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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3)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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惟閻氏世家于鄆이라
其先曰 以武顯於梁晉之間하고 實佐莊宗하야 戰河上하야하니 功書史官하고 爵有王土하니 鄆之諸閻 皆王後也
하니 閻氏今爲濟州鉅野人也
公生漢晉之間하야 遭世多虞하야 雖出將家 而不喜戰鬪하고 獨好學하야하고 頗習子史하야 爲文辭러라
是時 鉅野大賊有衆千餘人이라
以公鄕里儒者라하야 掠致賊中하야 問以謀略한대 公毅然未嘗有所言이나
而爲人狀貌奇偉하고 擧止嚴重有威儀하니 賊皆憚之하야 莫敢害러라
賊平 公還鄕里하야 以三禮敎授弟子러니
大宋受命하야 天下將平이라 公乃出하야 하야 한대 皆有吏績이라
太宗皇帝遣使者行視天下한대
使者還하야 言公可用이어늘 召見奏事 語音鬯然하니 殿中皆聳動이라
太宗奇之하야러라
어늘 天子以爲新附之邦이라하야 乃以禁兵千人으로 屬公安撫其人이라 遂知蘇州하다
五代之際 하야 大者竊名號하고 其次擅征伐이라
故皆峻刑法하고 急聚斂하야 以制命於其民이라
越雖名爲臣屬之邦이나 然閡於江淮하야 與中國隔不相及者久矣
公以齊魯之人으로 悉能知越風俗하야 而揉以善政하되 或摩以漸하고 或革以宜하야 推凡上之所欲施하고 寬凡民之所不堪하야 恩涵澤濡 民以蘇息이라
이라 公以으로 求知黃州러니
陳王徙封許 乃詔公還하야하야하고 侍講許王府하다
王薨 公出知러니 居歲餘 以淮陽近鉅野라하야 乃求知하다
公雖居許王府 而眞宗素知其賢하야 數詔訪以經術하고 謂之閻君子러라
眞宗卽位 問公何在한대 左右具言所以然하니 卽時召之
已在道 拜金部郞中知靑州러라
其後鄆州守臣某臨遣 對殿上할새 眞宗問鄆去靑遠近한대 守臣對若干하니 眞宗曰 爲吾告之하라
將召也리라하더니 已而見召하야 行至鉅野하야 遇疾이라
使者臨問慰賜하고 滿百日하야 賜告下濟州하고 伺疾少間하야 趨就道러니 已而疾하야 以某年某月某日薨于濟州하니 享年七十有七이라
贈兵部侍郞하고 葬于鉅野大徐村하다
公諱象이요 字某
曾祖諱某 某官이요 祖諱某 某官이요 考諱某 某官이라
公娶孫氏하니 封富春縣君이라가 用子貴 追封泗水縣太君하다
子男三人이니 長曰某 某官이요 次曰某 某官이요 次曰某 某官이라
女三人 皆適士族하다
孫五人 一早亡하고 次皆已仕
曾孫十人 仕者五人이라
嗚呼 士患不逢時 時逢矣 患人主之不知 知矣而不及用者 命也
惟公履道純正하야 生於多艱而卒遇太平하야 以奮其身하고 又遭人主之知하야 嘗用矣 而不暇於大用以歿하니 歿而無章焉이면 則其遂不見於後世乎인저
景祐五年冬 其子光祿君 自光化罷還鄕閭하야 乃謀刻其先德於墓之碑할새 而以其辭屬脩
詞曰
閻氏將家
有封太原하니
王公桓桓이라
公不勇力하고
而勇於學이라
奮身逢時하야
卒有成業이라
不大其榮이요
繼世而卿이로다
其後世하야
多有孫曾이라
有墓于里하니
有碑其隧
鄕人無傷이어다
鄕之君子니라


06. 금부낭중 증병부시랑 염공의 신도비명
염씨閻氏는 대대로 운주鄆州에 살았다.
그 선조는 태원왕太原王 인데 무공武功으로 후량後梁후진後晉시대에 드러났고 실로 장종莊宗을 보좌하여 하상河上에서 전투하여 상산常山을 점령하니 전공戰功사관史官에 기록되고 봉작封爵으로 왕토王土를 소유하니 운주의 염씨閻氏들은 모두 태원왕의 후예이다.
후주後周 광순廣順 2년(952)에 운주의 거야鉅野, 운성鄆城제주濟州로 삼았으니, 염씨가 지금은 제주濟州거야鉅野 사람이 되었다.
