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唐宋八大家文抄 韓愈(3)

당송팔대가문초 한유(3)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당송팔대가문초 한유(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點次情事如畫하고 而語亦壯이라
公諱晉이요 字混成이니 河中虞鄕萬歲里人이라 少以明經上第하다 宣皇帝居原州 公在原州하니라
宰相以公善爲文이라하야 任翰林之選聞하니 召見하고 拜祕書省校書郞하니 入翰林爲學士하니라
三年出入左右하니 天子以爲謹愿이라하야 賜緋魚袋하고 累陞爲衛尉寺丞하다
出翰林하야 以疾辭하니 拜汾州司馬하다 崔圓爲揚州 詔以公爲圓節度判官하야 攝殿中侍御史하다
以軍事如京師朝하니 天子識之하고 拜殿中侍御史內供奉하다
由殿中爲侍御史하야 入尙書省爲主客員外郞하고 由主客爲祠部郞中하다
回紇之人來曰 唐之復土疆 取回紇力焉이라 約我爲市ㄹ새 馬旣入이로되 而歸我賄不足하니 我於使人乎取之호리라하니
涵懼不敢對하고 視公이어늘 公與之言曰 我之復土疆 爾信有力焉이라
吾非無馬로되 而與爾爲市하니 爲賜不旣多乎 爾之馬歲至 吾數皮而歸資하리라
邊吏請致詰也로되 天子念爾有勞 故下詔禁侵犯하시니라 諸戎畏我大國之爾與也하야 莫敢校焉이라
爾之父子寧而畜馬蕃者 非我誰使之아하니 於是其衆皆環公拜하다
旣又相率南面序拜하고 皆兩擧手曰 不敢復有意大國이라하다
自回紇歸하야 拜司勳郞中호되 未嘗言回紇之事하다
遷祕書少監하야 歷太府太常二寺亞卿하야 爲左金吾衛將軍하다
今上卽位하야 以大行皇帝山陵出財賦 拜太府卿하다 由太府爲左散騎常侍兼御史中丞하고 知臺事하다
選擢材俊 有威風하다 始公爲金吾 未盡一月하야 拜太府하고 九日 又爲中丞하야 朝夕入議事하니라
於是宰相請以公爲華州刺史하니 拜華州刺史潼關防禦鎭國軍使하다
加御史大夫하다 詔至于上所하니 又拜兼御史大夫宣慰恒州하다
於是朱滔自范陽以回紇之師助亂하니 人大恐하다 公旣至恒州 恒州卽日奉詔出兵與滔戰하야 大破走之하다
還至河中하다 하다 懷光所率 皆朔方兵이라 公知其謀與朱泚合也하고 患之하야
造懷光言曰 公之功 天下無與敵이요 公之過 未有聞於人하니
某至上所하야 言公之情이면 上寬明하시니 將無不赦宥焉이리라 乃能爲朱泚臣乎
彼爲臣而背其君하니 苟得志라도 於公何有리오 且公旣爲太尉矣 彼雖寵公이라도 何以加此리오
彼不能事君한대 能以臣事公乎 公能事彼ㄴ댄 而有不能事君乎
彼知天下之怒하니 朝夕戮死者也 故求其同罪而與之比 公何所利焉
公之敵彼有餘力하니 不如明告之絶하고 而起兵襲取之하야 淸宮而迎天子
庶人服而請罪有司 雖有大過라도 猶將揜焉이온 如公則誰敢議리오
語已 懷光拜曰 天賜公하사 活懷光之命이라하고 喜且泣하니 公亦泣하다
則又語其將卒如語懷光者하니 將卒呼曰 天賜公하사 活吾三軍之命이라하고 拜且泣하니 公亦泣하다
故懷光卒不與朱泚하니라 當是時하야 懷光幾不反 公氣仁하야 語若不能出口 及當事하얀 乃更이라
其詞忠하고 其容貌溫然이라 故有言於人無不信이라
明年 上復京師하사 拜左金吾衛大將軍하시다 由大金吾爲尙書左丞하고 又爲太常卿하다
由太常拜門下侍郞平章事하다 在宰相位凡五年 所奏於上前者 皆二帝三王之道
由秦漢以降未嘗言하며 退歸하얀 未嘗言所言於上者於人하니라
子弟有私問者 公曰 宰相所職 係天下하고 天下安危 宰相之能與否可見이니
欲知宰相之能與否ㄴ댄 如此視之其可 凡所謀議於上前者 不足道也라하니라 故其事卒不聞하니라
