衆人之說이 如彼하고 君子之說이 如此하면 則捨衆人而從君子라
君子之說이 如彼하고 聖人之說이 如此하면 則捨君子而從聖人이라
若公羊高穀梁赤左丘明三子者
는 博學而多聞矣
로되 其
不能無失者也
라
孔子之於
과 三子之於傳
에 有所不同
이면 則學者寧捨經而從傳
하고 不信孔子而信三子
하니 甚哉其惑也
여
經於魯隱公之事
에 書曰
이라하고 其卒也
에 書曰
이라하고 孔子始終謂之公
하고
學者不從孔子하야 信爲趙盾하고 而從三子하야 信爲趙穿하고
其於許悼公之事
에 孔子
는 書曰
라하고 三子者
는 曰非弑之也
라
買病死而止不嘗藥耳라하야늘 學者不從孔子하야 信爲弑君하고 而從三子하야 信爲不嘗藥하니 其捨經而從傳者는 何哉오
經簡而直하고 傳新而奇하니 簡直은 無悅耳之言하고 新奇는 多可喜之論이라
然信於孔子而篤者也니 經之所書는 予所信也요 經所不言은 予不知也라
夫三子者는 皆學乎聖人이요 而傳은 所以述經也니 經文隱而意深이어늘 三子者從而發之라
國君必卽位어늘 而隱不書卽位하니 此傳得知其攝也요
弑君者는 不復見經하고 而盾復見經하니 此傳得知弑君非盾也요
君弑에 賊不討면 則不書葬이어늘 而許悼公書葬하니 此傳得知世子止之非實弑也라
經文隱矣어늘 傳曲而暢之하니 學者以謂三子之說이 聖人之深意也라
使學者必信乎三子인댄 予不能奪이어니와 使其惟是之求인댄 則予不得不爲之辨이라호라
불행하게도 세월이 오래 흐른 뒤에 두 종류의 설說이 전해지는 경우가 있다면 어느 것을 따라야 하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믿을 만한 것을 알아서 따르겠는가?
말한 사람의 덕행德行과 명망名望에 의거하여 그의 설說을 믿어야 한다.
중인衆人의 설이 저와 같고 군자君子의 설이 이와 같다면 중인을 버리고 군자를 따른다.
군자는 널리 배워 견문見聞이 많으나 군자가 전하는 설에도 잘못이 없을 수 없다.
군자君子의 설이 저와 같고 성인聖人의 설이 이와 같다면 군자를 버리고 성인을 따른다.
이는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인데 《춘추春秋》를 배우는 자들만은 이와 다르다.
공자孔子는 성인聖人이니 만세토록 이 한 사람이 믿음을 받았을 뿐이다.
공양고公羊高, 곡량적穀梁赤, 좌구명左丘明 세 사람으로 말하자면 널리 배워 견문이 많았지만, 그들이 기록한 전傳에 잘못이 없을 수 없다.
그런데 공자가 기록한 경經과 세 사람이 기록한 전傳에 다른 점이 있으면, 배우는 자들은 차라리 경經을 버리고 전傳을 따르며, 공자를 믿지 않고 세 사람을 믿으니, 심하도다. 그 미혹됨이여!
경經에 노魯 은공隱公의 일에 대해 “공公과 주의보邾儀父가 멸蔑에서 회맹會盟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은공이 죽었을 때 “공公이 훙薨하였다.”라고 기록하여 공자孔子는 시종 ‘공公’이라 하였고,
세 사람은 “정식으로 즉위卽位한 것이 아니라 섭행攝行한 것이기 때문에 ‘공公’이라 부를 수 없다.”라고 하였는데,
배우는 자들이 공자를 따라 ‘공公’이라 하지 않고 세 사람을 따라 ‘섭행攝行하였다.’라고 하였다.
또 진晉 영공靈公의 일에 대해 공자는 “조돈趙盾이 자기 임금 이고夷皐를 시해하였다.”라고 기록하였고,
세 사람은 “임금을 시해한 자가 조돈趙盾이 아니라 조천趙穿이다.”라고 하였는데,
배우는 자들이 공자를 따라 임금을 시해한 자가 ‘조돈趙盾’이라고 믿지 않고 세 사람을 따라 ‘조천趙穿’이라고 믿었다.
또 허許 도공悼公의 일에 대해 공자는 “허許나라의 세자世子 지止가 자기 임금 매買를 시해하였다.”라고 기록하였고, 세 사람은 “허나라의 세자 지가 자기 임금 매買를 시해한 것이 아니다.
매買는 병들어 죽은 것이고 지止는 약藥을 맛보지 않았을 뿐이다.”라고 하였는데, 배우는 자들이 공자를 따라 ‘임금을 시해하였다.’라고 믿지 않고 세 사람을 따라 ‘약을 맛보지 않았다.’라고 믿었으니, 경經을 버리고 전傳을 따른 것은 무엇 때문인가?
경經은 간직簡直하고 전傳은 신기新奇하니, 간직簡直한 것은 듣기 좋은 말이 없고 신기新奇한 것은 기뻐할 만한 의논이 많다.
이러므로 배우는 자들이 듣기를 좋아하고 미혹되기 쉽다.
내가 감히 “미혹되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공자孔子를 독실하게 믿는 자이니, 경經에 기록된 것은 내가 믿는 바이고 경經에 말하지 않은 것은 내가 모르는 바이다.
변론하는 자가 말하기를 “그대의 말은 마음에 감발하는 바가 있어서 그렇게 이르는 것일 뿐이다.
세 사람은 모두 성인聖人에게 배웠고 전傳은 경經의 내용을 서술한 글이니, 경經은 글이 은미하고 뜻이 깊은데 세 사람이 이에 의거하여 의미를 밝혀낸 것이다.
그러므로 경經에 말하지 않은 것을 전傳에서 상세히 말한 것이니, 두 가지 설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경에 기록하지 않은 바를 세 사람이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변론하는 자가 대답하기를 “전후前後의 사실을 유추하여 알았고 전하는 말을 듣고서 알았다.
《춘추春秋》에서는 국군國君에 대해 반드시 즉위卽位 사실을 기록하는데 노魯 은공隱公에 대해서는 ‘즉위卽位’라고 기록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전傳에서 섭정攝政임을 알았던 까닭이다.
또 임금을 시해한 자는 다시 경經에 드러내지 않는데 조돈趙盾의 경우 〈‘선공宣公 6년 봄에 진晉나라 조돈趙盾과 위衛나라 손면孫免이 진陳나라를 습격하였다.’라고〉 다시 경經에 드러났으니, 이것이 전傳에서 임금을 시해한 자가 조돈趙盾이 아님을 알았던 까닭이다.
또 임금이 시해를 당하였을 때 적賊을 토벌하지 않았으면 장사 지낸 사실을 기록하지 않는데 허許 도공悼公의 경우 〈‘겨울에 허許 도공悼公을 장사 지냈다.’라고〉 장사 지낸 사실을 기록하였으니, 이것이 전傳에서 세자世子 지止가 실제로 시해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던 까닭이다.
경經의 기록이 은미한데 전傳에서 곡진하게 드러내었기에 배우는 자들이 세 사람의 설說이 성인의 깊은 뜻이라고 여겼다.
이러므로 세 사람의 설을 따랐을 뿐이지 공자를 버리고 세 사람을 믿은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그렇다면 망령되이 성인의 뜻을 짐작하여, 배우는 자들을 미혹되게 하는 것이 세 사람의 허물일 뿐이다.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반드시 세 사람의 설을 믿게 하려 한다면 내가 어쩔 수 없지만, 그들이 진실만을 구하게 하려 한다면 나는 변론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