공은 후한後漢후진後晉시대에 태어나 변란이 많은 세상을 만나 비록 장수의 집안 사람이지만, 전투를 좋아하지 않고 유독 학문을 좋아하여 삼례三禮를 통달하고 자사子史를 자못 익혀서 문장文章을 지었다.
이때에 거야鉅野대적大賊이 천여 명이나 되는 무리를 이루었다.
공이 향리鄕里유자儒者라고 하여 도적 소굴에 잡아다 놓고 책략을 물었는데 공은 의연한 모습으로 말을 해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외모가 기위奇偉하고 행동이 엄중嚴重하여 위의威儀가 있으니 도적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해치지 못하였다.
도적들이 소탕되자 공은 향리鄕里로 돌아와 삼례三禮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대송大宋이 천명을 받아 천하가 안정되어 가자 공이 비로소 세상에 나와 삼례三禮에 밝다고 추천되어 건륭建隆 모년某年 모과某科에 급제하여, 한주漢州금당金堂괵주虢州호성湖城에서 현위縣尉를 역임하고 복주濮州 복양령濮陽令으로 옮겼는데 모두 관리로서 치적이 있었다.
태종황제太宗皇帝께서 사자使者를 보내 천하를 시찰하게 하였다.
사자가 돌아와 공이 쓸 만한 인재라고 말하자 불러 보고 일을 아뢰게 하였는데 공의 음성이 창달暢達하기에 전중殿中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태종이 훌륭하게 여겨 태자세마太子洗馬 지악주知岳州를 배수하였다.
오월吳越 충의왕忠懿王경사京師에 거듭 조회 와서 그가 소유하고 있던 절동浙東절서浙西 땅의 문적文籍을 가지고 와서 유사有司에게 바치자, 천자가 새로 귀부歸附한 나라라고 하시며 금병禁兵 천 명을 공에게 맡기면서 그곳 백성을 안무安撫하게 하시므로 마침내 소주蘇州를 맡았다.
오대五代시대에 강해江海 지역이 다섯 나라로 나뉘어 강대한 나라는 왕호王號를 참칭하고 나머지 나라는 정벌征伐을 마음대로 하였다.
그래서 모든 나라들이 형법刑法을 준엄하게 집행하고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어 그 백성들의 목숨을 틀어쥐었다.
이 비록 겉으로는 송에 귀속된 나라라고는 하지만 장강長江회하淮河에 가로막혀 있어 중국中國과 격절되어 서로 교통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공이 제노齊魯 지방 사람이면서도 월의 풍속을 자세히 잘 알고서 선정善政으로 바로잡되 점진적으로 교화하기도 하고 시의時宜를 보아 고치기도 하면서 이 시행하고 싶어 하는 것들을 헤아리고 백성들이 견디지 못하는 것들을 너그럽게 풀어주어 은택이 스며들게 되자 백성들이 소생하고 휴식하였다.
정사政事가 이루어지자 천자가 국자박사國子博士 지제주知濟州소환召還하였고 이어 또 지진주知晉州로 삼았으며, 조정에 들어와 상서수부원외랑尙書水部員外郞 광평군왕부익선廣平郡王府翊善을 배수하고 비의은어緋衣銀魚를 하사하였다.
6년 만에 광평군왕廣平郡王진왕陳王으로 진봉進封되어 봉국으로 나가게 되었기에 공이 사문원외랑司門員外郞으로 황주黃州를 맡기를 청하였다.
진왕陳王에 옮겨 봉해지게 되자 비로소 공에게 돌아오라고 명하여 고부원외랑庫部員外郞으로 옮겨주면서 금자金紫를 하사하고 허왕부許王府에서 시강侍講하게 하였다.
허왕許王이 세상을 떠나자 공이 조정을 떠나 체주棣州를 맡았는데 한 해 남짓 지날 무렵에 회양淮陽거야鉅野에 가깝다고 하여 회양군淮陽軍을 맡기를 청하였다.
공이 비록 허왕부許王府에 있었지만 진종眞宗이 평소 공의 어짊을 알고서 자주 조서를 내려 경술經術에 대해 자문을 구하며 공을 염군자閻君子라고 일컬었다.
진종眞宗이 즉위하고 나서 공이 어디에 있는지 하문하자 모시고 있는 이들이 자초지종을 갖추어 아뢰니 즉시 공을 불렀다.