以疾病辭於上前者不記 退以表辭者八 方許之하고 拜禮部尙書하다
曰 事上盡大臣之節이라하고 又曰 一心奉公이라하시다 於是天下知公之有言於上也니라
公爲宰相時 五月朔會朝하다 天子在位하고 公卿百執事在廷이라 侍中贊하고 百僚賀하다
中書侍郞平章事竇參攝中書令하니 當傳詔로되 疾作不能事하니라
凡將大朝會 當事者旣受命 皆先日習儀 于時未有詔하니 公卿相顧하다
公逡巡進하야 北面言曰 攝中書令臣某病不能事하니 臣請代某事하노이다
於是南面宣致詔詞하고 事已復位한대 進退甚詳하니라
爲禮部四年 拜兵部尙書하다 入謝하니 上語問日晏이라 復有入謝者하니 上喜曰 董某疾且損矣라하시다
出語人曰 董公且復相이라하다 旣二日 拜東都留守判東都尙書省事하야 充東都畿汝州都防禦使兼御史大夫하고 仍爲兵部尙書하다
由留守未盡五月 拜檢校尙書左僕射同中書門下平章事汴州刺史 宣武軍節度副大使知節度事하야
管內支度營田汴宋亳潁等州觀察處置等使하다
汴州自大曆來多兵事하야 劉玄佐益其師至十萬하니라
玄佐死 子士寧代之하야 畋遊無度하니 其將李萬榮乘其畋也逐之하니라
萬榮爲節度一年 其將韓惟淸張彦林作亂하야 求殺萬榮不剋하다
三年 萬榮病風하야 昏不知事하니 其子乃復欲爲士寧之故하다
監軍使俱文珍與其將鄧惟恭執之歸京師하고 而萬榮死하다 詔未至 惟恭權軍事하다
公旣受命하고 遂行 劉宗經韋弘景韓愈實從이요 不以兵衛하니라
及鄭州 逆者不至하니 鄭州人爲公懼하고 或勸公止以待하다
有自汴州出者 言於公曰 不可入이라호되 公不對하고 遂行하야 宿圃田하다 明日 食中牟 逆者至하다
宿八角하다 明日 惟恭及諸將至하야 遂逆以入하다
及郛하니 三軍緣道讙聲하고 庶人壯者呼하고 老者泣하며 婦人啼하다 遂入以居하니라
玄佐死 吳湊代之러니 及鞏하야 聞亂歸하다 士寧萬榮皆自爲而後하니 軍士將以爲常이라
故惟恭亦有志 以公之速也 不及謀하고 遂出逆하니라 旣而私其人觀公之所爲以告한대
曰 公無爲라하니 惟恭喜하야 知公之無害己也하고 委心焉하니라
進見公者 退皆曰 公仁人也라하고 聞公言者 皆曰 公仁人也라하야 環以相告하다 故大和하니라
玄佐遇軍士厚러니 士寧懼하야 復加厚焉하고 至萬榮하야도 如士寧志하니라
及韓張亂하야 又加厚以懷之하니라 至于惟恭 每加厚焉이라
故士卒驕하야 不能禦하니 則置腹心之士幕於公庭廡下하야 挾弓執劍以須라가 日出而入이면 前者去하고
日入而出이면 後者至하다 寒暑時至 則加勞賜酒肉하니라 公至之明日 皆罷之하니 貞元十二年七月也
八月 上命汝州刺史陸長源爲御史大夫行軍司馬하고 楊凝自左司郞中爲檢校吏部郞中觀察判官하고
杜倫自前殿中侍御史爲檢校工部員外郞節度判官하고 孟叔度自殿中侍御史爲檢校金部員外郞支度營田判官하다
四方至者 歸以告其帥하니 小大威懷하야 有所疑 輙使來問하니라 有交惡者 公與平之하니라
累請朝 不許하다 及有疾 又請之하며 且曰 人心易動하고 軍旅多虞
及臣之生 計不先定이면 至於他日하야 事或難期라호되 猶不許하다 十五年二月三日 薨于位하다
上三日罷朝하고 贈太傅하시다 使吏部員外郞楊於陵來祭하고 弔其子하고 贈布帛米有加하다
公之將薨也 命其子三日斂하고 旣斂而行하라하다 於行之四日 汴州亂이라
故君子以公爲知人이라 公之薨也 汴州人歌之曰
濁流洋洋
有闢其郛
闐道讙呼
公來之初
今公之歸하야
公在喪車로다하고

又歌曰

公旣來止
東人以完터니
今公歿矣
人誰與安
始公爲華州에도 亦有惠愛ㄹ새 人思之하니라 公居處恭하야 無妾媵하고 不飮酒하며
不諂笑하고 好惡無所偏하며 與人交 泊如也하다 未嘗言兵일새 有問者하니 曰 吾志於敎化라하다
