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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2)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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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句句校勘絶佳之作이라
仰報恩榮 實增震慄이라
竊以校讐之職 是正爲難이니 하고 折群疑於獨見이라
簡編多前後之乖하니之一篇 文章有合離之異
以仲尼之博學으로하니이면 孰知이리오
況乃 備帝者之來臨이요 非人間之所見이니 自匪識窮元本하고 學漸淵源하야 究百世之放紛하고 總群言而博達이면 則何以하고 리오
如脩者 器惟庸妄하고 族本이라 雖出逢千載之期 而生有百罹之苦
而著錄 最後諸生하니 敢希一目이리오
徒以浸潤之代하고 優游敎育之仁이로되
過時之年堅而難入이요 少作可悔하니以無功이라
以決科하고而補吏
逮親而得斗祿하니 雖慰於子心이나 斂版以揖上官 遂成於俗狀이라
學久矣而將落하고 思兀然而欲枯하니 進無取當塗之資하고 退已
歲月其忽 徒有志於分陰이요 英俊竝遊 方問途而孤進이라
內顧拙艱之若此하니 敢懷榮遇以爲心
豈期天幸之來 特被柄臣之薦
敢辱知人之美리오
蒙曲造之幷容하야而善擇이라
顧蕪庸之末學 已屢試於有司하니 能盡於是矣어늘 其可再乎
固無可喜之文이어늘 過辱太優之等하야 하니
一進階而可榮 何勝於睿渥이리오
而聞命 深服於訓辭
天闕乍趨 迷目睛而眩轉하고 深敞
恣窺之書하고 坐費之膳하니 內循忝據 有溢情涯
此蓋伏遇 獎物均私하고 樂材推美
圓方有範하니 大陶冶以하고 高下不欺하니 正權衡而輕重이라
閔此庸懦하야 曲以甄收하니 誓堅하고 永荷丘山之賜


21. 교감校勘을 맡은 데 사례하는
구절마다 교감해서 쓴 매우 좋은 작품이다.
우러러 은총의 영광에 보답하려니 실로 더욱 마음이 떨리고 두렵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교감校勘을 맡은 직책은 그야말로 어려우니, 선본善本을 통하여 서책을 자세히 살피고 개인의 견해로 많은 의심스런 곳들을 판단해야 합니다.
책을 묶은 끈이 끊어짐에 간편簡編이 전후로 많이 어긋났으니, 〈반경盤庚〉 한 편은 모두 문장에 착간錯簡이 있습니다.
중니仲尼의 박학함으로도 ‘곽공郭公’이란 대목을 미심쩍은 상태로 남겨두었으니, 경전을 부지런히 연구한 원개元凱(杜預)가 아니라면, ‘문왕門王’이 자가 된 줄 뉘라서 알았겠습니까.
더구나 서곤西崑책부冊府는 제왕이 드나드는 곳이고, 봉래蓬萊선산仙山은 인간세상에서 볼 수 없는 곳이니, 식견은 근원을 궁구窮究하고 학문은 연원淵源을 거슬러 올라 백세百世의 복잡한 역사를 꿰뚫고 많은 기록을 두루 통달한 사람이 아니면, 어떻게 천록각天祿閣에서 벼슬하여 청려장靑藜杖을 대하고 저술을 하며, 우릉羽陵에서 서책을 안고서 좀벌레를 털어내고 읽을 수 있겠습니까.
같은 자는, 자질은 용렬하고 종족은 한미寒微하여 천추에 드문 좋은 시대를 만났으나 살아가면서 온갖 고난을 겪었습니다.
국학國學에 들어와 명부名簿에 이름을 올린 것이 제생諸生들 중에서 가장 늦었으니, 인물을 품평하는 자리에서 한 번 보아주기를 감히 바랄 수 있었겠습니까.
한갓 문명한 시대의 덕택에 젖어들고, 교육의 인덕에 한가로이 노닐었습니다.
