女挐無它行이요 獨因隨昌黎赴貶所病死어늘 而昌黎摹寫其情이 悲惋可涕라
女挐
는 韓愈退之第四女也
로 惠而早死
하니라 愈之爲
에 言
요 어늘
天子謂其言不祥이라하야 斥之潮州하니 漢南海揭陽之地라
愈旣行
에 以罪人家不可留京師
라하야 迫遣之
하니라 女挐年十二
요 病在席
이라
旣驚痛與其父訣하고 又輿致走道하니 撼頓하야 失食飮節하야 死于商南層峰驛이어늘 卽瘞道南山下하니라
에 愈爲京兆
에 始令
與其姆易
하고 歸女挐之骨于河南之河陽韓氏墓葬之
하니라
女挐死는 當元和十四年二月二日이요 其發而歸는 在長慶三年十月之四日이요 其葬在十一月之十一日이라 銘曰
女挐에게는 다른 일이 없었고, 다만 貶謫된 곳으로 부임하는 昌黎를 따라가다가 病死하였을 뿐인데, 昌黎가 감정을 그려낸 것이 비통하고 한스러워 눈물이 흐를 만하다.
女挐는 나 退之의 넷째 딸로 총명하였으나 일찍 죽었다. 내가 少秋官(刑部侍郞)으로 있을 때에 “부처는 오랑캐의 귀신이고 佛法은 정치를 어지럽히는 것인데,
梁武帝는 부처를 믿었다가 끝내 侯景의 반역으로 인해 패망하였으니, 모조리 쓸어버려 다 제거해야 하고 널리 퍼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더니,
天子께서는 나의 이 말이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나를 潮州刺史로 貶斥하였으니, 潮州는 漢나라 때에 南海 揭陽 땅이었다.
내가 潮州를 향해 길을 떠나자, 有司가 罪人의 가족은 京師에 머물 수 없다 하여 핍박해 京師에서 몰아냈다. 이때 女挐는 열두 살의 나이로 병들어 자리에 누워 있었다.
이미 그 아비와의 결별도 놀랍고 슬픈데, 또 수레에 실려 길을 달리다 보니 너무 흔들려 음식도 제대로 넘기지 못하다가 商縣 남쪽 層峰驛에서 죽으니, 즉시 길 남쪽 산 아래에 묻었다.
5년 뒤에 내가 京兆尹이 되자, 비로소 자제 및 그 유모[姆]에게 명하여 棺‧衾을 바꾸게 하고서 女挐의 유골을 운반해 와서 河南 河陽의 韓氏墓域에 安葬하였다.
女挐의 사망일은 元和 14년(819) 2월 2일이고, 女挐의 무덤을 파 가지고 돌아온 날은 長慶 3년(822) 10월 4일이고, 女挐를 安葬한 날은 11월 11일이다. 銘은 다음과 같다.
네 祖宗의 葬墓 이곳에 계시니
너 이곳으로 편안히 돌아가서
영원토록 편히 지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