享年七十六이라 階累陞爲金紫光祿大夫 勳累陞爲上柱國이며 爵累陞爲隴西郡開國公이라
娶南陽張氏夫人하고 後娶京兆韋氏夫人하니 皆先公終하다 四子 全道溪全素澥
全道全素 皆上所賜名이라 全道爲祕書省著作郞이요
溪爲祕書省祕書郞이요 全素爲大理評事 澥爲太常寺太祝하니 皆善士 有學行하니라
謹具歷官行事狀하야 伏請牒考功하고 幷牒太常하야 議所하고 牒史館하야 請垂編錄하노라 謹狀이라
唐荊川曰 此文敍事全是學左氏하니 各一體


08. 太傅에 추증된 董公行狀
사실(실정)을 논평하고 차례에 따라 서술한 것이 그림 같고, 말 또한 雄壯하다.
董公이고 混成으로 河中 虞鄕 萬歲里 사람이다. 젊어서 明經科에 급제하였다. 宣孝皇帝( 肅宗)께서 原州에 계실 때에 董公原州에 있었다.
宰相은, 董公이 문장을 잘 짓는다고 하여 翰林選任할 것을 천자께 아뢰자, 천자께서 불러 보시고 祕書省校書郞에 제수하시니 翰林院에 들어가 學士가 되었다.
3년 동안 천자의 좌우를 출입하니, 천자께서는 董公을 성실하다고 여겨 붉은색 官服魚袋를 하사하시고 누차 승진시켜 衛尉寺丞으로 삼으셨다.
한림원에서 나와 병으로 사직하니 汾州司馬에 제수하셨다. 崔圓揚州節度使가 되었을 때에 천자께서 조서를 내려, 동공을 崔圓節度判官으로 삼아 殿中侍御史代理하게 하셨다.
군대의 일로 京師로 가서 천자께 朝見하자, 天子께서는 동공을 기억하시고서 殿中侍御史 內供奉에 제수하셨다.
代理 殿中侍御史에서 정식 侍御史가 되어 尙書省으로 들어가 主客員外郞이 되었고, 主客員外郞(6)에서 祠部郞中(5)으로 승진하였다.
先皇帝 때에 兵部侍郞 李涵可敦을 세우는 일로 回紇로 갈 때에 조서를 내려 董公에게 侍御史를 겸임시키고 자주색 官服金魚袋下賜하여 李涵判官으로 삼으셨다.
〈회흘의 牙帳에 도착하자,〉 回紇 사람이 와서 말하였다. “나라가 疆土를 수복한 것은 回紇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오. 우리와 무역을 하기로 約定하였기에 이미 말을 貴國으로 들여보냈는데, 우리에게 지불한 값이 모자라니 우리는 모자라는 액수를 使臣들에게 받아야겠소.”
李涵은 두려워 감히 대답하지 못하고 동공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동공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가 강토를 수복할 때에 참으로 그대들의 도움이 있었소.
그렇기에 우리가 말[]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그대들과 말을 교역하였으니 은혜를 베푼 것이 이미 많지 않소? 그대들이 해마다 말을 보내면 우리는 말가죽의 수를 세어서 값을 지불하였소.
변방의 官吏들은 따져 묻기를 청하였으나 天子께서는 그대들에게 공로가 있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조서를 내려 〈그대들의 나라를〉 侵犯하지 말라고 금지하셨소. 西方諸戎大國인 우리나라가 그대 나라를 돕는 것을 두려워하여 누구도 감히 그대들과 겨루려 하지 않았소.
〈그러니〉 그대 나라의 백성들이[父子] 편안히 살면서 말을 길러 번식시키게 된 것은 우리의 도움이 아니고 누구의 도움이란 말이오?” 이에 回紇 사람들은 모두 동공을 둘러싸고 절을 하였다.
