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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2)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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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이라
事有不幸出於久遠而傳乎二說이면 則奚從
曰從其一之可信者
然則安知可信者而從之
曰從其人而信之 可也
衆人之說 如彼하고 君子之說 如此하면 則捨衆人而從君子
君子博學而多聞矣 然其傳不能無失也
君子之說 如彼하고 聖人之說 如此하면 則捨君子而從聖人이라
此擧世之人皆知其然이어늘 而學春秋者獨異乎是
孔子 聖人也 萬世取信一人而已
若公羊高穀梁赤左丘明三子者 博學而多聞矣로되不能無失者也
孔子之於 三子之於傳 有所不同이면 則學者寧捨經而從傳하고 不信孔子而信三子하니 甚哉其惑也
經於魯隱公之事 書曰이라하고 其卒也 書曰이라하고 孔子始終謂之公하고
三子者 曰非公也 是攝也라하야늘
學者不從孔子謂之公하고 而從三子謂之攝하고
其於晉靈公之事 孔子 書曰라하야늘
三子者曰非趙盾也 是趙穿也라하야늘
學者不從孔子하야 信爲趙盾하고 而從三子하야 信爲趙穿하고
其於許悼公之事 孔子 書曰라하고 三子者 曰非弑之也
買病死而止不嘗藥耳라하야늘 學者不從孔子하야 信爲弑君하고 而從三子하야 信爲不嘗藥하니 其捨經而從傳者 何哉
經簡而直하고 傳新而奇하니 簡直 無悅耳之言하고 新奇 多可喜之論이라
是以 學者樂聞而易惑也
予非敢曰不惑이나
然信於孔子而篤者也 經之所書 予所信也 經所不言 予不知也
難者曰 子之言 有激而云爾
夫三子者 皆學乎聖人이요 而傳 所以述經也 經文隱而意深이어늘 三子者從而發之
故經有不言하고 傳得而詳爾 非爲二說也라하야늘
予曰 經所不書 三子者何從而知其然也
曰 推其前後而知之 且其有所傳而得也
國君必卽位어늘 而隱不書卽位하니 此傳得知其攝也
弑君者 不復見經하고 而盾復見經하니 此傳得知弑君非盾也
君弑 賊不討 則不書葬이어늘 而許悼公書葬하니 此傳得知世子止之非實弑也
經文隱矣어늘 傳曲而暢之하니 學者以謂三子之說 聖人之深意也
是以 從之耳 非謂捨孔子而信三子也라하야늘
予曰 然則妄意聖人而惑學者 三子之過而已
使學者必信乎三子인댄 予不能奪이어니와 使其惟是之求인댄 則予不得不爲之辨이라호라


01. 《춘추春秋》에 대한
조리가 있다.
불행하게도 세월이 오래 흐른 뒤에 두 종류의 이 전해지는 경우가 있다면 어느 것을 따라야 하는가?
믿을 만한 한 가지 설을 따라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믿을 만한 것을 알아서 따르겠는가?
말한 사람의 덕행德行명망名望에 의거하여 그의 을 믿어야 한다.
중인衆人의 설이 저와 같고 군자君子의 설이 이와 같다면 중인을 버리고 군자를 따른다.
군자는 널리 배워 견문見聞이 많으나 군자가 전하는 설에도 잘못이 없을 수 없다.
군자君子의 설이 저와 같고 성인聖人의 설이 이와 같다면 군자를 버리고 성인을 따른다.
이는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인데 《춘추春秋》를 배우는 자들만은 이와 다르다.
공자孔子성인聖人이니 만세토록 이 한 사람이 믿음을 받았을 뿐이다.
공양고公羊高, 곡량적穀梁赤, 좌구명左丘明 세 사람으로 말하자면 널리 배워 견문이 많았지만, 그들이 기록한 에 잘못이 없을 수 없다.
그런데 공자가 기록한 과 세 사람이 기록한 에 다른 점이 있으면, 배우는 자들은 차라리 을 버리고 을 따르며, 공자를 믿지 않고 세 사람을 믿으니, 심하도다. 그 미혹됨이여!
은공隱公의 일에 대해 “주의보邾儀父에서 회맹會盟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은공이 죽었을 때 “하였다.”라고 기록하여 공자孔子는 시종 ‘’이라 하였고,
세 사람은 “정식으로 즉위卽位한 것이 아니라 섭행攝行한 것이기 때문에 ‘’이라 부를 수 없다.”라고 하였는데,
배우는 자들이 공자를 따라 ‘’이라 하지 않고 세 사람을 따라 ‘섭행攝行하였다.’라고 하였다.
영공靈公의 일에 대해 공자는 “조돈趙盾이 자기 임금 이고夷皐를 시해하였다.”라고 기록하였고,
세 사람은 “임금을 시해한 자가 조돈趙盾이 아니라 조천趙穿이다.”라고 하였는데,
배우는 자들이 공자를 따라 임금을 시해한 자가 ‘조돈趙盾’이라고 믿지 않고 세 사람을 따라 ‘조천趙穿’이라고 믿었다.
도공悼公의 일에 대해 공자는 “나라의 세자世子 가 자기 임금 를 시해하였다.”라고 기록하였고, 세 사람은 “허나라의 세자 지가 자기 임금 를 시해한 것이 아니다.
