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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韓愈(3)

당송팔대가문초 한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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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한유(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誌獨詳說經及官太學本末이라 銘亦韻折이라
貞元十八年十月十一日 太學博士施先生士丐卒하니 其寮太原郭伉買石誌其墓하고 昌黎韓愈爲之辭曰
先生明하고 通春秋左氏傳하야 善講說하니 朝之賢士大夫 從而執經者繼于門하니라
太學生習毛鄭詩春秋左氏傳者 皆其弟子 之子弟 先生之說二經하야 來太學坐諸生下하야 恐不卒得聞하니라
先生死 二經生喪其師하고 仕於學者亡其朋하니라
故自賢士大夫新進小生 聞先生之死하고 哭泣相弔하며 歸衣服貨財하니라
先生年六十九 在太學者十九年이라 由四門助敎爲太學助敎하고 由助敎爲博士하니라
太學當去로되 諸生輙拜疏乞留하니 或留或遷하야 凡十九年 不離太學하니라
祖曰旭이니 袁州宜春尉 父曰婼이니 豪州定遠丞이라 妻曰太原王氏 先先生卒하니라
子曰友直 明州鄮縣主簿 曰友諒 太廟齋郞이라
先生之祖
氏自
其後施
事孔子以彰하니라
하고
하니라
太尉之孫
始爲吳人하니라

亦載其跡이라
先生之興
是召
纂序前聞하니
于光有曜
古聖人言
其旨密微어늘
箋注하야
顚倒是非
聞先生講論이면
如客得歸리라
卑讓하고
出言이라
今其死矣
誰嗣爲宗
縣曰萬年이요
原曰神禾

先生墓耶


11. 施先生墓銘
墓誌에 유독 施先生이 경서를 강설한 것과 太學에서 거쳤던 관직의 本末만을 자세히 서술하였다. 銘文 또한 聲韻曲折이 뛰어나다.
貞元 18년(802) 10월 11일에 太學博士 施士丐 선생이 하시니, 그 同僚 太原 郭伉이 비석을 사서 〈그의 일생을 기록해〉 무덤 앞에 세우고, 昌黎 韓愈가 그를 위해 墓誌銘을 지었다.
先生은 ≪毛鄭詩(詩經)≫에 밝고 ≪春秋左氏傳≫에 정통하여 講說을 잘하였으니 조정의 어진 士大夫 중에 손에 을 들고 考疑하기 위해 찾아가는 자들이 문에 줄을 이었다.
太學生 중에 ≪毛鄭詩≫와 ≪春秋左氏傳≫을 학습한 자들은 모두 施先生의 제자이다. 貴遊家子弟들도 先生이 두 講說할 때를 기다려[] 太學으로 와서 諸生들의 뒤에 공손히 앉아서 講說을 끝까지 듣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先生逝去하자 두 을 배우는 學生들은 스승을 잃었고, 태학의 職任을 맡은 이들은 벗을 잃었다.
그러므로 어진 士大夫老師宿儒로부터 新進小生에 이르기까지 先生의 사망을 듣고는 모두 哭泣하며 弔喪하고 衣服과 재물을 보냈다.
先生은 향년이 69세이니, 太學에 재직한 기간이 19년이다. 四門助敎로부터 太學助敎가 되고 太學助敎로부터 太學博士가 되었다.
太學에 있을 때에 任期가 만료되면 응당 규정에 따라 떠나야 한다. 그러나 諸生들이 번번이 上疏留任시키기를 청원하였으므로 유임되기도 하고 승진되기도 하여 모두 19년 동안 太學을 떠나지 않았다.
祖父 袁州 宜春縣尉를 지냈고, 父親 豪州 定遠縣丞을 지냈다. 아내는 太原 王氏인데, 선생보다 먼저 죽었다.
아들 友直明州 鄮縣主簿이고 友諒太廟齋郞이다. []은 다음과 같다.
선생의 祖先
施父로부터 비롯되었다
그 뒤에 施常
孔子를 섬겨 명성이 드러났다
施讐博士가 되고
施延太尉가 되었다
太尉의 손자가
비로소 나라 사람이 되었다
朱然朱續
사적이 史傳에 실려 있다
先生起用된 것은
公車의 부름을 받아서였다
전인의 들을 모아 敍述하니
빛이 더욱 드러났다
옛 성인의 말씀은
그 뜻이 깊고 은미한데
箋注가 어지럽게 나열되어
是非가 전도되었다
그러나 선생의 강론을 들으면
마치 나그네가 〈길을 헤매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선생은 겸손하고 사양하는 마음 진지하고
말을 하면 소리가 매우 컸는데
이제 선생이 사망하셨으니
누가 선생을 이어 宗匠이 될 것인가
萬年縣
神禾原
높이 네 자 되는 무덤이
선생의 무덤이다


