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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3)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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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風流感慨하니 正是峴山亭文字
與孟浩然峴山詩 竝絶今古
峴山 臨漢上 望之隱然하니 蓋諸山之小者로되 而其名特著於荊州者 豈非以其人哉
其人謂誰
是已
方晉與吳以兵爭할새 常倚荊州以爲重이러니 而二子相繼於此하야 遂以平吳而成晉業하니 其功烈 已蓋於當世矣
至於 藹然被於江漢之間者 至今人猶思之호되 而於思叔子也 尤深하니 蓋元凱 以其功이요 而叔子 以其仁이라
二子所爲 雖不同이나 然皆足以垂於不朽어늘 而頗疑其反自汲汲於後世之名者 何哉
傳言叔子嘗登玆山하야 慨然語其屬호되 以謂此山常在 而前世之士 皆已湮滅於無聞이라하고 因自顧而悲傷이라
然獨不知玆山 待己而名著也
豈皆自喜其名之甚하야 而過爲無窮之慮歟
將自待者厚 而所思者遠歟
山故有亭하니 世傳以爲叔子之所遊止也
故其屢廢而復興者 由後世慕其名而思其人者多也
熙寧元年 余友人史君中煇으로 來守襄陽이러니 明年 因亭之舊하야 廣而新之하야 旣周以回廊之壯하고 又大其後軒하야 使與亭相稱하니
君知名當世하야 所至有聲이라 襄人安其政而樂從其遊也하야
因以君之官으로 名其後軒爲光祿堂하고 又欲紀其事于石하야 以與叔子元凱之名으로 竝傳于久遠하니 君皆不能止也
乃來以記屬於予하니 余謂君知慕叔子之風而襲其遺迹하니
則其爲人與其志之所存者 可知矣 襄人愛君而安樂之如此하니 則君之爲政於襄者 又可知矣
此襄人之所欲書也
若其左右山川之勝勢 與夫草木雲烟之杳靄出沒于空曠有無之間하야 宜其覽者自得之 至於亭屢廢興하얀 或自有記하며 或不必究其詳者 皆不復道也로라
荊川云
此篇與東園記同體하니 皆引故事하야 略用自語


05. 현산정峴山亭에 대한 기문記文
풍류風流가 있고 감개感慨하니 그야말로 현산정峴山亭에 대한 글이다.
맹호연孟浩然현산시峴山詩와 아울러 고금에 빼어나다.
현산峴山한수漢水 가에서 바라보면 희미하게 보이니, 대개 산들 중에 작은 산이지만 이름이 형주荊州에서 특별히 드러난 것은 어쩌면 그 사람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 사람은 누구인가?
숙자叔子 양우羊祐원개元凱 두예杜預가 바로 그 사람이다.
바야흐로 나라와 나라가 전쟁을 치를 때에 늘 형주荊州를 맡기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두 사람이 서로 이어 이 형주荊州를 맡아 마침내 나라를 평정하고 나라의 대업大業을 이루었으니, 그 공렬이 이미 당세에 으뜸이다.
풍류風流여운餘韻이 성대하게 강수江水한수漢水 사이에 더해진 것에 이르러서는 지금 사람들이 아직도 생각하고 있지만, 백성들이 숙자叔子를 잊지 못하고 생각하는 것이 더욱 깊으니 대개 원개元凱 때문이고 숙자叔子 때문이다.
두 사람이 한 일은 비록 다르지만 모두 무궁하게 후세에 전할 만한데, 도리어 스스로 후세에 이름을 남기는 데에 급급하였다고 자못 의심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전하는 말에 “숙자叔子가 일찍이 이 산에 올라 개연히 그 무리들에게 말하기를 ‘이 산은 늘 있지만 이전 시대의 선비들은 모두 이미 알려지지 않고 사라졌다.’라고 하고, 인하여 스스로 돌아보며 서글퍼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유독 이 산이 자기를 만나서 이름이 드러날 줄은 알지 못하였다.
원개元凱는 두 돌에 자신의 공을 새겨 하나는 이 산의 위에 두고 하나는 한수漢水의 깊은 곳에 던졌으니, 이는 구릉과 골짜기가 변한다는 것은 알고 돌은 시간이 지나면 마멸되는 줄을 알지 못한 것이다.
어쩌면 두 사람 다 스스로 이름 남기는 것을 몹시 좋아하여 지나치게 무궁할 것을 생각한 것인가.
아니면 혹 자신을 대한 것은 후하고 생각한 것은 원대해서 그런 것인가.
현산峴山에는 예부터 정자가 있었으니,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숙자叔子가 노닐며 쉬던 곳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여러 번 정자가 없어졌다 다시 중수된 것은 후세에 그 이름을 사모하고 그 사람을 생각하는 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희령熙寧 원년元年(1068)에 나의 벗 사군史君 중휘中煇광록경光祿卿으로 와서 양양襄陽 수령이 되었는데, 부임한 이듬해에 정자가 있던 옛 터에다 확장하고 새롭게 수리하여 이미 웅장한 회랑回廊을 두르고 또 후헌後軒을 넓혀 정자와 서로 걸맞게 만들었다.
