년(797)에 집에서 逝去하셨으니 향년이 67세셨습니다. 河南府 河陰縣에 殯(停柩)하였습니다.
내 母親은 燉煌 張氏로, 祖父 張瓘은 兗州 金鄕縣令을 지냈습니다. 先君(先親)께서 돌아가시고 13년 뒤에 모친께서 돌아가셨으니, 향년이 73세셨습니다.
부친을 따라 河陰縣에 殯하였습니다. 아들 셋을 낳았으니, 長子 居簡은 金吾兵曹이고,
次子 行簡은 바로 나로 大理主簿가 되어 江西節度使를 보좌하고 있고, 어린 셋째는 可久입니다. 딸은 浮梁縣尉 崔叔寶에게 출가하였습니다.
금년 10월에 河陰縣에서 汝州의 臨汝縣 臨汝原에 啓葬(改葬)하려 합니다.”
내가 말하기를 “陰陽과 星曆을 근세의 儒者들은 배우지 않는데, 유독 盧行簡만은 여가를 이용해 배워서 온 세상에 이름을 날리더니, 뒤에 〈陰陽과 星曆을〉 버리고 江西節度使의 從事(幕僚)가 되어 人材로 칭송되었다.
그 부모를 장사 지낼 때에 墓誌銘을 청해 부모의 명성이 영원히 보존되기를 꾀하니, 이는 참으로 자식의 도리를 다하는 아들이다. 墓誌銘을 지어줄 만하다.”라고 하고서 드디어 銘을 짓노라.
弘農太守는 諱가 懷仁이고, 沂州錄事參軍은 諱가 璬이고, 襄陽縣丞은 諱가 아무이다. 금년은 실로 元和 6년(811)이다.
唐荊川이 말하였다. “전편이 모두 誌文을 요구한 자의 말이고, 〈韓公은〉 다시 한 가지 일도 말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