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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2)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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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朋黨之禍 至唐而極하고 論朋黨之文 至歐陽子而極이라
甚哉
悲夫
可爲流涕者矣로다
然士之生死 豈其一身之事哉
初唐 梁王 欲以嬖吏張廷範爲이러니
唐宰相裴樞 以謂太常卿 常以淸流爲之어늘 廷範乃梁이니 不可라하니
梁王 由此大怒하야 曰 吾嘗謂裴樞純厚하야 不陷浮薄이러니 今亦爲此邪아라하다
是歲四月 彗出西北하야어늘 宰相柳璨 希梁王旨하야 歸其譴於大臣하니
於是 左僕射裴樞獨孤損 右僕射崔遠守 太保致仕趙崇 兵部侍郞王贊 工部尙書王溥 吏部尙書陸扆 皆以無罪貶하고 同日賜死於白馬驛하고 凡縉紳之士與唐而不與梁者 皆誣以朋黨하야 坐貶死者 數百人이라 而朝廷爲之一空하다
明年三月 唐哀帝 遜位於梁할새 遣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張文蔚爲冊禮使하고 禮部尙書蘇循爲副하며 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楊涉爲押傳國寶使하고 翰林學士中書舍人張策爲副하며 御史大夫薛貽矩爲押金寶使하고 尙書左丞趙光逢爲副
四月甲子 文蔚等 自上源驛으로하며하야 導以太常하야 朝梁於金祥殿하니 梁王袞冕南面이어늘 臣文蔚臣循 奉冊升殿進하야 讀已 臣涉臣策 奉傳國璽하고 臣貽矩臣光逢하야 以次升하야 進讀已하야 率文武百官하야 하고 再拜賀하다
夫一太常卿與社稷 孰爲重
使樞等不死 尙惜一卿이어늘 其肯以國與人乎
雖樞等之力 未必能存唐이나 然必不亡唐而獨存也
嗚呼
唐之亡也 賢人君子 旣與之共盡하니 其餘在者 皆庸懦不肖傾險獪猾趨利賣國之徒也
不然이면 安能蒙恥忍辱於梁庭 如此哉
作唐六臣傳하노라


05. 《오대사五代史》 〈당육신전唐六臣傳〉에 대한 1
붕당朋黨의 화는 나라에 이르러 지극하였고, 붕당에 대해 논한 글은 구양자歐陽子에 이르러 지극하다.
심하도다!
백마역白馬驛여.
슬프도다!
눈물을 흘릴 만하여라.
그러나 선비가 살고 죽는 것은 어찌 그 일신의 일이겠는가.
당초 나라 천우天祐 3년(906)에 양왕梁王이 총애하는 관리 장정범張廷範태상경太常卿으로 삼고자 했는데,
당나라 재상 배추裵樞가 “태상경은 당나라에서는 늘 청류淸流를 시켰는데 장정범은 나라의 객장客將이니, 안 된다.”라고 하니,
양왕이 이로부터 크게 노하여 “내 일찍이 배추는 순후純厚하여 부박浮薄한 데 빠지지 않을 것이라 여겼더니, 지금 그 역시 이런 짓을 하는가.”라고 하였다.
이해 4월에 혜성彗星이 서북쪽 하늘에 나타나 문창성文昌星헌원성軒轅星천시성天市星 세 별을 쓸고 지나가거늘, 재상 유찬柳璨양왕梁王의 뜻에 영합하여 그 견책譴責대신大臣에게 돌렸다.
이에 좌복야左僕射 배추裵樞독고성獨孤成, 우복야右僕射 최원수崔遠守, 태보치사太保致仕 조숭趙崇, 병부시랑兵部侍郞 왕찬王贊, 공부상서工部尙書 왕부王溥, 이부상서吏部尙書 육의陸扆가 모두 죄 없이 폄직貶職되었고 같은 날 백마역白馬驛에서 사사賜死되었으며, 무릇 사대부들 중 나라를 돕고 나라를 돕지 않은 자들이 모두 붕당朋黨으로 모함을 받아서 폄직되거나 죽은 사람이 수백 명이라 조정이 이 때문에 텅 비었다.
그 이듬해 3월에 애제哀帝나라에게 손위遜位할 때 중서시랑中書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장문울張文蔚을 보내 책례사冊禮使로 삼고 예부상서禮部尙書 소순蘇循부사副使로 삼았으며, 중서시랑中書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양섭楊涉압전국보사押傳國寶使로 삼고 한림학사翰林學士 중서사인中書舍人 장책張策을 부사로 삼았으며, 어사대부御史大夫 설이구薛貽矩압금보사押金寶使로 삼고 상서좌승尙書左丞 조광봉趙光逢을 부사로 삼았다.
