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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1)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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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今國家 亦合採而酌行之
右臣伏以
史者國家之典法也 自君臣善惡功過與其百事之廢置可以垂勸戒示後世者 皆得直書而不隱이라
故自前世 有國者莫不以史職爲重이라
伏見國朝之史 以宰相監修하며 學士修撰하고 又以하며之士當升擢者하야 乃命修하니 如此不爲不重矣
然近年以來 員具而職廢하야 其所撰述 簡略遺漏하야 百不存一하고 至於事關大體者하얀 皆沒而不書하니 此實史官之罪而臣之責也
然其弊在於修撰之官 惟據諸司供報하고 而不敢書所見聞故也
今時政記 雖是兩府臣寮修纂이라 然聖君言動 有所宣諭 臣下奏議 事關得失者 皆不하고 惟書之類하며 至於起居注亦然하야 與諸司供報公文無異하고 修撰官只據此詮次하고 繫以月日하야 謂之日曆而已
是以 朝廷之事 史官雖欲書而不得書也
自古人君 皆不自閱史어늘 今撰述旣成 必録本進呈하니 則事有諱避 史官雖欲書而又不可得也
加以日曆時政記起居注 例皆承前하야 積滯相因이라
故纂錄者常務追修累年前事 而歲月旣遠 遺失莫存하고
至於事在目今하야 可以詳於見聞者하야도 又以追修積滯하야 不暇及之하니 若不革其弊 則前後相因하야 史官永無擧職之時하야 使聖朝典法으로 遂成廢墜矣
臣竊聞自初僣叛 至復稱臣 始終一宗事節 皆不曾書라하고
亦聞修撰官甚欲紀述이라하니 以修纂後時 追求莫得故也
其於他事 又可知焉이라
臣今欲乞特詔修時政記起居注之臣하야 竝以德音宣諭臣下奏對之語書之하고 其修撰官不得依前只據諸司供報編次陳目辭見이요 竝須考驗事實하고
其除某官者以某功 如狄靑等 之類 其貶某職者坐某罪 如昨來 近日之類 事有文據及迹狀明白者 皆備書之 所以使聖朝賞罰之典으로 可以勸善懲惡昭示後世
若大臣用情하야 朝廷賞罰不當者 亦得以書爲警戒 此國家置史之本意也
至於其他大事하얀 竝許史院據所聞見書之하되 如聞見未詳者 直牒諸處會問 及臣寮公議異同朝廷裁置處分 竝書之하소서
已上事節 竝令修撰官하야 逐時旋據所得하야 錄爲草卷하야 標題月分하고 於史院躬親入櫃封鎖하고 候諸司供報齊足하야 修爲日曆하고
仍乞每至歲終하야 命監修宰相하여 親至史院하야 點檢修撰官紀錄事迹하야 內有不勤其事隳官失職者어든 奏行責罰하소서
其時政記起居注日曆等 除今日以前積滯者不住追修外 截自今後 竝令次月供報하야 如稍遲滯어든 許修撰官自至中書樞密院催請하고 其諸司供報拖延及史院有所會問 諸處不畫時報應하야 致妨修纂者 其當行하고
竝許史院牒開封府勾追嚴斷其日曆時政記起居注하며 竝乞更不進本하소서
所貴少修史職하야 上存聖朝典法이니
此乃臣之職事 不敢不言하노이다
謹具狀奏聞하고 伏候勅旨하노이다


04. 사관史館일력日曆을 논한
오늘날 국가에서도 응당 채택하여 적절히 시행해야 한다.
신은 엎드려 아룁니다.
역사란 것은 국가의 전법典法이니, 군신君臣선악善惡공과功過와 온갖 일의 시행과 폐지 중 권계勸戒를 남겨 후세에 보일 만한 것들을 모두 사실대로 정직하게 쓰고 숨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난 세상 때부터 국가를 소유한 분은 사직史職을 중시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삼가 보건대 국조國朝의 역사는 재상으로써 감수監修하고 학사學士로써 수찬修撰하고 또 양부兩府의 신하로써 시정기時政記를 편찬하고 삼관三館의 선비들 중 응당 승진될 사람을 가려뽑아서 기거주起居注를 편수하게 하였으니, 이와 같이 신중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근년 이래로 관원官員은 구비되었으나 직책은 폐지되어 그 찬술한 바가 간략하고 누락되어 백에 하나도 보존되지 못하였고, 일이 국가의 대체大體에 관계되는 것에 이르러서는 모두 인몰湮沒하고 쓰지 않았으니, 이는 실로 사관의 죄이고 신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그 폐단은 수찬하는 신하가 오직 각 부서에서 보고하는 기록에만 근거하고 자기가 보고 들은 바를 감히 기록하지 못한 까닭에 있습니다.