이윽고 또 서로 이끌고서 남쪽(나라)을 향해 차례로 절을 하고서 모두 두 손을 들고 “감히 다시는 大國을 칠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回紇에서 돌아와 司勳郞中에 제수되었으나, 일찍이 回紇의 일을 말한 적이 없었다.
祕書少監으로 승진하여 太府寺太常寺亞卿을 거쳐 左金吾衛將軍이 되었다.
今上( 德宗)께서 즉위하시어 大行皇帝( 代宗)의 山陵을 조성하는 일로 財賦를 지출하게 되자, 동공을 太府卿에 제수하셨다. 太府를 거쳐 左散騎常侍 兼御史中丞이 되고 御史臺의 일과 三司使를 맡았다.
材俊을 선발할 때에 威風이 있었다. 당초에 동공이 金吾衛將軍이 되었을 때에 한 달도 되기 전에 太府에 제수되고, 9일 만에 또 中丞이 되어 아침저녁으로 조정에 들어가서 국사를 의논하였다.
이때 재상이 동공을 華州刺史로 삼기를 청하니, 華州刺史潼關防禦鎭國軍使에 제수하였다.
朱泚가 반란을 일으키자 〈董公의 관직을〉 御史大夫로 올려주었다. 詔書를 받고 황제가 계시는 곳으로 가니, 또 國子祭酒 兼御史大夫 恒州宣慰使에 제수하셨다.
이때 朱滔(朱泚의 동생)가 范陽으로부터 回紇의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朱泚叛亂을 도우니,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동공이 이미 恒州에 당도하자, 恒州의 군대가 즉시 조서를 받들고 出兵하여 朱滔交戰해 크게 격파하여 敗走시켰다.
朱滔를 치고서〉 돌아오다가 河中에 이르렀다. 李懷光이 반란을 일으키니 皇上께서 梁州播遷하셨다. 李懷光이 거느린 자들은 모두 北方의 군대이므로 董公은 그가 朱泚의 군대와 연합을 도모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근심하였다.
그래서 李懷光에게 가서,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天下에 대적할 자가 없고, 공의 허물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이 없으니,
내가 皇上이 계신 곳에 가서 의 사정을 말씀드리면 皇上은 너그럽고 밝으시니 아마도 용서하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朱泚의 신하가 되려 하십니까?
朱泚는 신하로서 임금을 배반한 자이니, 가령 뜻을 이룬다 해도 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게다가 은 이미 太尉가 되셨으니, 朱泚가 아무리 공을 총애한다 해도 어찌 이보다 더 높은 자리를 주겠습니까?
朱泚는 신하로서 임금도 섬기지 못했는데, 신하가 되어 을 섬기려 하겠습니까? 께서 朱泚를 섬길 수 있다면 어찌 임금님(황제)을 섬길 수 없겠습니까?
朱泚는 천하 사람이 자기에게 분노하고 있으니 머지않아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자기와 같은 죄를 지은 사람을 구하여 함께 죽으려는 것이니, 공에게 무슨 이익이 되겠습니까?
朱泚를 대적하기에 충분한 힘이 있으니, 분명히 朱泚에게 絶交를 통고하고서 군대를 일으켜 습격해 〈長安을〉 탈취하여 궁궐을 깨끗하게 청소하고서 천자를 맞이하는 것만 못합니다.
庶人의 옷을 입고서 有司에게 죄를 청하면 아무리 큰 죄가 있어도 오히려 죄를 덮어주는 법인데, 에 대해 누가 감히 비난하겠습니까?”
말을 마치자, 李懷光은 절을 하며 말하였다. “하늘이 을 주시어 나의 목숨을 살리셨다.” 기뻐하면서 눈물을 흘리니, 董公도 눈물을 흘렸다.
또 그 將卒들에게 李懷光에게 했던 것과 같은 말을 해주니, 將卒들이 말하였다. “하늘이 을 주시어 우리 3군의 목숨을 살리셨다.” 그리고는 환호하고 절하면서 눈물을 흘리니 董公도 눈물을 흘렸다.
그러므로 이회광이 끝내 朱泚와 연합하지 않은 것이다. 이때에 李懷光은 어째서[] 배반하지 않았는가? 董公은 기질이 仁厚하여 〈평소에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할 것 같았으나, 일을 당하면 말이 시원시원하고 응대가 민첩하였다.
