唐
間
에 神仙道家之說興
할새 天子爲書六大字
하야 賜而揭焉
하고
太宗皇帝時에 詔求天下前世名山異跡而尤好書法하야 聞登眞有開元時所賜字甚奇하야 乃取至京師閱焉이라
已而還之에 又賜御書飛白字하야 使藏焉이러니 其後登眞大火하야 獨飛白書存이러라
康定元年에 道士彭知一이 探其私笈하야 以市工材하야 悉復宮之舊할새 建樓若干尺하야 以藏賜書하다
予之故人處士任君이 爲予言其事하고 來乞文以志하야 凡十餘請而不懈라
이라 悉掌天下圖書
하야 考圖驗之
하니 醴陵老佛之居
가 凡八十
이요 而所謂登眞者
는 其說皆然
일새 乃爲之記
하노라
二家之說이 皆見斥於吾儒하니 宜其合勢幷力以爲拒守나 而乃反自相攻하야 惟恐不能相弱者하니 何哉오
故其代爲興衰가 各繫於時之好惡하니 雖善辯者라도 不能合二說而一之어니와 至其好大宮室하야 以矜世人하야는 則其爲事同焉이라
然而佛能箝人情而鼓以禍福하니 人之趣者常衆而熾어늘
老氏獨好言淸淨遠去靈仙飛化之術이라 其事冥深하야 不可質究하니 則常以淡泊無爲爲務라
故凡佛氏之動搖興作은 爲力甚易하고 而道家非遭人主之好尙이면 不能獨興하니
예능현醴陵縣 동쪽 20리에 궁宮이 있으니 등진궁登眞宮이다.
그 앞에 산이 있으니 선인仙人인 왕교王喬가 여기에서 단약丹藥을 고았다고 세상에 전한다.
당唐 개원開元 연간에 신선神仙과 도가道家의 설이 흥성할 때에 천자가 큰 글씨 여섯 자를 써서 하사下賜하여 걸어두었다.
태종太宗 황제 때에 천하에 흩어져 있는 이전 시대의 명산名山의 기이한 유적들을 찾아오게 하였고, 서법書法을 더욱 좋아하여 등진궁登眞宮에 개원開元 연간에 하사下賜한 글씨가 매우 기이하다는 소문을 듣고는 곧장 경사京師로 가지고 오게 하여 열람하였다.
이윽고 돌려보낼 때에 또 비백체飛白體로 쓴 어서御書를 하사하여 보관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 등진궁登眞宮에 큰 화재가 나 비백체飛白體로 쓴 글씨만 남게 되었다.
강정康定 원년元年(1040, 인종仁宗 1)에 도사 팽지일彭知一이 자신의 사비私費를 털어 공인과 재목을 사서 등진궁登眞宮을 남김없이 복구復舊할 때에 약간 척의 누樓를 세워 하사下賜해준 글씨를 보관하였다.
나의 벗 처사處士 임군任君이 나에게 그 일을 이야기해주고 와서 진심으로 기문記文을 써줄 것을 청하여 10여 차례 청하면서도 지치지 않았다.
내가 당시에 직방職方을 맡고 있었으므로 천하의 지도와 서적을 모두 관장하고 있어서, 지도를 살펴 알아보니 예능醴陵에 도교道敎의 도관道觀과 불교佛敎의 사찰이 모두 80개였고, 이른바 등진궁登眞宮이라는 것이 그의 말대로 모두 사실이기에 이에 기문을 쓰노라.
대저 도가道家와 불가佛家의 학문이 모두 세상에 유행한 지 오래되었다.
그 무리들이 늘 서로 상대의 병통을 비난하며 마치 세상에 서로 용납하지 않을 듯이 한다.
그러나 도가道家와 불가佛家의 설이 모두 우리 유자儒者에게 배척받고 있으니, 의당 세력勢力을 모아 막아내고 지켜내야 할 터인데, 도리어 자기들끼리 서로 공격하여 상대방을 약화시키지 못할까 걱정하니 어찌된 일인가?
아마도 사생死生과 성명性命에 대해 주장하는 설이 서로 어긋나 그러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번갈아 그들의 흥망성쇠가 시대의 호오好惡에 각각 달려 있었으니, 비록 변론辯論을 잘하는 자라도 도가道家와 불가佛家의 두 설을 합하여 하나로 만들 수 없거니와, 궁실宮室을 아름답고 크게 만들어 세상 사람들에게 과시하는 것에 이르러서는 똑같이 일삼고 있다.
그러나 불가佛家는 사람의 정情을 제약하고 화복禍福으로 고무시키니, 불가佛家로 달려가는 사람이 늘 많아 번성한다.
그런데 도가道家는 유독 청정淸淨하게 살면서 멀리 떠나고 신선이 되는 술법을 이야기하기 좋아하는지라 그 일이 심원하여 확실히 알 수 없으니 늘 담박함과 무위無爲에 힘쓴다.
그러므로 불가佛家가 동요動搖시키고 흥기興起시키는 것은 힘쓰기가 매우 쉽고, 도가道家는 이 설을 좋아하는 인주人主를 만나지 않으면 홀로 흥기興起할 수 없다.
그러니 그동안에 스스로 힘써 도가道家의 설을 잘 존속해온 사람은 아마도 도가道家의 사람들보다 현명한 것이 아니겠는가.
경력慶曆 2년(1042) 8월 8일 여릉廬陵 구양수歐陽脩가 기문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