그렇지만 공부할 때를 지난 나이라 이미 배워도 공부가 진보하기 어렵고, 소싯적에 지은 글들은 후회할 만하니 조충전각雕蟲篆刻과 같아 아무런 공효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일찍이 훌륭한 인재들 틈에 끼어서 과거를 보았고 이내 관복을 입고 관리에 임용되었습니다.
어머님께서 살아 계실 때 적은 녹봉이나마 받게 되었으니 비록 자식의 마음에 위안은 되지만, 수판手版[笏]을 쥐고 상관에게 을 하다 보니 마침내 속리俗吏의 모습이 되고 말았습니다.
학문은 세월이 오래 지남에 수준이 낮아지고 문사文思는 멍청히 앉아 있노라면 고갈되려 하니, 나아가서는 당로자當路者에게 인정받을 자질이 없고 물러나서는 옛날의 공부도 이미 잃었습니다.
세월은 덧없이 흐르니 한갓 촌음寸陰을 아낄 생각은 있지만, 영재英才들과 함께 노닐면서 바야흐로 길을 물어 홀로 나아갔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둔하기가 이와 같으니, 감히 영광스런 지우知遇를 입을 마음을 먹겠습니까.
그런데 천행天幸이 와서 특별히 중신重臣의 추천을 받을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감히 사람을 알아보시는 감식안을 욕되게 한 것이리오.
아마도 동류同類들에 섞여서 함께 뽑혀 올라간 것일 터입니다.
그런데 신을 보살펴 아울러 포용해주시어 서적을 살펴보고 교감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돌아보건대 이 거칠고 비루한 학식이 이미 유사有司에 의해 누차 시험을 받았으니 보잘것없는 재능을 이미 여기서 다했거늘, 연도鉛刀와 같은 무딘 재능을 다시 써서야 되겠습니까.
진실로 좋아할 만한 문장이 없는데 너무도 과분한 우대를 해주시어 빈객의 자리로부터 서림書林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한 번 품계가 올라 영광스러우니, 성상의 은총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세 번 절하고 명을 들음에 그 내용에 감복하였습니다.
대궐에 들어가자 눈이 휘둥그레져 어지러웠고, 운대芸臺는 깊고 넓어 성신星辰이 빛나는 하늘에 가까웠습니다.
이에 금궤金匱의 서책을 맘껏 보고 태관太官의 요리를 앉아서 먹으니, 돌이켜보면 과분한 자리가 실정에 넘치는 것입니다.
이는 대개 소문상공昭文相公께서 사람들을 장려하여 고루 은덕을 베풀고 인재를 좋아하여 장려해주신 덕분입니다.
모나고 둥근 모양에 법도가 있으니 큰 도공陶工은 이로써 질그릇을 만들고, 무게에 따라 오르고 내림을 속이지 않으니 저울추를 바르게 하여 무게를 재는 격입니다.
그래서 이 용렬한 자를 불쌍히 여겨 잘 보아서 선발해주셨으니, 몸을 바쳐 충성할 것을 굳게 맹서하고 산악山嶽처럼 큰 은혜에 길이 감사할 것입니다.


역주
역주1 謝校勘啓 : 이 글은 景祐 원년(1034)에 쓴 것이다. 이때 歐陽脩는 王曙의 추천으로 召命을 받고 조정에 들어가 學士院의 試官이 되었다. 학사원은 翰林學士院이다. 시관은 宋나라 때 있었던 제도로, 정식으로 임명되기 전에 임시로 맡는 벼슬로 오늘날의 임시직과 비슷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 宣德郞에 제수되었고, 大理評事 兼監察御使가 되었고, 鎭南君節度使掌書記‧館閣校勘이 되어 三館秘閣藏書總目을 편찬하는 일에 참여하였으니, 이때 편찬한 책이 《崇文總目》이다. 그래서 이 啓를 지어 사은한 것이다.
