惟文簡公旣葬之二年
에 其子嗣隆
이 泣而言于朝曰
라
於是에 天子曰 噫라 惟爾父琳은 有勞於我國家하니 余其可忘가하시고
乃大書曰旌勞之碑라하야 遣中貴人하야 卽賜其家曰 以此名爾碑하라하시고
臣脩與文簡公
으로 故往來
하야 知其人
하고 하고 하야 得其世次官封功行最詳
일새 乃不敢辭
라
祖諱贊明은 贈太師中書令이요 祖妣는 秦國夫人吳氏라
考諱元白
은 이요 贈太師中書令 兼尙書令 冀國公
이요 妣
는 晉國夫人楚氏
라
會修眞宗實錄而
闕
이라 命公追修大中祥符八年已後
하니
書成
에 遂修起居注
하고 遷祠部員外郞
하야 提擧諸司庫務
하고 以本官知制誥
로 同判吏部
하다
天子思公前嘗折其使하야 乃以公爲館伴使한대 使者果言契丹見中國使者에 坐殿上하야 位次高하고 而中國見契丹使者에 位下하니 當遷이라하니
議者以爲小故可許하고 雖天子亦將許之어늘 公爭以謂契丹所以與中國好者는 守先帝約也니 一切宜用故事라
歲中
에 遷右諫議大夫 權御史中丞
한대 이 少所稱許
로되 而最知公
이라
除中丞
할새 文節當執筆
이러니 喜曰不辱吾筆矣
라하다
公性方重하며 寡言笑하고 凡所處畫에 常先慮謹備라
所以條目이 巨細甚悉하고 至臨事하야 簡嚴하야 僚吏莫能窺其際러라
嘗夜張燈會
하야 大集州民
이러니 而城中火起
로되 吏如公敎
하야 不以白
하고 而隨卽救止
하니 終宴民去
에 始稍知火
하다
監軍得告者言軍謀變하야 懼而入白한대 公笑曰 豈有是哉리오 監軍惶惑하야 不敢去하니
公曰 軍中動靜은 吾自知之니 苟有謀者면 不能隱也라하더니 已而卒無事하다
而謗者言公妄殺人하니 蜀且亂이라한대 天子遣人馳視之하니
使者還言蜀人便公政하며 方安樂하니 而誅妖人은 所以止亂이라하니
由是로 天子亦知公賢하야 召爲給事中 知開封府하다
前爲府者
가 苦其治劇
하야 不滿歲罷
하고 不然
이면 被謗譏
어나 或以事去
로되 獨公居數歲
하야 久而治益精明
에 盜訟稀少
하야 獄屢空
이라
詔書數下褒美
하고 이러니 久之
에 天子思其治
하야 召爲翰林學士
하야 復知開封府
하다
時議者患民稅多目하야 吏得爲姦하야 欲除其名而合爲一한대
公以謂合而沒其名이면 一時之便이나 後有興利之臣이 必復增之리니 是重困民也라하니 議者莫能奪이러라
宦官怒言 陛下雖有欲이라도 物在程某하니 何可得이리오하야늘
公益自信不疑하야 宰相有所欲私에 輒衆折之하니 其語至今士大夫能道也라
初
에 러니 已而上悔悟
하야 欲復用之
하야 稍徙知
어늘
而惡仲淹者가 遂誣以事하니 語入에 上怒하야 亟命置之嶺南이라
自仲淹貶으로 而朋黨之論起하야 朝士牽連하야 出語及仲淹者는 皆指爲黨人이어늘 公獨爲上開說하야 上意解而後巳러라
是時
에 元昊叛河西
하고 朝廷多故
한대 公在政事
하야 補益尤多
하니 而小人僥倖皆不便
하야 遂以事中之
하야 坐貶爲
知潁州
러니
已而徙知靑州
하고 又徙
라가 居一歲
에 遷戶部吏部二侍郞 尙書左丞 資政殿學士
하다
北京建
에 遂以爲留守
러니 宦者
이 方用事
하야 主治行宮
하야 務廣制度
하야 以市恩
이어늘
公自知政事로 以論議不私見嫉하야 被貶斥이라가 已稍復見用하야 遂與繼明爭曲直하니
