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 在太原者爲姬姓
이라 春秋時王子成父敗狄有功
으로 因賜氏
러니 厥後世居太原
하니라
至東漢隱士烈하야 博士徵不就하고 居祁縣하니 因號所居鄕爲君子라하니라
公其君子鄕人也
라 魏晉涉隋
에 世有名人
이라 國朝大王父玄暕
이 하야 止尙書郞
하니라
生景肅하니 守三郡하고 終傅涼王하니라 生政하니 襄鄧等州防禦使鄂州採訪使贈吏部尙書하니라
公은 尙書之第某子라 公諱仲舒요 字弘中이라 少孤하야 奉母夫人家江南하니라
貞元初
에 하야 與陽城合遏裴延齡不得爲相
하니라 德宗初怏怏無奈
나 久而嘉之
하다
其後入閣에 德宗顧列謂宰相曰 第幾人은 必王某也라하더니 果然이라
月餘에 特改右補闕이라가 遷禮部考功吏部三員外郞하니라 在禮部에 奏議詳雅하니 省中伏其能하니라
在考功吏部
에 하니 吏無以欺
하니라 同列有恃恩自得者
러니 衆皆媚承
이나 公嫉其爲人
하야 不直視
하니라
하니라 移夔州司馬
라가 又移荊南
이러니 因佐其節度事
하야 爲參謀
하야 得五品服
하니 在外積四年
이라
元和初에 收拾俊賢할새 徵拜吏部員外郞하고 未幾에 爲職方郞中知制誥하니라
由是出爲峽州刺史라가 轉廬州하니라 未至에 丁母夫人憂하니라 服除에 又爲婺州하니라
時疫旱甚하야 人死亡且盡이러니 公至하야 多方救活하니라 天遂雨하고 疫定하야 比數年里閭完復하니라
出巡
에 人塡道迎顯公德
하니라 事具聞
에 就加金紫
하니라
轉蘇州하야 變其屋居以絶火延하고 隄松江路하야 害絶阻滯하니라
秋夏賦調에 自爲書與人以期하야 吏無及門而集하니 政成爲天下守之最하다
天子曰 王某之
하니 最宜爲
요 有古風
하니 豈可久以吏事役之
리오하고 復拜中書舍人
하다
旣至京師하니 儕流無在者하고 視同列皆邈然少年이라 益自悲하야 而謂人曰 豈可復治筆硯於其間哉아
上若未棄臣인댄 宜用所長이라 在外久하야 周知俗之利病하니 俾治之면 當不自愧리라
人遭水旱하여 賦窘하니 公曰 我且減燕樂하고 絶他用錢이면 可足乎인저하고 遂以代之하니라
罷軍之息錢
하고 禁
하며 壞其舍以葺公宇
하니 三年
에 法大成
하야 錢餘於庫
하고 粟餘於廩
하야
人享于田廬
하고 謳謡於道途
하니라 天子復思
하야 且
하야 虛吏部左丞位以待之
하니라
長慶三年十一月十七日에 薨於洪州하니 年六十二라 上哀慟輟朝하고 贈左散騎常侍하다 某日歸葬於某處라
某旣以公之德刻而藏之墓矣라 子初又請詩以揭之하다 詞曰
生人之治
는 本乎
이어늘 有事其末
하고 而忘其源
이라 切近昧陋
면 道由是堙
이라
有志其本이면
而泥古陳하고
當用而迂하면
乖戾不伸이라
較是二者면
其過也均이라
有美王公
은 志儒之本
하고 達士之經
하야 하고 이라
韡爲華英
이로되 不矜不盈
이라孰播其馨
이며 孰發其明
가 而居
하니 士友以傾
이라
敷文帝階하야
擢列侍從이라
以忠遠名하야
有直有諷이라
辨遏堅懇하니
巨邪不用이라
秀出班行하니
乃動帝目이라
帝省竭心하야
恩顧日渥이라
不比于權하고
以直友寃이라가
敲撼挫揠하야
竟遭斥奔이라
久淹于外하야
歷守大藩이라
所至極思하야
必悉利病이라
萎枯以膏하고
燠暍以醒이라
坦之敞之하야
必絶其徑하고
浚之澄之하야
使安其泳이라
帝思其文하사
復命掌誥하니
公潛謂人호되
此職宜少니
豈無凋郡하야
庸以自效아
上藉其實
하야 俾統于洪
이라 逋滯攸除
하니 姦訛革風
이라 祛蔽于目
하고 釋負于躬
이라 하야 禁絶浮屠
라
風雨順易하야
秔稻盈疇라
人得其所하야
乃恬乃謳라
化成有代
는 思以息勞
라 虛位而竢
러니 奄忽滔滔
라 維德維績
을 志于斯石
하니 遠彌高
리라
王氏는 모두 王者의 後裔이니 太原에 사는 자들은 본래 姬姓이었다. 春秋時代에 王子 成父가 赤狄을 敗退시킨 공이 있음으로 인해 ‘王’을 氏로 하사받았는데, 그 후손이 대대로 太原에 살았다.