그 말은 忠直하고 그 용모는 온화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말을 하면 믿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듬해에 皇上께서 京師로 돌아오시어 董公左金吾衛大將軍에 제수하셨다. 大金吾에서 尙書左丞이 되고 또 太常卿이 되었다.
太常卿에서 門下侍郞平章事에 제수되었다. 宰相 자리에 있는 5년 동안, 皇上 앞에서 아뢴 말은 모두 二帝三王였고,
이하의 일은 말한 적이 없었으며, 황상 앞에서 물러나 돌아와서는 황상께 말씀드린 것을 남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子弟가 사사로이 물으면 은 “宰相이 수행하는 職務天下가 매여 있고, 天下安危宰相의 유능과 무능을 가지고 알 수 있다.
宰相의 유능과 무능을 알고자 하면 이것(천하의 안위)을 보면 될 것이고, 황상 앞에서 謀議한 것들은 말할 것이 못 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자제들도〉 그 일(임금 앞에서 있었던 일)을 끝내 듣지 못하였다.
질병으로 황상 앞에서 辭職을 청한 것은 기억할 수 없으나, 물러나와 사직을 청하는 奏章을 올린 지 여덟 번 만에 비로소 允許하시고서 禮部尙書에 제수하셨다.
制書에 “임금을 섬김에 신하의 도리를 다하였다.”고 하고, 또 “한결같은 마음으로 公務를 수행하였다.”고 하였다. 이때에야 천하 사람들은 이 황상께 進言한 것이 있었음을 알았다.
당초에 이 재상이 되었을 때에 5월 초하루에 朝會가 열렸다. 천자께서는 자리에 앉아 계시고 公卿百執事들은 조정에 도열해 섰으며, 侍中贊禮하고 百僚賀禮하였다.
中書侍郞平章事 竇參中書令代理하니 당연히 詔書를 전해야 하는데 병이 나서 그 일을 수행할 수 없었다.
무릇 장차 성대한 朝會를 열려고 하면 職事를 맡은 자들은 명을 받은 뒤에 모두 하루 앞서 儀禮를 연습한다. 그런데 이때에 조서가 내려오지 않으니, 公卿들이 서로 돌아보았다.
그러자 董公이 머뭇머뭇하다가 앞으로 나가서 북쪽을 향해 “中書令을 대리하는 아무개가 병이 나서 일을 수행할 수 없으니 신이 아무개의 일을 대신하기를 청하옵니다.”라고 하고서,
이에 남쪽을 향해 詔書를 선포하였다. 일을 마치고는 자리로 돌아갔는데, 나아가고 물러가는 태도가 매우 愼重[]하였다.
禮部尙書로 있은 지 4년 만에 兵部尙書에 제수되었다. 들어가 謝恩하니, 황상께서 날이 저물 때까지 말씀하기도 하고 묻기도 하셨다. 〈공이 물러나온 뒤에 다른 사람이〉 다시 들어가 謝恩하니 황상께서 기뻐하시면서 “ 아무의 병이 거의 나았다.”고 하셨다.
〈그러자 그 사람이〉 나와서 사람들에게 “董公이 장차 다시 재상이 될 것이네.”라고 하였다. 그런지 이틀 뒤에 東都留守 判東都尙書省事에 제수되어 東都畿州汝州都防禦使 兼御史大夫를 담당[]하고 兵部尙書도 그대로 맡았다.
留守가 된 지 다섯 달도 되지 않아 다시 檢校尙書左僕射 同中書門下平章事 汴州刺史 宣武軍節度副大使 知節度事에 제수되어
管內支度使營田使汴州宋州亳州潁州 등의 觀察使處置使 등을 맡았다.
汴州에는 大曆(766~779) 이래로 전쟁이 많아서 劉玄佐가 군사를 늘린 것이 10만에 이르렀다.
劉玄佐가 죽자 아들 劉士寧이 아비를 대신해 〈절도사가 되었는데〉 사냥에 빠져 절제가 없으니, 그 手下將帥 李萬榮이 그가 사냥 나간 기회를 이용해 그를 축출하고서 〈스스로 節度使가 되었다.〉
李萬榮이 절도사가 된 지 1년이 되던 해에 그 수하의 장수 韓惟淸張彦林이 반란을 일으켜 이만영을 殺害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3년째 되던 해에 李萬榮風病에 걸려 정신을 잃어 의식이 없자, 그 아들 李乃가 다시 전에 劉士寧이 했던 것처럼 〈아비를 대신해 절도사가〉 되고자 하였다.