由是로 益不妄合於世하야 雖不復大用이나 而契丹方遣使하야 數有所求하고 兵誅元昊未克하야 西北宿重兵이라 公於是時에 天子常委以河北陝西之重하야 留守北京이 凡四年에 遷工部尙書 資政殿大學士 河北安撫使러라
慶曆六年
에 拜武昌軍節度使 陝西安撫使 知永興軍府事
하고 明年
에 하고 仍兼陝西安撫使
하다
其於二方에 威惠信著하고 尤知夷狄情僞와 山川險易와 行師制敵之要라
公曰 契丹兵至元昊帳下면 當擧國取之니 豈容有來降者리오
不然이면 誘我也라하고 拒而不受러니 已而夏人果以兵數萬臨界上이라
하니 夏人以爲有備
라하야 引去
하고 自此不復窺邊
이러라
明年에 改武勝軍節度使하야 猶在北京하고 又改鎭安軍節度使라
在鎭四年에 猶上書하되 鎭安은 一郡爾니 不足以自效라
願復守邊
이라한대 書未報
에 得疾
하야 以至和三年閏三月七日己丑
에 하니 享年六十有九
라
公累階至開府儀同三司
하고 勳上柱國
하며 廣平郡爵公
하야 封戶七千四百
이로되 而
二千一百
이요 賜號推誠保德守正 翊戴功臣
이라
子男四人이니 曰嗣隆은 太常博士요 嗣弼은 殿中丞이요 嗣恭은 太常博士요 嗣先은 大理寺丞이라
謹按程氏之先
은 出自
하야 至休父
하야 爲周司馬
하야 國於程
하니 其後子孫
이 遂以爲氏
라
自秦漢以來
로 世有其人
하야 程氏必顯
하되 而各以其所居著姓
하고 後世因之
하야 至唐尤盛
하니 號稱中山程氏者
는 皆祖
이라
功德之臣은 進受國寵하고 退而銘於器物하니 非獨私其後世라 所以不忘君命하야 示國有人이요
而
하야 聲於詠歌
하야 以揚無窮
이러니 今去古遠
하야 爲制不同
하되 而猶有
과 에 得以紀德昭烈
하고 而又
하니 其所以照臨程氏
하야 恩厚寵榮
이 出古遠甚
이어늘
而臣又得刻銘其下하니 銘은 臣職也라 懼不能稱호라
03. 진안군절도사 동중서문하평장사 증태사중서령 정공의 신도비명
문간공文簡公이 안장安葬되고 나서 2년 뒤에 그 아들 사륭嗣隆이 흐느끼면서 조정에 상언上言하기를 “선신先臣이 요행히 장상將相의 자리에 앉아 관계官階와 관품官品이 모두 제第1등等이고 작爵과 훈勳이 모두 제第2등等입니다.
규정대로 비碑를 세울 수 있기를 청합니다.”라고 하니,
이에 천자께서 “아, 너의 아비 임琳은 우리 국가國家에 노고가 있으니 내가 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시고,
비로소 ‘정로지비旌勞之碑’라고 큰 글씨를 써서 환관을 보내 바로 그의 집에 하사하면서 “이 글씨로 네 아비의 비碑를 명명하라.”고 하시고,
또 사신史臣 수脩에게 조서를 내리시며 “네가 그를 위해 명銘을 지으라.”고 하셨다.
신臣 수脩가 문간공文簡公과 함께 예부터 왕래하면서 그 사람을 알고 또 그의 묘지墓誌를 지은 적이 있으며, 또 기공태사冀公太師의 비碑에 그 세덕世德을 기술한 적이 있어, 그 세계世系와 봉해진 관작官爵과 공훈과 사적을 가장 상세히 알고 있기에 이에 감히 사양하지 않는다.