지금 시정기時政記는 비록 양부兩府의 신료들이 편수하지만 성군聖君이 언동으로 선유宣諭하신 것과 신하의 주의奏議 중 일이 득실得失에 관계되는 것들을 모두 기록하지 않고, 오직 제목除目사견辭見 같은 것들만 기록하였으며, 기거주起居注에 이르러서도 그러하여 각 부서에게 보고하는 공문과 다름없고 수찬관修撰官은 단지 이에 의거하여 정리 서술하고 월일月日을 붙여서 일력日曆이라고 말할 뿐입니다.
이런 까닭에 조정의 일을 사관들이 비록 기록하고자 해도 기록할 수 없습니다.
예로부터 임금은 모두 사서史書를 보지 않았는데 지금은 찬술이 이루어지면 반드시 베껴 쓴 것을 바치게 하니, 피휘避諱해야 할 일이 있으면 사관들이 비록 쓰고자 해도 쓸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일력‧시정기‧기거주 모두 으레 종전의 기록을 그대로 물려받아 적체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찬록纂錄하는 이들이 늘 몇 해 전의 일을 뒤미쳐 편수하느라 애쓰고 있으나 세월이 이미 오래 지난 뒤라 기록을 유실하여 보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현재에 있는 일로써 상세히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조차도 적체된 기록을 뒤미쳐 정리하느라 미처 기록할 겨를이 없으니, 만약 그 폐단을 고치지 않는다면 전후로 이어져서 사관은 영영 봉직奉職할 때가 없어 우리 성조聖朝전법典法을 마침내 폐추시키게 될 것입니다.
신은 삼가 듣건대 조원호趙元昊가 처음 반역하고부터 다시 칭신稱臣할 때까지 시종 한 가지 사실을 모두 일치감치 기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듣건대 수찬관이 몹시 기술하고 싶어 한다고 하니, 수찬이 때 늦으면 뒤미쳐 사실을 찾아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일에서 있어서 어떠하리란 것을 또 알 만합니다.
신은 지금 바라건대 시정기와 기거주를 편수하는 신하에게 특별히 명을 내려 폐하의 덕음德音으로 선유宣諭하시고 신하들이 주대奏對한 말을 모두 기록하며, 수찬관修撰官은 종전처럼 단지 각 부서에서 보고한 바에만 의거하여 제목除目사견辭見을 편집해 수록하지 말고 모두 사실이 맞는지 조사하게 하소서.
그리고 무슨 공로로써 아무 관직에 제수된 것으로 예컨대 적청狄靑 등이 농지고儂智高를 무찌르고 문언박文彦博 등이 왕칙王則을 무찌른 것과 같은 경우와, 무슨 죄에 걸려 아무 관직에서 좌천된 것으로 예컨대 근래 인주麟州수장守將병주幷州방적龐籍백초평白草平의 일로 죄를 받은 것과 근자에 손면孫沔범법犯法하여 죄를 받은 것 같은 경우로, 그 일에 증거로 삼을 글과 행적이 명백한 것은 모두 갖추어 기록하게 해야 할 것이니, 이는 성조聖朝상벌賞罰의 법으로 권선징악勸善懲惡을 후세에 밝게 보일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대신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일을 처리해 조정의 상벌이 합당하지 못한 경우도 기록하여 경계로 삼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니, 이것이 국가가 사관을 둔 본의입니다.
기타 국가의 큰일에 이르러서도 모두 사원史院에서 보고 들은 대로 기록하되 보고 들은 바가 상세하지 않은 경우에는 직접 찾아가 사실을 물어서 기록한 것과 신료들의 공의公議가 서로 다르거나 조정이 재량해서 처분한 것을 모두 기록할 수 있도록 허락하소서.
이상의 사안을 모두 수찬관修撰官으로 하여금 수시로 입수한 바대로 기록하여 초본을 만들고 월분月分을 표기하게 한 다음, 사원史院에서 직접 궤짝에 넣어서 봉쇄하고 각 부서에서 보고가 나란히 들어오기를 기다려 이를 편수하여 일력을 만들게 하소서.
이어서 바라건대 매년 연말에 이르러 감수監修하는 재상으로 하여금 친히 사원에 가서 수찬관이 기록한 사적을 점검하여 그 안에 자기 일에 근면하지 않아 관직을 소홀히 수행한 자가 있으면 주청하여 책벌責罰하게 하소서.