東漢 때에 이르러 隱士 王烈을 博士로 徵召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祁縣에 거주하니 사람들이 그가 사는 마을을 일러 ‘君子鄕’이라 하였다.
王公은 군자향 사람이다.
魏‧
晉으로부터
隋나라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著名한 사람이 있었다.
唐나라에 들어와서 공의
大王父(
曾祖)
王玄暕이
三院에 속한
御史를 역임하였는데, 관직이
尙書郞에 그쳤다.
王仲舒
왕현간이 王景肅을 낳았는데, 세 고을의 郡守를 지내고 涼王의 師傅로 벼슬을 마쳤다. 왕경숙이 王政을 낳았는데, 襄州와 鄧州 등의 防禦使‧鄂州採訪使를 지내고 吏部尙書에 추증되었다.
公은 尙書(王政)의 몇째 아들이다. 공은 휘가 仲舒이고 자가 弘中이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어 母夫人을 모시고 江南에서 살았다.
글을 읽고 문장을 지으니 그 명성이 성대하여 당시의 名公들이 모두 官位나 輩行을 낮추고서 벗이 되기를 원하였다.
貞元 초년에 과거에 응시하여[射策] 左拾遺에 제수되어, 陽城과 협력하여 裴延齡이 재상이 되지 못하도록 막았다. 德宗께서 처음에는 매우 불평스러워하셨으나 오랜 뒤에는 가상하게 여기셨다.
그 뒤 공이 內閣에 들어갔을 때에 德宗께서 반열을 돌아보며 재상에게 “몇 번째의 사람은 반드시 왕 아무개일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과연 그러하였다.
달포 뒤에 특별히 공을 右補闕에 제수하였다가 禮部‧考功‧吏部 등 세 部의 員外郞으로 승진시키셨다. 공이 禮部에 있을 적에는 올린 奏議가 자상하고 정당하니 온 省中이 그 재능에 탄복하였다.
考功과 吏部에 있을 적에는 規約을 提示하고 故事(前例)를 밝히니 胥吏들이 속일 수 없었다. 同列(동료) 중에 皇恩을 믿고서 우쭐대는 자가 있었는데, 百官[衆]들은 모두 아첨해 그자의 비위를 맞추었으나, 공은 그자의 사람됨을 미워해 똑바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로 인해 連州司戶로 左遷되었다. 夔州司馬로 옮겼다가 또 荊南으로 옮겼는데, 荊南節度使의 일을 도움으로 인해 參謀가 되어 5品服을 받았으니, 外職으로 떠돈 지 4년 만이었다.
元和 초년에 才德이 뛰어난 人才를 모을 때에 공을 불러 吏部員外郞에 제수하였고, 얼마 되지 않아 職方郞中 知制誥에 임명하였다.
왕공의 벗이 죄를 얻어 축출된 뒤로는 그 집안의 친척이나 知人들도 그 집 앞을 지날 적이면 목을 움츠리고 감히 바라보지도 못하였는데, 왕공은 홀로 가서 형편과 안부를 물었으며, 벗을 위해 계획하고 논의하여 벗의 억울함을 풀어주었다.
이로 인해 外職으로 나가 峽州刺史가 되었다가 廬州刺史로 轉職되었는데, 부임하기 전에 母親喪을 당하였다. 喪期를 마친 뒤에 또 婺州刺史에 임명되었다.
이때 疫病과 가뭄이 심하여 사람들이 거의 다 죽게 되었는데, 왕공은 부임하자마자 여러 방법으로 救活하였다. 드디어 비가 내리고 역병도 진정되어 몇 년 전에 비해 민간의 생활이 완전히 회복되었다.
황제의 使者가 巡視를 나오자, 사람들이 길을 가득 메울 정도로 많이 나와서 사자를 맞이해 왕공의 功德을 칭송하였다. 사자가 이 일을 구체적으로 아뢰니, 황제께서는 즉시 공에게 추가로 金紫의 官位를 내리셨다.
蘇州刺史로 옮겨가서는 家屋의 형태를 변경하여 불이 번지는 것을 끊고, 松江에 제방을 쌓아 길을 만들어서 길이 막혀 생기는 피해를 없앴다.
가을과 여름에 부세를 징수할 때에는 직접 문서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기한을 정해주어, 官吏가 찾아가지 않아도 백성이 스스로 와서 바치게 하니, 政事의 성적이 천하의 刺史 중에 으뜸이었다.
天子께서 말씀하기를 “王某의 문장은 뜻이 깊으면서도 通暢하니 誥文에 가장 적합하고, 古人의 풍모가 있으니 어찌 오래도록 吏事(政事)로써 부려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시고서, 다시 中書舍人에 제수하셨다.
王公이 京師에 와서 보니, 같은 또래는 하나도 없고, 同列(동료)을 보니 모두 까마득한 소년들이었으므로 더욱 슬퍼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어찌 다시 저들 사이에서 문장을 지을 수 있겠는가.