증조부 휘諱 신新은 태사太師에 추증되었고 증조모는 오국부인吳國夫人 제씨齊氏이다.
조부 휘諱 찬명贊明은 태사중서령太師中書令에 추증되었고 조모는 진국부인秦國夫人 오씨吳氏이다.
부친 휘諱 원백元白은 원주袁州 의춘현령宜春縣令을 지냈고 태사중서령太師中書令 겸상서령兼尙書令 기국공冀國公에 추증되었으며 모친은 진국부인晉國夫人 초씨楚氏이다.
공은 대중상부大中祥符 4년(1011)에 복근사학과服勤詞學科에 응시하여 높은 등수로 급제하고서 비서성교서랑祕書省校書郞 태령군절도추관泰寧軍節度推官으로 임용되었고, 저작좌랑著作佐郞 지병주수양현知幷州壽陽縣 비서승祕書丞 감좌장고監左藏庫로 개차改差되었다.
천희天禧 연간(1017~1022)에 문학文學과 행실이 있는 이를 선발하라고 조서를 내려 불러 시험을 보고는 직집현원直集賢院으로 삼았다.
지금 천자(인종仁宗)께서 즉위하시자 태상박사太常博士 삼사호부판관三司戶部判官으로 옮겼다.
마침 《진종실록眞宗實錄》을 편수編修하는데 기거주起居注가 빠졌기에 공公에게 대중상부大中祥符 8년 이후의 기거주를 추수追修하라고 명하였다.
이 책이 완성되자 마침내 기거주起居注를 편수하고 사부원외랑祠部員外郞으로 옮겨 제사고무諸司庫務의 제거提擧가 되고 본관本官의 지제고知制誥로 동판이부유내전同判吏部流內銓을 겸임하였다.
거란契丹이 사신을 보내 상上의 즉위를 하례賀禮한 적이 있었다.
공에게 사신을 맞이하도록 명하였는데 사신이 함부로 말하는 것이 있자 공이 이치로 그를 꺾어 마침내 사신이 굴복하였다.
그 뒤에 다시 거란이 사신을 보내 천성天聖 5년(1027) 건원절乾元節을 하례하였다.
천자께서 공이 이전에 거란 사신을 꺾은 적이 있음을 생각하고서 이에 공을 관반사館伴使로 삼았는데, 사신이 과연 거란이 중국 사신을 볼 적에 전상殿上에 앉아 위차位次가 높고 중국이 거란 사신을 볼 적에 자리가 낮으니 옮겨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논의하는 자들이 사소한 일이므로 허락해도 된다고 말하고 천자조차도 허락하려고 하였는데, 공이 쟁집爭執하여 “거란이 중국과 사이좋게 지내는 까닭은 선제先帝와의 약속을 지켜서이니 모든 일을 고사故事대로 해야 합니다.
만약 사소한 일을 허락하게 되면 장차 그 큰 일을 허락할 빌미를 주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천자가 이 말이 옳다고 하여 비로소 그만두었다.
그해에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권어사중승權御史中丞으로 옮겼는데 승상丞相 장문절공張文節公은 칭찬하고 허여하는 일이 적었지만 공을 가장 잘 알았다.
공이 바야흐로 중승中丞에 제수될 적에 문절공文節公이 붓을 잡는 자리에 있었는데, 기뻐하면서 “내 붓을 더럽히지 않게 되었구나.”라고 하였다.
이듬해에 추밀직학사樞密直學士 지익주知益州에 배수되었다.
공은 성품이 방정方正하고 중후하며 말하고 웃는 일이 적었고, 어떤 일을 처리하고 계획할 때 항상 미리 검토하고 주밀하게 대비하였다.
그래서 대소大小의 조목條目들이 매우 치밀하였고 일에 임하여서는 간이簡易하고 분명分明하여 요속僚屬들이 그 심중을 엿볼 수가 없었다.