그 시정기‧기거주‧일력 등은 금일 이전까지 적체되어 뒤미쳐 편수하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 단연코 지금 이후로는 모두 다음 달에 보고하게 하되, 만약 조금 지체되면 수찬관修纂官을 시켜 직접 중서성中書省추밀원樞密院에 가서 독촉하게 하고, 각 부서의 보고가 늦어지거나 사원史院에서 회문會問할 것이 있는 경우와 각처에서 제때에 맞춰 보고하지 않아 수찬修纂에 차질을 빚게 하는 경우는 모두 수분手分을 행하도록 허락하소서.
아울러 사원이 개봉부開封府에 공문을 보내 그 일력‧시정기‧기거주를 조사하여 엄단嚴斷하도록 허락하시고, 아울러 바라옵건대 이들이 다시는 기록한 사본을 바치지 못하게 하소서.
중요한 것은 사직史職을 조금 정비하여 위로 성조聖朝의 전법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의 직사職事라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삼가 을 갖추어 아뢰고 엎드려 칙지勅旨를 기다립니다.


역주
역주1 論史館日曆狀 : 이 글은 仁宗 嘉祐 4년(1059)에 지어진 것이다. 日曆은 士官이 日記에 따라 조정의 政事를 기록한 책자이다. 宋나라 제도에 역사를 편수하기 전에 먼저 일력을 편수하였다.
역주2 兩府之臣撰時政記 : 兩府는 中書省과 樞密院 두 기관을 가리킨다. 이 두 기관이 조정의 文‧武 두 權柄을 나누어 장악하기 때문에 양부라 한다. 時政記는 재상이 매일 조정에서 奏對한 말을 기록한 것으로 역사 기록의 근거가 된다.
역주3 三館 : 宋나라 때 昭文館, 史館, 集賢殿의 합칭이다.
역주4 起居注 : 송나라 때 門下省에 起居郞, 中書省에 起舍人 한 명씩을 두어서 천자의 언동을 기록하게 하여 그 기록한 것을 起居注라 하였다.
역주5 記錄 : 本集에는 ‘紀錄’으로 되어 있다.
역주6 除目辭見(현) : 除目은 임금이 임명하고 면직하는 관리의 명단이다. 辭見은 내직의 관원이 외직으로 나갈 때나 지방관이 도성에 올 때 조정에서 천자를 알현하는 것이다.
역주7 : 현
역주8 趙元昊 : 本書 권1 〈通進司上皇帝書〉 題下註 참조.
역주9 破儂智高 : 狄靑은 宋 仁宗 때의 명장이다. 皇祐 3년(1051) 무렵에 廣源州의 오랑캐 儂智高가 반란을 일으키자 적청이 자원해 출전하여 적의 의표를 찌르는 공격을 하여 대승을 거두고 돌아와 樞密使에 제수되었다. 《宋史 狄靑傳》
역주10 文彦博等破王則 : 文彦博은 汾州 介休 사람으로 字는 寬夫이고 대신의 지위에 올랐고 潞國公에 봉해졌다. 王則은 仁宗 때 河北 土兵의 수령으로 慶曆 7년(1047)에 군사를 일으켜 知州 張一得을 생포하고 건국하여 국호를 安陽이라 하고 연호를 得聖이라 하였다. 그 이듬해 明鎬와 문언박이 대군을 거느리고 가서 성을 포위하여 공격하니, 왕칙이 포위를 뚫고 村舍로 도망쳤다가 사로잡혀 京師로 압송되었다.
역주11 麟州守將及幷州龐籍緣白草平事 : 麟州는 송나라 때 河東路에 속하고 治所는 新秦에 있었으며, 幷州는 河東路에 속하고 치소는 陽谷에 있었다. 龐籍은 자는 醇之이고 單州 成武 사람이다. 皇祐 3년에 재상이 되었고 황우 5년에 파면되어 知鄆州가 되었다. 麟州에서 白草平에 성채를 쌓는 것을 마음대로 허락했고 州의 장수 武戡 등이 西夏 사람에게 패전했다는 이유로 죄를 받았다가, 嘉祐 2년(1056)에 다시 觀門殿大學士 戶部侍郞 知靑州가 되었다.
역주12 孫沔所坐 : 孫沔은 자가 元規이고 會稽 사람이다. 天禧 연간(1017~1021)에 進士가 되었고 재주와 용맹은 뛰어났으나 성품이 방탕하여 연회와 여색을 좋아했다. 《宋史》 〈孫沔傳〉에 “諫官 吳及과 御史 沈起가 손면은 방종하고 行檢이 없어 杭州와 幷州의 知事로 있을 때 不法을 자행했다고 보고하여 壽州로 좌천되었다.” 한 것이 이를 가리킨다.
역주13 手分 : 송나라 때 州縣에서 고용해서 쓰는 일종의 差役이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1) 책은 2024.01.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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