군은 당세에 이름이 알려져 부임하는 곳마다 고을을 잘 다스린다는 평판이 있었으므로, 양양襄陽 사람들이 그의 정사를 편안히 여겨 기꺼이 그와 종유하였다.
인하여 관명官名으로 후헌後軒광록당光祿堂이라고 명명하고, 또 돌에다 이 일을 기록하여 숙자叔子원개元凱의 이름과 함께 먼 후세까지 전하려고 하니 군은 모두 만류할 수 없었다.
이에 나에게 와서 기문記文을 부탁하니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노라.
군은 숙자叔子풍도風度를 사모하고 그 유적을 이어받을 줄 알았으니, 사람 됨됨이와 품고 있는 뜻을 알 수 있고, 양양襄陽 사람들이 군을 아끼고 안락하게 지냄이 이와 같으니, 군이 양양襄陽에서 펼친 정사를 또 알 수 있다.
이것이 양양襄陽 사람이 글을 쓰려고 하는 이유이다.
좌우 산천의 승경과 광활하고 아련한 들판에서 초목은 무성하고 연무煙霧는 끼다 걷혔다 하여 시인詩人등고登高에 대비하고 〈이소離騷〉의 극목極目을 묘사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은 의당 경치를 보는 사람들이 스스로 알게 될 것이고, 정자가 누차 흥폐한 데에 이르러서는 혹 본래 기문記文이 있을 것이고, 혹 자세한 내용은 궁구할 필요가 없으므로 모두 말하지 않노라.
형천荊川이 말하였다.
“이 편은 〈이수재동원정기李秀才東園亭記〉와 같은 체제인데, 모두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대략 자신의 말로 점화點化하였다.”


역주
역주1 : 이 글은 歐陽脩가 64세 되던 해인 熙寧 3년(1070)에 벗인 中煇의 부탁으로 지은 것이다. 峴山의 또 다른 이름은 峴首山이다.
역주2 羊祜叔子 : 晉나라 羊祜를 가리키는데 叔子는 그의 字이다. 魏나라 말엽에 從事官이 되어 荀彧과 같이 나라의 기밀에 관한 일을 관장하였다. 晉나라가 들어서자 鉅平侯에 봉해졌고 都督荊州諸軍事로 10년간 나가 있었는데, 재임하는 동안에 屯田을 실시하여 식량을 비축하면서 吳나라를 정복할 계획을 짰다. 평일에는 갑옷을 입지 않고 가벼운 갖옷에 허리띠를 느슨히 맨 차림으로 吳나라 장수 陸抗과 사신을 교환하면서 遠近을 안심시켜 江漢과 吳나라의 인심을 수습하였다. 그 뒤에 杜預를 추천하여 자신의 후임으로 삼았다. 그가 죽은 뒤에 南州의 사람들이 저자를 파하고 통곡하였으며 그가 평생 노닐던 峴山에 비를 세우고 사당을 건립하였는데, 杜預가 그 비를 墮淚碑라고 이름을 붙였다. 《晉書 권34 羊祜列傳》
역주3 杜預元凱 : 晉나라의 杜預(222~284)를 가리킨다. 元凱는 그의 字이다. 河南尹, 秦州刺史 등을 역임하고 鎭南大將軍이 되었는데, 유일하게 삼국시대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吳나라를 공격하여 평정하였다. 그 공으로 武帝의 신임을 받았으며 荊州를 총괄하는 직위에 封해졌다. 4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수도 낙양으로 돌아오다 사망하였다.
역주4 風流餘韻 : 羊祜와 杜預가 襄陽의 峴山에 남긴 詩文과 자취를 가리킨다.
역주5 元凱銘功於二石……是知陵谷有變 : 杜預는 후세에 이름 남기는 것을 좋아하여 늘 “높은 언덕은 골짜기가 되고 깊은 골짜기는 구릉이 된다.”라고 말하였다. 杜預가 두 개의 비석을 만들어 자신의 공을 기록하고는 하나는 漢水에 던지고 하나는 峴山에 세웠다. 그리고는 “이후에 구릉이 되고 골짜기가 될지 어찌 알겠는가.”라고 하였다. 《漢書 羊祜傳》
역주6 光祿卿 : 光祿寺를 주관하는 관원으로 조정의 제사와 조회 등의 일을 관장한다.
역주7 可以備詩人之登高 寫離騷之極目 : 詩人의 登高에 대비한다는 말은 《詩經》의 詩人이 높은 곳에 올라 勝景을 보고 詩興을 일으키는 모습을 형용한 것인 듯하다. 〈離騷〉는 《楚辭》의 편명으로 楚나라 때 屈原이 奸臣의 참소로 왕에게 신임을 잃고 쫓겨난 뒤에 자신의 失望과 忠憤을 내용으로 하여 서술한 글이다. 여기서는 屈原처럼 울분을 가진 사람이 높은 곳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며 〈離騷〉와 같은 시를 지어 울분을 해소하는 모습을 형용한 것인 듯하다.
역주8 點化 : 前人이 만든 詩文을 다듬어 新機軸을 내놓는 것을 말한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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