峴山이 臨漢上에 望之隱然하니 蓋諸山之小者로되 而其名特著於荊州者는 豈非以其人哉아
方晉與吳以兵爭할새 常倚荊州以爲重이러니 而二子相繼於此하야 遂以平吳而成晉業하니 其功烈이 已蓋於當世矣라
至於
이 藹然被於江漢之間者
를 至今人猶思之
호되 而於思叔子也
에 尤深
하니 蓋元凱
는 以其功
이요 而叔子
는 以其仁
이라
二子所爲가 雖不同이나 然皆足以垂於不朽어늘 而頗疑其反自汲汲於後世之名者는 何哉오
傳言叔子嘗登玆山하야 慨然語其屬호되 以謂此山常在나 而前世之士는 皆已湮滅於無聞이라하고 因自顧而悲傷이라
熙寧元年
에 余友人史君中煇
가 以
으로 來守襄陽
이러니 明年
에 因亭之舊
하야 廣而新之
하야 旣周以回廊之壯
하고 又大其後軒
하야 使與亭相稱
하니
君知名當世하야 所至有聲이라 襄人安其政而樂從其遊也하야
因以君之官으로 名其後軒爲光祿堂하고 又欲紀其事于石하야 以與叔子元凱之名으로 竝傳于久遠하니 君皆不能止也라
乃來以記屬於予하니 余謂君知慕叔子之風而襲其遺迹하니
則其爲人與其志之所存者를 可知矣요 襄人愛君而安樂之如此하니 則君之爲政於襄者를 又可知矣니
若其左右山川之勝勢
와 與夫草木雲烟之杳靄出沒于空曠有無之間
하야 而
者
는 宜其覽者自得之
요 至於亭屢廢興
하얀 或自有記
하며 或不必究其詳者
라 皆不復道也
로라
풍류風流가 있고 감개感慨하니 그야말로 현산정峴山亭에 대한 글이다.
맹호연孟浩然의 현산시峴山詩와 아울러 고금에 빼어나다.
현산峴山이 한수漢水 가에서 바라보면 희미하게 보이니, 대개 산들 중에 작은 산이지만 이름이 형주荊州에서 특별히 드러난 것은 어쩌면 그 사람 때문이 아니겠는가.
숙자叔子 양우羊祐와 원개元凱 두예杜預가 바로 그 사람이다.
바야흐로 진晉나라와 오吳나라가 전쟁을 치를 때에 늘 형주荊州를 맡기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두 사람이 서로 이어 이 형주荊州를 맡아 마침내 오吳나라를 평정하고 진晉나라의 대업大業을 이루었으니, 그 공렬이 이미 당세에 으뜸이다.
풍류風流의 여운餘韻이 성대하게 강수江水와 한수漢水 사이에 더해진 것에 이르러서는 지금 사람들이 아직도 생각하고 있지만, 백성들이 숙자叔子를 잊지 못하고 생각하는 것이 더욱 깊으니 대개 원개元凱는 공功 때문이고 숙자叔子는 인仁 때문이다.
두 사람이 한 일은 비록 다르지만 모두 무궁하게 후세에 전할 만한데, 도리어 스스로 후세에 이름을 남기는 데에 급급하였다고 자못 의심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전하는 말에 “숙자叔子가 일찍이 이 산에 올라 개연히 그 무리들에게 말하기를 ‘이 산은 늘 있지만 이전 시대의 선비들은 모두 이미 알려지지 않고 사라졌다.’라고 하고, 인하여 스스로 돌아보며 서글퍼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유독 이 산이 자기를 만나서 이름이 드러날 줄은 알지 못하였다.
원개元凱는 두 돌에 자신의 공을 새겨 하나는 이 산의 위에 두고 하나는 한수漢水의 깊은 곳에 던졌으니, 이는 구릉과 골짜기가 변한다는 것은 알고 돌은 시간이 지나면 마멸되는 줄을 알지 못한 것이다.
어쩌면 두 사람 다 스스로 이름 남기는 것을 몹시 좋아하여 지나치게 무궁할 것을 생각한 것인가.
아니면 혹 자신을 대한 것은 후하고 생각한 것은 원대해서 그런 것인가.
현산峴山에는 예부터 정자가 있었으니,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숙자叔子가 노닐며 쉬던 곳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여러 번 정자가 없어졌다 다시 중수된 것은 후세에 그 이름을 사모하고 그 사람을 생각하는 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희령熙寧 원년元年(1068)에 나의 벗 사군史君 중휘中煇가 광록경光祿卿으로 와서 양양襄陽 수령이 되었는데, 부임한 이듬해에 정자가 있던 옛 터에다 확장하고 새롭게 수리하여 이미 웅장한 회랑回廊을 두르고 또 후헌後軒을 넓혀 정자와 서로 걸맞게 만들었다.
군은 당세에 이름이 알려져 부임하는 곳마다 고을을 잘 다스린다는 평판이 있었으므로, 양양襄陽 사람들이 그의 정사를 편안히 여겨 기꺼이 그와 종유하였다.
인하여 군君의 관명官名으로 후헌後軒을 광록당光祿堂이라고 명명하고, 또 돌에다 이 일을 기록하여 숙자叔子와 원개元凱의 이름과 함께 먼 후세까지 전하려고 하니 군은 모두 만류할 수 없었다.
이에 나에게 와서 기문記文을 부탁하니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노라.
군은 숙자叔子의 풍도風度를 사모하고 그 유적을 이어받을 줄 알았으니, 사람 됨됨이와 품고 있는 뜻을 알 수 있고, 양양襄陽 사람들이 군을 아끼고 안락하게 지냄이 이와 같으니, 군이 양양襄陽에서 펼친 정사를 또 알 수 있다.
이것이 양양襄陽 사람이 글을 쓰려고 하는 이유이다.
좌우 산천의 승경과 광활하고 아련한 들판에서 초목은 무성하고 연무煙霧는 끼다 걷혔다 하여 시인詩人의 등고登高에 대비하고 〈이소離騷〉의 극목極目을 묘사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은 의당 경치를 보는 사람들이 스스로 알게 될 것이고, 정자가 누차 흥폐한 데에 이르러서는 혹 본래 기문記文이 있을 것이고, 혹 자세한 내용은 궁구할 필요가 없으므로 모두 말하지 않노라.
“이 편은 〈이수재동원정기李秀才東園亭記〉와 같은 체제인데, 모두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대략 자신의 말로 점화點化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