상경하는 도중에 금부낭중金部郞中 지청주知靑州를 배수하였다.
그 뒤 운주수신鄆州守臣 가 부임하는 명을 받으면서 전상殿上에서 알현할 적에 진종眞宗이 운주가 청주에서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묻자 수신守臣이 얼마쯤 된다고 대답하니, 진종이 “나를 위해 그에게 고하라.
내 장차 그를 부를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얼마 뒤 공이 소명召命을 받고 상경하는 길에 거야鉅野에 이르러 병에 걸렸다.
그래서 사신이 찾아가 문안하며 위로하고 100일 동안 말미를 주어 제주濟州에 내려갔다가 병이 조금 차도가 보일 때를 엿보아 상경하라고 재촉하였는데, 얼마 뒤 병이 위급해져서 모년 모월 모일에 제주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享年 77세였다.
병부시랑兵部侍郞에 추증되었고 거야鉅野 대서촌大徐村에 장사 지냈다.
공은 이고 이다.
증조부 모관某官을 지냈고 조부 모관某官을 지냈으며 부친 모관某官을 지냈다.
공은 손씨孫氏를 부인으로 맞이하였으니 부춘현군富春縣君에 봉해졌다가 현달顯達한 아들로 인해 사수현태군泗水縣太君추봉追封되었다.
자식은 아들이 세 명이니 장자는 이니 모관某官이고, 둘째는 이니 모관某官이고, 셋째는 이니 모관某官이다.
딸 세 명은 모두 사족士族에게 시집갔다.
손자 다섯 사람은 첫째는 요절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이미 벼슬길에 나섰다.
증손자 열 명 중에 벼슬하고 있는 이가 다섯 사람이다.
아, 선비는 때를 만나지 못함을 근심하고 때를 만나면 임금이 알아주지 못함을 근심하니 임금이 알아주는데도 미처 등용되지 못하는 것은 운명이다.
그런데 오직 공은 정도正道를 따르고 성품이 순정純正하여 국가가 다난한 때에 태어났으면서도 끝내는 태평한 세상을 만나 몸소 분발하였고, 또 임금의 지우를 입어 등용되었으나 크게 쓰일 겨를도 없이 세상을 떠났으니 세상을 떠났는데 표창함이 없다면 끝내 후세에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
경우景祐 5년(1038) 겨울에 그 아들 광록군光祿君광화光化 수령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비로소 묘비墓碑에 그 선덕先德을 새길 것을 도모할 적에 그 문장을 나에게 부탁하였다.
는 다음과 같다.
염씨閻氏는 장수 가문이니
대독大纛고아高牙를 휘날렸네
태원太原에 봉해지니
왕공王公이 굳세고 헌걸차도다
공은 무력에 용감하지 않고
학문에 용감하였는지라
몸을 떨쳐 때를 만나
마침내 공업을 이루었네
그 영화를 크게 여기지 않고
대를 이어 이 되었네
그 후세가 번창하여
훌륭한 후손들 많이 두었네
향리에 묘를 세우니
묘수墓隧에 비석이 섰구나
이 고을 사람은 손상시키지 말라
공은 이 고을의 군자이시네


역주
역주1 : 金部郞中은 戶部의 金部司 관원으로, 錢帛을 출납하는 일을 관장하였다. 또한 平準, 專賣, 商稅, 香茶, 鹽田 등에 관한 사무를 맡았다. 閻公은 閻象으로 五代 때 閻寶의 후손이다. 陳王 趙元僖의 막부에서 供職한 적이 있다. 《宋史》에 傳記가 있다.
역주2 太原王寶 : 五代 때 太原王 閻寶로 자는 琼美이다. 처음에 朱瑾의 牙將이 되었는데 뒤에 後梁에 투항하였고 이어 後晉에 투항하니 晉王이 檢校太尉 同中書門下平章事로 삼아 領天平軍節度使 東南面招討使를 맡게 하였다. 후량과 후진이 胡柳에서 전투할 때 염보가 莊宗을 도와 후량 군대를 크게 무찔렀다. 후진의 군대가 鎭州에서 張文禮를 토벌할 때 염보를 招討使로 삼았다. 뒤에 군대가 패배하여 병으로 졸하니 太原王으로 追封되었다. 新舊 《五代史》에 모두 傳記가 있다.
역주3 常山 : 지금의 河北省, 山西省 북부 일대이다.
역주4 周廣順二年 : 廣順은 周 太祖의 연호(951~953)이다.