한 번은 밤에 등불을 밝히고 오문五門에 모여 주민州民들을 크게 모이게 하였는데, 성城 안에 화재가 났지만 아전이 공의 지시대로 보고하지 않고 화재가 난 곳으로 가서 바로 진압하니, 연회가 끝나고 백성들이 떠날 때에야 비로소 화재가 있었음을 언뜻 알았다.
고변告變하는 이가 군대가 변란을 도모하고 있다고 한 말을 감군監軍이 듣고서 두려워하며 들어와 보고하자, 공이 웃으면서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라고 하니, 감군監軍이 두려워하고 의혹하면서 감히 떠나지 못하였다.
그러자 공이 “군중軍中의 동정은 내가 본래 알고 있으니 만약 도모하는 자가 있다면 숨길 수가 없다.”라고 하더니, 얼마 뒤에 결국 아무 일도 없었다.
촉蜀 지방에 이빙李氷의 신자神子라고 자신을 일컫는 요망妖妄한 이가 관속官屬과 이졸吏卒을 두고서 촉蜀 지방 백성들을 두렵게 하였는데 공이 잡아 참수하였다.
비방하는 자가 ‘공이 함부로 사람을 죽였으니 촉 지방에 난리가 일어날 것’이라고 하자, 천자가 사람을 보내 달려가 이 일을 살피게 하였다.
사자가 돌아와 “촉 지방 백성들이 공의 정사를 편하게 여기며 바야흐로 안락하게 지내고 있으니, 요망한 이를 죽인 일은 난리를 그치게 하는 방법이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천자 또한 공의 어짊을 알아 불러서 급사중給事中 지개봉부知開封府로 삼았다.
앞서 개봉부를 맡았던 자들이 다스릴 일이 많음을 괴롭게 여겨 한 해를 채우지 않고 그만두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비방을 받거나 어떤 문제들로 인해 떠났지만, 공만은 몇 해를 봉직하면서 오래될수록 정사가 더욱 정명精明하여 도적과 송사訟事가 드물어져서 죄수가 없어 감옥이 자주 비었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자주 공을 칭찬하고 공부시랑工部侍郞 용도각학사龍圖閣學士 수어사중승守御史中丞으로 옮겼는데, 오랜 뒤에 천자가 공이 개봉부를 잘 다스렸던 일을 생각하여 불러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삼고 다시 지개봉부知開封府로 삼았다.
이듬해에 삼사사三司使가 되어 구차한 이익을 기뻐하지 않고 눈앞의 공효功效를 탐하지 않았다.
이때 논의하는 자가 민세民稅의 명목이 번다해서 아전이 간사한 짓을 할 수 있음을 염려하여 그 명목들을 삭제하고 합하여 하나로 만들려고 하자,
공이 “합하여 그 명목들을 없애면 한때는 편리하겠지만 뒤에 이익을 꾀하는 신하가 반드시 다시 명목을 증가시킬 것이니, 이는 거듭 백성들을 곤궁하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논의하는 자가 공의 주장을 꺾을 수 없었다.
대궐을 출입할 때 더욱 근신謹愼하여 궁중宮中에서 때때로 물품을 달라고 하면 주려고 하지 않으니,
환관이 노하여 “폐하께서 비록 원하시더라도 물건이 정모程某에게 있으니 어떻게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상언上言하자,
공이 “신이 폐하를 위해 아껴둔 것일 뿐입니다.”라고 하니 천자가 그러하다고 여겼다.
여러 차례 승진하여 이부시랑吏部侍郞으로 옮겼고, 경우景祐 4년(1037)에 본관本官으로 참지정사參知政事를 맡았다.
공이 더욱 자신을 믿고 의심이 없어 재상이 사사로이 하고자 하는 일이 있으면 그때마다 사람들 앞에서 논척하니, 이때 공이 한 말을 지금까지도 사대부들이 〈기억하여〉 말할 수 있었다.
당초에 범중엄范仲淹이 정사政事를 논한 일로 대신大臣의 심기를 거슬러서 요주饒州에 폄적되었는데, 얼마 있다가 상이 뉘우치고서 다시 그를 쓰려고 하여 조금 내지內地로 옮겨 지륜주知潤州가 되었다.