는 병들어 죽은 것이고 을 맛보지 않았을 뿐이다.”라고 하였는데, 배우는 자들이 공자를 따라 ‘임금을 시해하였다.’라고 믿지 않고 세 사람을 따라 ‘약을 맛보지 않았다.’라고 믿었으니, 을 버리고 을 따른 것은 무엇 때문인가?
간직簡直하고 신기新奇하니, 간직簡直한 것은 듣기 좋은 말이 없고 신기新奇한 것은 기뻐할 만한 의논이 많다.
이러므로 배우는 자들이 듣기를 좋아하고 미혹되기 쉽다.
내가 감히 “미혹되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공자孔子를 독실하게 믿는 자이니, 에 기록된 것은 내가 믿는 바이고 에 말하지 않은 것은 내가 모르는 바이다.
변론하는 자가 말하기를 “그대의 말은 마음에 감발하는 바가 있어서 그렇게 이르는 것일 뿐이다.
세 사람은 모두 성인聖人에게 배웠고 의 내용을 서술한 글이니, 은 글이 은미하고 뜻이 깊은데 세 사람이 이에 의거하여 의미를 밝혀낸 것이다.
그러므로 에 말하지 않은 것을 에서 상세히 말한 것이니, 두 가지 설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경에 기록하지 않은 바를 세 사람이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변론하는 자가 대답하기를 “전후前後의 사실을 유추하여 알았고 전하는 말을 듣고서 알았다.
춘추春秋》에서는 국군國君에 대해 반드시 즉위卽位 사실을 기록하는데 은공隱公에 대해서는 ‘즉위卽位’라고 기록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에서 섭정攝政임을 알았던 까닭이다.
또 임금을 시해한 자는 다시 에 드러내지 않는데 조돈趙盾의 경우 〈‘선공宣公 6년 봄에 나라 조돈趙盾나라 손면孫免나라를 습격하였다.’라고〉 다시 에 드러났으니, 이것이 에서 임금을 시해한 자가 조돈趙盾이 아님을 알았던 까닭이다.
또 임금이 시해를 당하였을 때 을 토벌하지 않았으면 장사 지낸 사실을 기록하지 않는데 도공悼公의 경우 〈‘겨울에 도공悼公을 장사 지냈다.’라고〉 장사 지낸 사실을 기록하였으니, 이것이 에서 세자世子 가 실제로 시해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던 까닭이다.
의 기록이 은미한데 에서 곡진하게 드러내었기에 배우는 자들이 세 사람의 이 성인의 깊은 뜻이라고 여겼다.
이러므로 세 사람의 설을 따랐을 뿐이지 공자를 버리고 세 사람을 믿은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그렇다면 망령되이 성인의 뜻을 짐작하여, 배우는 자들을 미혹되게 하는 것이 세 사람의 허물일 뿐이다.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반드시 세 사람의 설을 믿게 하려 한다면 내가 어쩔 수 없지만, 그들이 진실만을 구하게 하려 한다면 나는 변론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역주
역주1 春秋論上 : 〈春秋論〉 上‧中‧下 3篇은 歐陽脩의 史論인데, 비록 3편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1편의 글로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이다. 《春秋》는 중국 제일의 編年體 斷代史로 孔子가 編修한 것이라고 전해지는데, 문장은 간결하고 문맥에는 褒貶의 의미가 들어 있다. 《春秋》를 해석한 책으로는 《左氏傳》, 《公羊傳》, 《穀梁傳》의 三傳이 있다.
역주2 : 經의 의미에 대한 해설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公羊高와 穀梁赤과 左丘明이 지은 《春秋公羊傳》, 《春秋穀梁傳》, 《春秋左氏傳》을 가리킨다.
역주3 : 典範이 되는 글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孔子가 지은 《春秋》를 가리킨다.
역주4 公及邾儀父 盟于蔑 : 《春秋》 隱公 원년 經文에 “3월에 魯나라 은공이 주나라 임금 儀父와 蔑에서 만나 평화조약을 맺었다.[三月 公及邾儀父盟于蔑]”라고 하였다.
역주5 公薨 : 《春秋》 隱公 11년 經文에 “겨울 11월 壬辰에 공이 薨逝하였다.[冬十一月壬辰公薨]”라고 하였다. 薨은 諸侯가 세상을 떠나는 것을 말한다.
역주6 趙盾(돈)弑其君夷皐 : 이 일은 《春秋》 宣公 2년 9월 乙丑 조에 보인다. 趙盾은 趙衰의 아들인 趙宣子로, 춘추시대 晉나라의 정사를 맡아보았다. 임금의 미움을 받고 망명하는 도중에 趙穿이 임금을 시해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돌아왔는데, 《춘추》에 ‘趙盾이 자기 임금 夷皐를 시해하였다.’라고 기록한 것은 조돈이 돌아와서 임금을 죽인 조천의 죄를 다스리지 않았으므로, 조돈이 임금을 죽인 것과 마찬가지라는 의미이다.
역주7 許世子止弑其君買 : 이 일은 《春秋》 昭公 19년 여름 5월 戊辰에 보인다. 당시 許 悼公이 병중에 약에 중독되어 죽었는데, 《춘추》에 ‘許나라의 世子 止가 자기 임금 買를 시해하였다.’라고 기록한 것은 세자인 止가 아버지가 먹을 약을 먼저 맛보지 않은 탓이라 하여 죄를 준 것이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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