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聖七年
에 予始遊京師
하야 得吾友謝景山
하니 景山少以進士中甲科
하야 以善
知名
라
其後予於他所
에 又得今
所爲景山母夫人之墓銘
하니 言夫人好學通經
하야 自敎其子
라하니
乃知景山出於
數千里之外
하야 負其藝於大衆之中
하야 一賈而售
하야 遂以名知於人者
가 繄其母之賢也
로다
然後又知景山之母가 不獨成其子之名이요 而又以其餘遺其女也로다
景山嘗學杜甫杜牧之文하야 以雄健高逸自喜하고 希孟之言은 尤隱約深厚하야 守禮而不自放하야 有古幽閒淑女之風하니 非特婦人之能言者也라
然景山嘗從今世賢豪者遊라 故得聞於當時나 而希孟不幸爲女子하야 莫自章顯於世라
이러니 今有傑然巨人能輕重時人而取信後世者
가 一爲希孟重之
면 其不泯沒矣
리라
부인을 위해 쓴 서문인데 〈사씨謝氏의〉 형인 경산景山의 시와 어머니의 묘지명墓誌銘으로부터 골자骨子를 얻었다.
천성天聖 7년(1029)에 내가 처음 경사京師에 가 있으면서 나의 벗 사경산謝景山을 만났으니, 경산景山은 어릴 때 진사시進士試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가시歌詩를 잘 지어 이름이 알려졌다.
그 뒤에 내가 다른 곳에서 또 현재 사인舍人 송공宋公이 지은 경산景山의 어머니의 묘지명墓誌銘을 얻어 보니, “부인이 학문을 좋아하고 경학經學에 통달하여 스스로 아들을 가르쳤다.”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제야 경산景山이 수천 리 먼 곳인 구민甌閩에서 태어나 대중들 가운데서 재예才藝를 자부하여 단번에 재능을 인정받아서 마침내 사람들에게 이름이 알려진 것은 바로 어머니의 현명함 때문이었음을 알았다.
올해 내가 이릉夷陵으로부터 허창許昌에 이르렀는데, 경산景山이 자기 누이 희맹希孟이 지은 시 100여 편을 꺼내 보여주었다.
그런 뒤에 또 경산景山의 어머니가 아들의 이름을 이루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또 남은 것을 딸에게도 남겨주었음을 알게 되었다.
경산景山은 일찍이 두보杜甫와 두목杜牧의 글을 배워 웅건하고 고아한 것을 스스로 좋아하였고, 희맹希孟의 시는 더욱 함축적이고 심후하여 예禮를 지켜 스스로 방임放任하지 않아 옛날 유한幽閑한 숙녀淑女의 기풍이 있었으니, 부인으로서 시를 잘 짓는 사람일 뿐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경산景山은 일찍부터 당대의 뛰어난 인물들과 종유하였기 때문에 당세에 이름이 알려졌지만, 희맹希孟은 불행히도 여자라서 스스로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옛날 위장강衛莊姜과 허목부인許穆夫人의 시가 공자孔子에게 채택되어 《시경詩經》 〈국풍國風〉에 나열되어 있는데, 지금 당대의 사람을 포폄하여 후세에 믿음을 줄 수 있는 걸출한 위인偉人이 한번 희맹希孟을 위하여 중하게 평가한다면 그녀의 문장은 민몰泯沒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실로 힘이 부족한 자이니 다시 어찌하겠는가, 다시 어찌하겠는가.
희맹希孟은 진사進士 진안국陳安國에게 시집갔고, 졸卒했을 때의 나이는 24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