그런데 범중엄을 미워하는 자가 마침내 어떤 일로 그를 무함하니 그 말이 대궐에 보고되자, 상이 노하여 속히 그를 영남嶺南으로 폄적하라고 명하였다.
범중엄이 폄적되고부터 붕당朋黨의 논의가 일어나 조사朝士들이 연루되어 범중엄에 대한 말을 하는 자는 모두 그 당인黨人으로 지목되었는데, 공이 홀로 상에게 이 일을 말하여 상의 뜻이 풀리게 하고서야 그만두었다.
이때에 조원호趙元昊가 하서河西에서 반란하고 조정朝廷에 일이 많았는데 공이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있으면서 보익補益한 일이 더욱 많으니, 요행을 바라는 소인小人들이 모두 불편하게 여겨 마침내 어떤 일로 공을 중상하여 죄를 받아 광록경光祿卿 지영주知潁州로 폄적되었다.
얼마 있다가 임지를 옮겨 지청주知靑州가 되었고 또 대명부大名府로 옮겼다가 한 해 만에 호부戶部와 이부吏部의 두 시랑侍郞과 상서좌승尙書左丞 자정전학사資政殿學士로 옮겼다.
북경北京을 건립할 때 마침내 공을 유수留守로 삼았는데, 환관 황보계명皇甫繼明이 바야흐로 실권을 잡고 있던 터라 행궁行宮 건설을 주관하여 그 규모를 넓히기를 힘써 은총을 구하였다.
그러자 공이 이를 제지하여 황보계명과 함께 소장疏章을 번갈아 올렸다.
천자가 어사御史 한 명을 보내 가서 살피게 하니, 돌아와 공이 옳다고 하였는데 천자가 황보계명을 파직하고 공에게만 북경 건립의 일을 맡겼다.
공이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된 뒤로부터 논의할 때 사사로운 친분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미움을 받아 폄척貶斥을 당하였다가 얼마 뒤에 조금씩 다시 기용되어 마침내는 황보계명과 시비를 다투게 되었다.
이 때문에 더욱 세상에 함부로 영합하지 않아 비록 다시 크게 쓰여 재상이 되지는 못했지만, 거란契丹이 막 사신을 보내 자주 요구하는 것이 있었고 조원호趙元昊를 토벌했으나 이기지 못하여 서북西北 지방에 대군을 주둔시키고 있었기에, 공은 이때에 천자께서 항상 중요한 하북河北과 섬서陝西를 맡겨 북경北京을 유수留守하게 한 지 네 해 만에 공부상서工部尙書 자정전대학사資政殿大學士 하북안무사河北安撫使로 옮겼다.
경력慶曆 6년(1046)에 무창군절도사武昌軍節度使 섬서안무사陝西安撫使 지영흥군부사知永興軍府事에 배수되었고, 이듬해에 선휘북원사宣徽北院使 부연로경략사鄜延路經略使 마보군도부서馬步軍都部署 판연주判延州의 직임이 더해졌고, 섬서안무사陝西安撫使까지 겸하였다.
황우皇祐 원년元年(1049)에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유수북경留守北京의 직임이 더해졌다.
공은 〈요遼와 서하西夏〉 두 변방에 위엄과 은혜가 참으로 드러났고 이적夷狄의 실정實情과 산천山川의 험역險易와 군대를 움직이고 적군을 제압하는 요점을 더욱 잘 알았다.
공이 연주延州에 있을 적에 서하西夏 사람 수백 명이 가축을 몰아 국경에 이르러 투항하기를 청하면서
“거란의 군대가 서하의 아두衙頭에까지 이르러 나라에 장차 난리가 일어날 것이니 스스로 귀순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거란의 군대가 조원호趙元昊의 군막에 이르렀다면 서하국 전체를 취하였을 것이니 어찌 와서 투항하는 자가 있을 수 있겠는가.