그러자 監軍使 俱文珍李萬榮 수하의 장수 鄧惟恭과 함께 李乃를 잡아서 京師로 보냈고, 李萬榮은 죽었다. 〈後任 節度使 任命에 관한〉 詔書가 내려오기 전에 鄧惟恭이 임시로 군대의 일을 맡아보았다.
董公이 명을 받고는 드디어 汴州를 향해 길을 떠날 때, 劉宗經韋弘景, 그리고 나 韓愈만이 실로 董公을 따랐고, 兵士들로 호위시키지 않았다.
鄭州에 이르렀을 때에 마중을 와야 할 자들이 오지 않으니, 鄭州 사람들은 董公을 위해 두려워하였고, 어떤 자는 동공에게 머물러 기다리라고 권하기도 하였다.
汴州에서 나온 자가 동공에게 “들어가면 안 됩니다.”라고 하였으나, 공은 대답도 하지 않고 드디어 길을 떠나 圃田城에서 묵고, 이튿날 〈30리를 가서〉 中牟에서 식사를 하는데, 마중꾼들이 왔다.
〈식사를 마친 뒤에 40리를 가서〉 八角鎭에서 묵었다. 이튿날 鄧惟恭諸將들이 와서 마침내 동공을 영접해 汴州城으로 들어갔다.
外城에 당도하니 三軍은 길에 늘어서서 환호하였고, 백성들 중에 건장한 자들은 환호하고 늙은이들은 눈물을 짓고 婦人들은 울었다. 드디어 변주로 들어가서 거처하였다.
당초 劉玄佐가 죽었을 때에 吳湊가 그 後任者로 제수되었는데, 鞏縣에 이르렀을 때 汴州에 변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되돌아갔다. 劉士寧李萬榮이 모두 스스로 節度使가 된 뒤에 조정의 除命을 받았으니, 군사들은 아마도 이를 당연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러므로 鄧惟恭도 그런 뜻을 가졌으나, 동공이 빨리 왔기 때문에 미처 변란을 꾀하지 못하고 드디어 나아가서 영접한 것이다. 이윽고 鄧惟恭은 은밀히 자기 사람에게 董公이 하는 일을 감시해 보고하게 하였는데,
그 사람이 “동공은 하는 일이 없습니다.”라고 보고하니, 鄧惟恭은 기뻐하면서 董公이 자기를 해칠 마음이 없음을 알고 마음을 기울였다.
나가서 동공을 만나본 자들은 물러나와서 모두 “仁人이시다.”라고 하고, 의 말을 들은 자들도 모두 “仁人이시다.”라고 하면서, 돌려가며 서로에게 일러주었다. 그러므로 크게 화목하였다.
당초에 劉玄佐軍士를 후대하였는데, 劉士寧은 〈군사들이 자기를 따르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더욱더 후대하였다. 李萬榮에 이르러서도 그 뜻이 劉士寧과 같았다.
韓惟淸張彦林이 반란을 일으킴에 미쳐서는 더욱더 후대하여 회유하였다. 鄧惟恭에 이르기까지 그 대우가 매양 점점 더 후해졌다.
그러므로 사졸들이 교만해져서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종전의 절도사들은〉 公堂의 회랑에 심복들의 막사를 설치하고서 활과 을 들고서 기다리다가 해가 뜰 때 들어가면 전에 들어갔던 자가 돌아가고,
해가 질 때 나오면 뒷사람이 들어가게 하였다. 그리고 추울 때와 더울 때가 되면 노고를 치하하고 위로하여 술과 고기를 주었다. 그런데 董公은 부임한 다음날에 모두 혁파하였으니, 때는 貞元 12년(796) 7월 17일이었다.
8월에 황상께서 汝州刺史 陸長源을 임명하여 御史大夫 行軍司馬로 삼고, 楊凝左司郞中에서 檢校吏部郞中 觀察判官으로 옮겨 임명하고,
杜倫 殿中侍御史에서 檢校工部員外郞 節度判官으로 옮겨 임명하고, 孟叔度殿中侍御史에서 檢校金部員外郞 支度營田判官으로 옮겨 임명하였다.
그러자 各官職務가 다스려지고 민간의 풍속이 변화하여, 嘉禾가 생기고 흰 까치가 모여왔으며, 蒼烏가 와서 둥지를 틀고 한 꼭지에 여러 개의 외가 달렸다.