皇上께서 만약 臣을 버리지 않으신다면 신의 장점을 쓰심이 마땅하다. 신은 外職에 있은 지 오래여서 세속의 利害를 잘 아니, 신으로 하여금 외직을 다스리게 하신다면 응당 스스로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재상이 이 말을 황상께 아뢰어, 마침내 江南西道觀察使가 되었다. 〈왕공은 관찰사로 부임해서〉 榷酤錢 9천만을 면제할 것을 奏請하였다.
軍錢의 이자놀이가 끝이 없어서, 이를 맡아 관리하던 吏胥가 〈息錢 50만을 잃은 罪에 걸려〉 家産을 다 내놓았으나 여전히 변상하기에 부족하여 감옥에 갇혀 있었다. 왕공은 부임하자마자 項鎖와 足鎖를 풀어주고 더 이상 죄를 묻지 않았다.
백성들이 水災와 旱災를 만나 徵稅가 곤란해지자, 왕공은 말하기를 “내 장차 연회를 줄이고 다른 비용을 없앨 것이니 그러면 충분할 것이다.”라고 하고서, 마침내 그 돈(절약한 돈)으로 〈세수의 부족분을〉 대신 채웠다.
軍의 息錢을 없애고, 승려가 거짓말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을 금지하고, 그들의 집(佛舍)을 허물어다가 公館의 지붕을 이었다. 〈이렇게 한 지〉 3년 만에 법이 크게 이루어져서 창고에는 돈이 남아돌고 곳간에는 곡식이 남아돌아,
사람들은 田舍에서 풍요를 누리고 길에서 〈왕공의 덕을〉 노래하였다. 천자께서는 다시 왕공을 그리워하시어, 다른 사람을 王公 대신 江西로 보내고 공을 부르시면서 吏部左丞의 자리를 비워놓고 기다리셨다.
長慶 3년(823) 11월 17일에 洪州에서 薨逝하시니 향년이 62세셨다. 황상께서 애통해하시어 정무를 정지하시고[輟朝] 左散騎常侍에 추증하셨다. 아무 날에 아무 곳에 歸葬하였다.
아무개가 이미 공의 공덕을 비석에 새겨 무덤에 묻었는데, 아들 王初가 또 詩를 청하여 공의 명성을 드러내었다. 詩는 다음과 같다.
사람을 다스림에는
禮樂이 근본인데
말단만을 일삼고
그 근본을 잊는다네
가까운 일에 어둡고 고루하면
道가 이로 인해 막힌다네
그렇다고 근본에만 뜻을 두면
진부한 옛것에 빠지기 쉽고
써야 할 때에 우활하면 어그러져 펴지 못하리 이 두 가지 비교해보면 그 과오 서로 같네
아름다운 왕공은
儒學의 근본에 뜻을 두고
선비의 원칙에 통달하여
순서 따라 점진하여 학문을 쌓았고
함축하고 存養하였네
활짝 피어 꽃 아름다웠지만
뽐내지도 자만하지도 않았네
누가 그 향기 퍼뜨렸으며
누가 그 총명 발산하였나
올곧게 살아가니
벗들이 사모하네
황제의 궁중에서 문장을 짓더니
뽑히어 시종의 반열에 들어갔네
충성으로 이름 멀리 퍼져
直諫도 하고 諷諫도 하였네
변론해 막고 굳게 간청하였네
크게 간사한 자 쓰지 말라고
반열에서 빼어나니
황제께서 주목하셨네
황제께서 마음 다함을 살피시어
내리시는 은총 나날이 두터웠네
郞署에선 날개를 폈고
禁密에선 지위가 높이 올랐네
表發한 황제의 명령이
예스럽고 성대하였네
權臣에 빌붙지 않고서
벗의 억울함 풀어주려다가
맞고 흔들리고 꺾이고 뽑히어
끝내는 배척해 내쫓김 당하셨네
오랫동안 외직에 있으면서
큰 藩鎭들 두루 지키셨네
부임한 곳마다 깊이 생각하여
반드시 利害를 자세히 아셨네
시들고 마른 자에겐 단비 같은 은택 입히고
더위에 상한 자에겐 물을 주어 깨워주셨네
평탄하고 드넓게 하여
반드시 지름길 막으셨고
준설해 맑게 해서
편안히 수영하게 하였네
황제께서 공의 문장 생각하시어
다시 知制誥에 임명하시니
공은 은밀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 직책은 젊은이에게 합당하니
어찌 곤궁한 郡縣에 등용하여
힘을 다하게 하지 않으시는가
황상께서 실적을 상고하시고
洪州를 다스리게 하셨네
체납된 세금을 없애니
간사한 풍속이 변하였네
눈을 가리는 것들 제거하고
몸에서 짐을 벗어놓으셨네
관할지역에 올바른 방향을 일러주고
佛法을 금지해 막으셨네
바람과 비가 순조로워서
벼들이 이랑에 가득하네
사람들 즐겁게 생활하면서
평안에 젖어 노래불렀네
교화 이루어지자 다른 이를 대신 보내신 것은
괴로운 일에서 쉬게 하려는 생각이셨네
左丞의 자리 비워놓고 기다리셨는데
공은 서둘러 먼 길 떠나셨구려
덕행과 공적을
이 돌에 기록하니
세월이 멀어질수록 더욱 높아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