역주2 委方冊於程文 : 程文은 전범이 되는 문장 또는 서적으로, 善本에 해당하는 것이다. 즉 간행할 서책을 선본이 되는 글과 대조하는 교감 작업을, 程文에다 서책을 맡긴다고 한 것이다. 木簡에 쓴 것을 方이라 하고, 竹簡에 쓴 것을 冊이라 한다.
역주3 絢組之三寸 : 책을 묶는 끈을 말한다. 《禮記》 〈玉藻〉에 “거사는 비단 띠를 띠고 제자들은 흰 명주 띠를 띠는데, 모두 매듭을 묶음에 3寸의 실끈을 쓴다.[居士錦帶 弟子縞帶 幷紐約用組三寸]”라고 하였다.
역주4 盤庚 : 《書經》의 편명으로, 殷나라 임금 盤庚이 백성들에게 고한 글이다. 내용이 난삽하여 해독하기 어렵기로 정평이 났다. 그래서 韓愈의 〈進學解〉에 “周나라의 誥와 殷나라의 〈盤庚〉은 난삽하여 읽기 어렵다.[周誥殷盤 佶屈聱牙]”라고 하였다.
역주5 存郭公以示疑 : 孔子가 썼다는 《春秋》에서 莊公 24년 조의 經文에 “郭公”이라는 두 글자만 있는데, 誤字 또는 闕文이 있어 통하지 않게 되어 있다. 즉 공자도 종전의 기록에서 이 부분을 확실히 알 수 없어 미심쩍은 상태로 남겨두었다는 것이다.
역주6 元凱之勤經 : 元凱는 晉나라 杜預의 자이다. 그는 박학다식하였고 《春秋左氏傳》에 注를 내었다. 두예가 늘 王濟는 말을 좋아하는 馬癖이 있고, 和嶠는 돈을 좋아하는 錢癖이 있다고 하기에, 晉 武帝가 두예에게 “경은 무슨 벽이 있는가?”라고 물으니, 두예가 “신은 《左氏傳》을 좋아하는 左氏傳癖이 있습니다.”라고 했다 한다. 《晉書 권34 杜預列傳》
역주7 門王而爲閏 : ‘門王’의 王은 五의 오자이거나 歐陽脩가 잘못 알았던 것 같다. 《春秋左氏傳》 襄公 9년 조에 “二月癸亥 門其三門 閏月戊寅 濟於陰阪 侵鄭”이란 대목이 있는데, 두예가 《春秋長曆》이란 曆書로 추산해보고 “이해에는 閏月 戊寅이 있을 수 없고, 戊寅은 12월 20일이니, 윤월은 아마도 ‘門五日’이 되어야 할 듯하다. 五자가 위로 門자와 합하여 閏자가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春秋長曆》은 두예의 저술로, 曆法으로 천백 년 동안의 月, 日, 朔, 閏을 추산해낸 것이다. 《左氏傳杜林合注 권26》
역주8 西崑冊府 : 西崑은 서방에 있는 崑崙山, 群玉山을 가리키는 말인데, 고대 제왕들이 서책을 보관했던 곳이라 한다. 唐나라 上官儀의 〈爲朝臣賀涼州瑞石表〉에 “제왕들의 秘錄을 상세히 보려고 서곤에서 책부를 연다.[詳觀帝籙 披冊府於西崑]”라고 하였다. 冊府는 서책을 보관한 창고, 즉 藏書閣이다. 여기서는 궁중의 장서각을 비유하였다.
역주9 蓬萊道山 : 道山은 仙山의 이칭이다. 궁중의 秘書를 관장하는 秘書省 또는 秘書監을 선산인 봉래산에 비겨 蓬萊閣이라 불렀다. 唐나라 杜甫의 〈秋日寄題鄭監湖上亭〉에 “잠시 봉래각에 머물렀고, 마침내 강호의 사람이 되었네.[暫阻蓬萊閣 終爲江海人]”라고 하였다.