내 들으니 서하 사람이 지금 바야흐로 반란한 부족을 체포한다고 하니 이들이 바로 그들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를 유인하려는 수작일 것이다.”라 하며 거부하고 받지 않았는데, 얼마 뒤에 서하 사람이 과연 군대 수만 명을 이끌고 국경에 이르렀다.
공이 주둔하고 있는 장수들에게 경솔히 군대를 출동해서는 안 된다고 경계하니 서하 사람들이 대비가 되어 있다 여기고서 군대를 이끌고 떠나서는 이로부터 다시 변방을 엿보지 않았다.
공이 하북河北에 있은 것이 가장 오래되었기에 백성들이 흠모하여 공을 위해 생사生祠를 세웠다.
이듬해에 무승군절도사武勝軍節度使로 개차改差되어 여전히 북경北京에 있었고 또 진안군절도사鎭安軍節度使로 개차되었다.
진안군에 있은 지 4년 만에 오히려 상소를 올리되 “진안鎭安은 일개 군郡일 뿐이니 제 능력을 바치기에 부족합니다.
원컨대 다시 변방을 지키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상소에 대한 비답批答이 내려지기도 전에 병이 들어 지화至和 3년(1056) 윤3월 7일 기축일에 진주陳州의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9세였다.
천자께서 조회를 이틀 동안 정지하고 중서령中書令을 추증하고 시호를 문간文簡이라고 하였다.
이듬해 태묘太廟에서 합사合祀할 때 추은推恩하여 공公에게 태사상서령太師尙書令을 더하여 추증하였다.
공은 누차 관계官階가 올라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에 이르렀고 상주국上柱國의 훈勳이 내려졌으며 광평군공廣平郡公의 작爵이 내려져 봉호封戶가 7,400호였는데 실봉實封은 2,100호였고 추성보덕수정推誠保德守正 익대공신翊戴功臣이라는 공신호功臣號가 하사되었다.
공은 진씨陳氏를 부인으로 맞이하였으니 위국부인衛國夫人에 봉해졌다.
자식은 아들이 네 명이니 사륭嗣隆은 태상박사太常博士이고, 사필嗣弼은 전중승殿中丞이고, 사공嗣恭은 태상박사太常博士이고, 사선嗣先은 대리시승大理寺丞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정씨程氏의 선조는 중려重黎로부터 나와 휴부休父에 이르러 주周나라의 사마司馬가 되어 정程 땅에 봉국封國을 받았으니, 그 뒤에 자손들이 마침내 정程을 씨氏로 삼았다.
진秦‧한漢 이래로 대대로 인물이 있어 정씨程氏가 꼭 현달하였는데 각기 살던 곳을 가지고 관향을 삼아 성姓을 드러내었고, 후세에 이를 그대로 따라 당唐나라에 이르러 더욱 번성하였으니 중산中山 정씨程氏라고 일컫는 이들은 모두 위魏 안향후安鄕侯 욱昱을 선조로 한다.
대대로 쌓은 덕이 있더니 공에 이르러 비로소 크게 드러나고 알려졌다.
옛날에 공덕功德이 있는 신하는 조정에 나아가면 국가의 은총을 받고 조정에서 물러나면 기물器物에 명銘이 새겨지니, 이는 그 후세에까지 사사로이 잘 대우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임금의 명을 잊지 않고서 훌륭한 사람이 있음을 국중國中에 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시인詩人이 또 그 사적事迹을 전파하여 노래로 불러 무궁한 후세에 기렸는데, 지금은 옛날과 시대가 멀어 제도制度가 같지 않으나 그래도 유당幽堂의 돌과 수도隧道의 비碑에 덕행을 기술하고 공업을 드러낼 수 있고 또 다행히 천자의 글을 받아 명명하게 되니, 정씨程氏를 밝게 살펴 두터이 은총과 영화를 내리심이 옛날보다 더욱 훨씬 큽니다.
그런데 신이 게다가 그 아래에 명銘을 새길 수 있게 되니 명銘을 짓는 것은 신의 직분인지라 하명下命에 부응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