貞元十一年九月
에 愈如東京
할새 道
田橫墓下
하니라 感橫義高能得士
하야 因取酒以祭
하며 爲文而弔之
하니라 其辭曰
事有
百世而相感者
하니 余不自知其何心
이라 어늘 孰爲使余歔欷而不可禁
가
余旣博觀乎天下호되 曷有庶幾乎夫子之所爲아 死者不復生이니 嗟余去此其從誰아
當
하야 得一士而可王
이어늘 何五百人之
로 而不能脫夫子於劍鋩
가
苟余行之不迷면 雖顚沛其何傷가 自古死者非一이나 夫子至今有耿光이라 跽陳辭而薦酒하니 魂髣髴而來享하소서
田橫을 빌려 자기가 일생 동안 품고 있던 悲感의 뜻을 드러내었다.
貞元 11년(795) 9월에 내가 東京(洛陽)으로 갈 때 田橫의 무덤 앞을 지났다. 나는 田橫이 義가 높아서 선비를 얻은 것에 마음속 깊이 사무치는 느낌이 있어 술을 따라 그 무덤에 제사를 지내며 祭文을 지어 弔慰하였다. 그 제문은 아래와 같다.
일에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 있으니 나는 그것이 무슨 마음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세상에서 숭상하는 바가 아닌데, 어째서 나로 하여금 흐르는 눈물을 금치 못하게 하는지요?
내 이미 널리 천하를 살펴보았지만 누가 夫子의 행위와 비슷했던가요? 죽은 분은 다시 살아날 수 없지만, 아! 내가 이분을 버리고 누구를 따르겠습니까?
秦나라가
敗亂할 때에 한 선비만 얻었어도
王者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어찌하여 500인이나 〈되는 많은 선비가 있었으면서도〉
夫子를 칼날에서 벗어나게 하지 못하였단 말입니까?
孔子弟子像(부분)
아니면 夫子께서 소중하게 여겼던 선비들이 賢士가 아니었기 때문입니까? 또한 天命에 정해진 常道가 있기 때문입니까? 옛날 闕里에 선비가 많았음에도 孔子께선 오히려 “황급하여 심신이 불안하다.”고 하셨으니,
만약 내가 가는 길이 틀리지 않았다면 가다가 비록 엎어지고 자빠진들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예로부터 죽은 자가 한둘이 아니지만 夫子께선 지금까지 찬란한 빛이 있어 사람들을 비춥니다. 꿇어앉아 제문을 읽고 술을 올리오니 靈魂께서는 보일 듯 말 듯이 오셔서 흠향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