역주10 效官天祿 對靑藜而屬書 : 漢 成帝 말년에 劉向이 매일 밤늦도록 天祿閣에서 서책을 교열하고 있었는데, 黃衣를 입은 노인이 靑藜杖을 짚고 찾아와서 지팡이 끝에다 불을 일으켜 어두운 방을 밝히고는 洪範五行 등 古文을 전수해 주었다는 전설이 있다. 《拾遺記 권6》
天祿閣은 한나라 궁중의 장서각으로 未央宮에 있었다.
역주11 抱簡羽陵 拂白蟫(담)而辨蠹(두) : 궁중의 장서각에서 오래된 古書를 읽는다는 뜻이다. 《穆天子傳》에 周 穆王이 八駿馬를 타고 동쪽으로 巡視하는 얘기를 하면서 “羽陵에서 좀 먹는 책을 볕에 쬐었다.[蠹書于羽陵]”는 말이 있다. 白蟫은 좀벌레이다.
역주12 : 기
역주13 橋門 : 둥근 연못 중앙에 세운 辟雍의 네 문으로 통하는 네 개의 다리이다. 즉 國學을 뜻한다.
역주14 月旦之坐評 : 月旦의 품평이란, 後漢의 高士 許劭는 그의 從兄인 許靖과 함께 당세에 명성이 있었는데, 두 사람이 인물 품평을 좋아하여 늘 고을 인물들을 논평하면서 매월 초하루마다 그 品題를 바꾸었던 데서 온 말이다. 月旦評이라 한다. 《後漢書 권68 許劭列傳》
역주15 聲(名)[明] : 원문은 본래 ‘聲名’으로 되어 있는데, 本集에는 ‘聲明’으로 되어 있다. 문리로 보아 ‘聲明’이 맞는다고 판단되어 고쳤다. 聲明은 聲敎와 文明의 병칭으로 교화가 널리 퍼져 문명한 시대를 뜻한다.
역주16 : 한
역주17 雕刻 : 雕蟲篆刻의 준말이다. 조충전각이란, 본래 아이들이 곤충 모양 따위를 새기는 것을 말하는데, 글을 지을 때 한갓 아름답게 수식하는 데만 힘쓰는 것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漢나라 揚雄이 《法言》에서 자신이 젊을 때 지은 글을 조충전각이라 하면서 “장부는 할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歐陽脩가 젊을 때 騈儷文을 지은 것을 가리킨다.
역주18 濫吹 : 무능하면서 벼슬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春秋時代 齊 宣王이 竽라는 악기 연주하는 소리를 좋아하여 연주할 때마다 300명이 함께 악기를 불었다. 南郭處士란 사람은 이 악기를 잘 불지도 못하면서 악사들 속에 섞여서 높은 녹봉을 받아먹다가, 선왕이 죽은 뒤에 湣王이 즉위하여 악사들에게 한 사람씩 악기를 연주하게 하자 도망쳤다고 한다. 《韓非子 內儲說 上》
역주19 釋巾 : 평민이 쓰는 두건을 벗고 관을 쓰는 것으로, 처음 관직에 나감을 뜻한다.
역주20 失故時之步 : 燕나라 壽陵에 사는 소년이 趙나라의 수도 邯鄲에 가서 3년 동안 품위 있는 걸음걸이를 배웠지만 제대로 못 배우고, 예전에 수릉에서 걷던 걸음걸이마저 잊어서 마침내 엉금엉금 기어서 돌아갔다고 한다. 《莊子 秋水》
역주21 敢辱知人之美 蓋因連茹而陞 : 歐陽脩 자신을 인재로 잘못 알고 뽑은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뽑힐 때 함께 끼어서 뽑혔다는 뜻이다. ‘知人’은 인재를 알아봄을 뜻하는 말로, 禹임금이 皐陶에게 “인재를 알면 지혜가 밝은 것이니 능히 사람을 관직에 맡길 수 있다.[知人則哲 能官人]” 한 데서 온 말이다. 《書經 皐陶謨》
‘連茹’는 《周易》 泰卦에 “初九는 엉켜 있는 띠풀의 뿌리를 뽑는 것이라 동류들과 함께 가는 것이니, 길하다.[初九 拔茅茹 以其彙征 吉]”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역주22 考言 : 말한 바를 살펴보는 것으로 《書經》 〈舜典〉에서 “일을 도모하고 말을 상고한다.[詢事考言]” 한 데서 온 말이다. 여기서는 서적들의 내용을 살펴보는 것을 말한다.