4월 갑자일에 장문울 등이 상원역上源驛으로부터 책보冊寶를 받들고 노거輅車를 타고서 금오金吾 의장대와 태상시太常寺 의장대의 인도를 받아서 금상전金祥殿에서 양나라에 조회하니, 양왕梁王이 곤룡포와 면류관 차림으로 남면南面하고 있거늘, 신하 장문울과 신하 소순이 책보를 받들고 전상殿上에 올라 나아가 읽기를 마치자, 신하 양섭과 신하 장책이 전국새傳國璽를 받들고 신하 설이구와 신하 조광봉이 금보金寶를 받들고 차례로 올라가 나아가 읽기를 마치자, 내려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북향北向하여 무도舞蹈하고 재배하여 하례賀禮하였다.
대저 일개 태상경太常卿과 국가의 사직社稷 중 어느 것이 중요한가.
가령 배추裵樞 등이 죽지 않았다면 그래도 일개 태상경 자리도 아까워했거늘 나라를 남에게 넘겨주려 했겠는가.
비록 배추 등의 힘이 반드시 나라를 보존할 수는 없었겠지만, 반드시 당나라는 망하게 두고 자신만 홀로 살아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아!
나라가 망할 때 현인賢人 군자君子들이 이미 함께 다 죽었으니, 남아 있는 자들은 모두 용렬하고 나약하고 못나고 음험하고 교활하여 이익만 추구하고 나라를 파는 무리뿐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나라 조정에서 수치를 무릅쓰고 욕됨을 참는 것이 이와 같았단 말인가.
이에 〈당육신전唐六臣傳〉을 짓노라.


역주
역주1 五代史唐六臣傳論一 : 이 글은 《新五代史》 〈唐六臣傳〉 앞에 있는 서문이다. 唐六臣은 원래 後唐의 大臣으로 있다가 後唐과 後梁의 禪讓의식을 맡아서 하고, 결국에는 후량의 重臣이 된 張文蔚‧楊涉‧張策‧趙光逢‧薛貽矩‧蘇循 여섯 사람을 가리킨다.
역주2 白馬之禍 : 唐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哀帝(昭宣帝) 天祐 2년(905)에 재상 柳瓚이 後梁의 왕 朱溫(朱全忠)의 뜻에 영합하여 大臣인 裴樞 등 7인을 모함해서 滑州 白馬驛에서 죽인 사건을 가리킨다. 과거에 누차 급제하지 못해서 불만을 품고 있던 李振이 당시 주전충의 佐吏로 있으면서 “이 자들은 스스로 淸流라고 말을 하니 黃河에 던져 넣어서 영원히 濁流가 되게 하는 것이 좋겠다.[此輩自謂淸流 宜投於黃河 永爲濁流]”라고 하니, 주온이 웃으면서 허락했다고 한다. 歐陽脩의 〈朋黨論〉에는 이 사건을 昭宗 때의 일로 기록하였다.
역주3 天祐三年 : 《新唐書》 권10 〈哀帝紀〉와 《資治通鑑》 권265 〈唐紀〉에는 모두 天祐 2년 12월의 일로 기록하고 있다. 천우 2년이 맞다.
역주4 太常卿 : 太常은 太常寺의 준말로 秦나라 때 奉常인데 漢나라 때 고쳐서 太常이라고 하였다. 《周禮》의 春官에 해당하며, 宗廟 禮儀를 관장하였다. 後漢 이후에 이어서 두었으며, 北齊에 이르러 비로소 太常寺라고 불렀다. 卿과 少卿 각각 1人을 두었다. 後周에 이르러 大宗伯이라 하였다.
역주5 客將 : 다른 나라에서 온 장수란 뜻이다. 당시 張廷範이 梁王 朱溫의 휘하에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이다.
역주6 文昌軒轅天市 : 《史記》 권27 〈天官書〉에 의하면, 文昌星은 文運을 관장하고, 軒轅星은 왕후를 상징하고, 天市星는 시장 교역 및 斬戮의 일을 관장한다고 한다.
역주7 冊寶 : 玉冊과 같은 말로 임금이나 왕후의 공덕을 기리는 글을 옥에 새긴 것이다.
역주8 輅車 : 천자가 타는 수레이다. 본서 권10 〈與謝景山書〉의 註 ‘五輅’ 참조.
역주9 金吾仗衛 : 金吾는 본래 구리로 만든 儀仗棒으로, 양쪽 끝 부분에 塗金이 되어 있다. 의장대의 衛士가 이것을 잡는다.
역주10 鹵簿 : 황제와 后妃가 외출할 때 扈從하는 의장대이다.
역주11 金寶 : 제왕이나 왕후의 尊號를 새긴 도장이다.
역주12 北面舞蹈 : 신하로서 제왕에게 하례하는 儀節이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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