嘉禾圖嘉禾圖
사방에서 온 자들이 저희들의 로 돌아가서 저희의 節度使에게 〈이런 사실을〉 고하니, 크고 작은 의 절도사들이 존경하고 복종하여 의심되는 일이 있으면 번번이 使者를 보내어 자문하였다. 서로 미워하는 州郡이 있으면 董公이 그들을 화해시켰다.
누차 조정에 辭職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으셨다. 질병이 있음에 미쳐 또 사직을 청하면서 “사람의 마음은 흔들리기 쉽고 군대의 일은 근심스러움이 많으니,
이 살았을 때에 미리 계획을 정하지 않으면 후일에 일이 혹 기약하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되, 여전히 윤허하지 않으셨다. 貞元 15년(799) 2월 3일에 官位에서 薨逝하셨다.
皇上께서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시고, 太傅에 추증하셨다. 그리고 吏部員外郞 楊於陵使者로 보내어 致祭하고 그 아들을 弔慰하고서 布帛米穀을 가외로 주게 하셨다.
臨終할 때에 그 아들에게 “3일 만에 하고 을 마치면 즉시 運柩해 떠나라.”고 명하였다. 떠난 지 4일 만에 汴州變亂이 일어났다.
그러므로 君子知人(人事에 달통한 사람)으로 여겼다. 薨逝하자, 汴州 사람들이 아래와 같이 노래하였다.
흐린 물 가득했던 것은
공께서 외성을 뚫을 때였고
사람들 길 메우고 환호한 것은
공께서 처음 오실 때였지
이제 공께서 돌아가셔서
공께서는 상여에 계시네

또 아래와 같이 노래하였다.

공께서 와서 머무신 뒤로
동쪽 사람들 보전되었는데
이제 공께서 사망하셨으니
그 누구와 함께 편히 살리오
과거에 華州刺史로 있을 때에도 은혜와 사랑을 베풀었기 때문에 〈지금도〉 사람들이 그리워하고 있다. 은 거처할 때에 공손하여 을 두지 않았고 술을 마시지 않았으며,
남에게 잘 보이려고 억지웃음을 짓지 않았고, 좋아하는 사람이라 하여 치우치게 좋아함도, 미워하는 사람이라 하여 치우치게 미워함도 없었으며, 사람들과 사귐에는 덤덤하였다. 일찍이 兵事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기에 어떤 사람이 물으니, 공은 “나의 뜻은 敎化에 있다.”고 하였다.
향년은 76세이다. 품계는 누차 승진하여 金紫光祿大夫에 이르렀고, 勳品도 누차 올라 上柱國에 이르렀으며, 爵位도 누차 올라 隴西郡開國公에 이르렀다.
初娶夫人南陽 張氏이고, 後娶夫人京兆 韋氏인데, 두 분 모두 보다 먼저 사망하였다. 아들 넷을 두었는데, 全道全素이다.
全道全素는 모두 황상께서 지어주신 이름이다. 全道祕書省著作郞이고,
祕書省祕書郞이며, 全素大理評事이고, 太常寺太祝이다. 이들은 모두 착한 선비로 학문과 德行이 있다.
삼가 역임한 관직과 행적을 적은 行狀을 갖추어 考功呈牒하고, 아울러 太常呈牒하여 를 의논해 결정해주기를 청하고, 史館呈牒하여 사책에 기록해 후세에 전하기를 청합니다. 삼가 행장을 올립니다.
唐荊川이 말하였다. “이 문장의 敍事는 오로지 ≪春秋左氏傳≫의 文體를 배운 것이다. 그러나 董公에 대한 글은 頓挫(문장에 기복이 있고 성조가 잘 어울림)하고, 權公에 대한 글은 調勻(조화됨)하니 각각 하나의 文體이다.”


역주
역주1 贈太傅董公行狀 : 貞元 15년(799)에 董晉(724~799)을 위해 지은 行狀이다. 본래 제목은 〈故金紫光祿大夫檢校尙書左僕射同中書門下平章事兼汴州刺史充宣武軍節度副大使知節度事管內支度營田汴宋亳潁等州觀察處置等使上柱國隴西郡開國公贈太傅董公行狀〉인데, 간단하게 줄여서 〈贈太傅董公行狀〉이라고 하였다.