역주
역주1 施先生墓銘 : 이 墓誌銘은 貞元 18년(802)에 施士丐(734~802)를 위해서 지은 것이다. 施士丐는 吳郡 사람으로 ≪毛詩≫와 ≪春秋左氏傳≫에 정통한 학자였다. ≪唐語林≫에 의하면 劉禹錫이 韓愈‧柳宗元과 함께 가서 施士丐에게 詩에 대한 講說을 들었다고 한다.
역주2 毛鄭詩 : ≪詩經≫을 이른다. ≪詩經≫은 毛公이 傳을 내고, 鄭玄이 箋注를 내었기 때문에 ≪毛鄭詩≫라 한 것이다.
역주3 考疑 : 疑問을 考證함이다.
역주4 貴遊 : 官職이 없는 王公貴族인데, 일반적으로 顯貴한 가문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역주5 : 기회를 엿보아 기다림이다.
역주6 帖帖 : 공손한 모양이다.
역주7 老師宿儒 : 年老한 스승과 學德이 높은 儒者이다.
역주8 秩滿 : 任期가 만료됨이다.
역주9 : 銘의 別稱이다. 墓誌文에는 文이 있고 銘이 있는데, 銘을 ‘辭’‧‘系’‧‘頌’으로 이르기도 한다.
역주10 施父(보) : 魯나라 大夫이다. ≪春秋左氏傳≫ 桓公 9년에 보인다.
역주11 : 孔子의 제자인 施之常이다. ≪史記≫ 〈仲尼弟子列傳〉에 “施之常은 字가 子桓이다.”라고 하였다.
역주12 讐爲博士 : ≪漢書≫ 〈儒林傳〉에 “施讐는 字가 長卿인데, 宣帝 때에 博士를 지냈다.”라고 하였다.
역주13 延爲太尉 : 施延은 漢 順帝 陽嘉 2년(133) 8월에 太尉가 되었다.
역주14 曰然曰續 : ‘續’은 ‘績’이 되어야 한다. ≪三國志≫ 〈吳志〉에 “朱然은 字가 義封인데, 본래의 성은 施氏였다. 朱然의 아들은 이름이 績이고 字가 公緖이다.”라고 하였다.
역주15 公車 : 漢나라 때에는 公車(公家의 車馬)로써 科擧에 응시할 擧子들을 실어 날랐기 때문에 전의되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여기서는 施士丐가 조정의 부름을 받고 들어와 벼슬한 것을 이른다.
역주16 紛羅 : 난잡하게 나열됨이다.
역주17 肫肫 : 정성스럽고 진지함이다.
역주18 孔揚 : 孔은 매우이고, 揚은 聲音이 高大함이다.
역주19 高四尺 : 높이 4尺의 墳墓를 이른다. ≪禮記≫ 〈檀弓〉에 “孔子께서 亡母를 防(地名)에 있는 亡父의 墓에 合葬하신 뒤에 말씀하시기를 ‘내 듣건대 옛날에는 묻기만 하고 봉분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나는 사방을 周流하는 사람이니 무덤에 표지를 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고서 이에 흙을 쌓아 봉분을 만들었는데, 높이가 4尺이었다.[孔子旣合葬于防曰 吾聞之 古也墓而弗墳 今丘也 東西南北人也 不可以弗識也 于是封之 崇四尺]”라는 기록이 보인다.

당송팔대가문초 한유(3) 책은 2020.12.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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