역주23 碩鼯(오)之有五 : 碩鼯는 碩鼠와 같은 말이다. 쓸모없는 재능을 뜻하는 말로 자신의 재능을 겸사로 말한 것이다. 漢나라 蔡邕의 〈勸學篇〉에 “큰 쥐가 다섯 가지 능력이 있으나, 한 가지 기량도 이루지 못한다.[碩鼠五能 不成一伎]”라고 하였다.
역주24 鉛刀之堪一割 : 後漢의 班超가 “옛날에 魏絳은 열국의 대부였는데도 여러 융족들을 안정시킬 수 있었습니다. 하물며 신은 大漢의 위엄을 받들고 가는 터에 무딘 칼로 한 번 베는 쓸모도 없겠습니까.[昔魏絳列國大夫 尙能和輯諸戎 況臣奉大漢之威 而無鉛刀一割之用乎]”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後漢書 권77 班超傳》
역주25 俾從賓席 入預書林 : 賓席은 하급관리인 幕僚의 자리이다. 歐陽脩가 원래 西京留守의 推官으로 있다가 校勘의 직책을 맡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書林은 서적이 수풀처럼 많다는 말로 藏書閣을 뜻한다. 《東觀漢記》 〈和帝紀〉에 “친히 東觀에 거둥하여 書林을 둘러보고 서적을 열람했다.[親幸東觀 覽書林 閱篇籍]”라고 하였다.
역주26 下拜 : 《春秋左氏傳》 僖公 9년 조에 “제후가 장차 하배하다.[齊侯將下拜]” 한 데서 온 말로, 본래는 正殿의 兩楹 앞 섬돌 아래에서 황제를 향해 절하는 것이다.
역주27 芸臺 : 궁중의 도서를 관장하는 부서인 秘書省의 이칭이다.
역주28 近星象以昭回 : 건물이 커서 하늘 높이 솟았음을 비유한 것이다. 《詩經》 〈大雅 雲漢〉에 “밝은 저 은하수는, 하늘을 따라 그 빛이 도네.[倬彼雲漢 昭回于天]”라 하였다.
역주29 金匱 : 石室과 병칭되어 궁중의 藏書閣을 뜻한다. 石室金匱란, 돌로 지은 집과 금으로 만든 상자라는 뜻으로, 원래 漢나라 궁중의 장서각을 뜻하는 말이다. 司馬遷의 《史記》 권130 〈太史公自序〉에 “太史令이 되어서 석실금궤의 책을 뽑아 읽었다.”라고 하였다.
역주30 太官 : 漢나라 때 황제의 식사와 연회의 음식을 맡는 벼슬이다.
역주31 昭文相公 : 당시 재상으로 있던 呂夷簡(979~1044)을 가리킨다. 여이간이 昭文館學士를 역임했으므로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역주32 : 선
역주33 頂踵之誠 : 몸을 바쳐서 충성하겠다는 뜻이다. 頂踵은 摩頂放踵의 준말이다. 孟子가 “楊子는 자신만 위할 줄 알았으니 자신의 터럭 하나를 뽑아서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더라도 하지 않았으며, 墨子는 兼愛하니 자신의 정수리로부터 갈아서 발꿈치까지 이르더라도 천하에 이로우면 하였다.[楊子取爲我 拔一毛而利天下 不爲也 墨子兼愛 摩頂放踵利天下 爲之]”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盡心 上》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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