行狀은 死者의 世系‧名字‧官爵‧鄕里‧行誼‧治績‧年壽 등을 기록하는 일종의 文體인데, 대체로 死者의 門人이나 故吏나 친구가 짓는다. 그 목적은 考功이나 太常에 보내어 諡號를 議定하게 하거나, 혹은 史館에 보내어 編錄하게 하는 데 있다.
역주2 先皇帝時……爲涵判官 : 先皇帝는 唐 代宗을 가리킨다. 代宗 大曆 4년(769)에 僕固懷恩의 딸을 崇徽公主에 冊封하여 回紇의 可汗(극한)에게 시집보낼 때에 兵部侍郞 李涵을 파견해 護送하게 하니, 李涵이 董晉을 判官으로 삼기를 奏請하였다. 可敦(극돈)은 古代에 鮮卑‧柔然‧突厥‧回紇‧蒙古 등에서 可汗의 아내에 대한 칭호이다.
역주3 三司使 : 御史中丞‧中書舍人‧給事中을 이른다. ≪唐會要≫에 “大曆 14년(779) 6월 3일에 勅令을 내려 御史中丞 董晉‧中書舍人 薛播‧給事中 劉乃宜를 三司使에 充任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역주4 朱泚之亂 : 唐 德宗 建中 4년(783)에 涇原軍이 長安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朱泚가 그 기회를 이용해 唐을 배반하고 스스로 皇帝를 칭한 변란을 이른다.
역주5 國子祭(좨)酒 : 朱泚가 京師에서 逆亂을 일으키고서 逆黨 仇敬과 何望之 등을 시켜 華州를 침공하자, 董晉이 行在所로 도망가니 황제가 동진을 국자좨주에 제수하였다.
역주6 李懷光反 上如梁州 : 興元 원년(784) 2월에 李懷光에게 太尉를 加官하고 鐵券을 하사하니, 李懷光은 심하게 노하며 “대체로 人臣이 배반하면 鐵券을 준다. 그런데 지금 나에게 철권을 주니, 이는 나로 하여금 배반하게 하는 것이 틀림없다.”라고 하고서 그 철권을 땅에 던져버렸다. 李懷光은 자신의 처지를 불안하게 여겨 “내 이제 朱泚와 연합할 것이니 車駕(황제)는 마땅히 引避해야 할 것이다.”라고 선언하니, 德宗이 급히 梁州로 播遷하였다.(≪舊唐書≫ 〈李懷光傳〉)
역주7 疎亮捷給 : 말이 시원시원하고 應對가 민첩함이다.
역주8 : 制書로, 황제의 명령이다.
역주9 嘉禾生……嘉瓜同蔕聯實 : 古人들은 이런 것들을 모두 祥瑞의 조짐으로 여겼다. 嘉禾는 하나의 줄기에 여러 개의 이삭이 달린 벼를 이르는데, ≪書經≫ 〈微子之命〉에 “周 成王 때에 唐叔의 食邑에 嘉禾가 났다.”고 하였다. 白鵲은 흰 까치인데, ≪舊唐書≫ 〈五行志〉에 “貞觀 初年에 흰 까치가 宮殿 앞 회나무에 둥지를 틀었다.”고 하였다. 蒼烏는 푸른 까마귀인데, ≪宋書≫ 〈符瑞 中〉에 “大明 원년(457)에 푸른 까마귀가 襄陽에 出現하였다.”고 하였다. 嘉瓜는 하나의 꼭지에 여러 개가 달린 외[瓜]인데, ≪宋書≫ 〈符瑞 下〉에 “漢 章帝 때에 郡國에 嘉瓜가 났다.”고 하였다. 唐나라 德宗과 憲宗 때는 藩鎭의 跋扈로 사회가 매우 혼란한 때였으니, 과연 상서를 예시하는 이런 물건들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唐宋八大家文鈔 校注集評≫에 “이 行狀은 董晉을 위해 지은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董晉이 이런 것들을 믿었기 때문에 드러낸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한유가 이런 것들을 瑞物로 여긴 것이 아니라 단지 董晉의 생각을 말한 것뿐이다.
역주10 : 董晉의 諡號는 恭惠이다.
역주11 董公文頓挫 權公文調勻 : 董公文은 韓愈가 지은 〈贈太傅董公行狀〉을 이른 듯하고, 權公文은 韓愈가 지은 〈唐故相權公墓碑〉(본서 권12)를 이른 듯하다.

당송팔대가문초 한유(3) 책은 2020.12.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