역주5 以鄆州之鉅野鄆城爲濟州 : 鄆州의 鉅野, 鄆城을 떼어서 濟州를 설치한 일을 가리킨다. 鉅野는 지금의 山東省 鉅野縣으로, 광순 2년에 濟州府의 治所를 이곳에 두었다. 鄆城은 지금의 山東省에 속한다.
역주6 三禮 : 儒家의 경전인 《周禮》, 《儀禮》, 《禮記》의 합칭이다.
역주7 以三禮擧中建隆某年某科 : 三禮에 밝다고 하여 추천을 받아 고시에 참가하여 급제한 일을 가리킨다. 建隆은 宋 太祖의 연호(960~963)이다.
역주8 歷漢州之金堂虢州之湖城二縣尉 遷濮州濮陽令 : 漢州는 宋代에 成都府路에 속했는데 치소는 雒이었다. 金堂은 唐 咸亨 연간에 簡州 및 雒, 新都, 金水 세 현을 나누어 만든 것으로 境內에 金堂山이 있어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 虢州는 송대에 永興路에 속했는데 치소는 지금의 河南省 靈寶로, 바로 湖城이다. 濮州는 송대에 京東路에 속했는데 치소는 鄄城에 있었다. 濮陽은 지금의 河南省에 속한다.
역주9 太子洗馬知岳州 : 太子洗馬는 東宮의 屬官으로 太子先馬라고도 하는데 經典과 圖書의 繕寫와 간행 및 倚仗 등의 일을 관장하였다. 岳州는 송대에 荊湖 北路에 속했는데 치소는 巴陵에 있었다.
역주10 吳越忠懿王……納之有司 : 太平興國 3년(978)에 錢俶이 자신이 관할하고 있는 13州의 땅을 송나라에 바쳤다. 吳越 忠懿王은 吳越王 錢俶이다. 뒤에 송나라에 귀의하여 秦國王에 추봉되고 忠懿라는 시호를 받았다.
역주11 江海之間 分爲五 : 長江 이남 지역이 南唐, 吳越, 南漢, 楚, 南平 다섯 나라로 분열되어 있던 일을 가리킨다.
역주12 國子博士……又知晉州 : 國子博士는 國子監博士로 國子監에는 四門博士를 설치하여 생도들을 가르치는 일을 맡았다. 晉州는 송대에 河東路에 속했는데 치소는 白馬城에 있었다.
역주13 尙書水部員外郞 廣平郡王府翊善 : 水部員外郞은 工部의 속관으로, 하천 정비, 橋梁, 船舶, 漕運 등에 관한 사무를 맡았다. 北宋 前期에는 직임이 없는 寄祿官일 뿐이었다. 廣平郡王은 이름이 元僖로 태종의 둘째 아들인데 처음에 廣平郡王에 봉해졌고 뒤에 陳王, 許王으로 進封되었다. 淳化 3년(992)에 졸하니 皇太子에 추증되었다. 翊善은 諸王府의 요속으로, 항상 常參官으로 임명하였다.
역주14 緋衣銀魚 : 紅色의 의복과 銀으로 만든 물고기 모양의 腰帶 장식으로 5品官의 복식이다.
역주15 居六年 廣平封陳王出閤 : 《宋史》 〈宗室傳 2〉에 의하면, 趙元僖는 太平興國 7년(982)에 廣平郡王에 봉해지고 8년에 陳王으로 진봉되었다. 閻象은 태평흥국 2년에 王府에 들어왔으니 그때 조원희는 아직 왕으로 봉해지지 않았다. 본집에는 ‘閤’이 ‘閣’으로 되어 있다.
역주16 司門員外郞 : 司門은 刑部에 속하는 관청으로, 關門, 津梁, 道路의 禁令 및 그것들을 폐쇄하고 설치하는 일을 관장하였다.
역주17 庫部員外郞 : 庫部는 宋代에 兵部에 속하는 관청으로, 軍器, 儀仗, 法式 등의 사무를 관장하였다.
역주18 金紫 : 金魚袋와 紫衣를 가리킨다.
역주19 棣州 : 宋代에 河北東路에 속했는데 치소는 지금의 山東省 惠民縣에 있었다.
역주20 淮陽軍 : 宋代에 軍州의 명칭으로, 京東路에 속했는데 太平興國 7년에 徐州 下邳縣을 軍으로 삼고 下邳, 宿遷 두 현을 관할하게 하였다.
역주21 : 본집에는 ‘病’으로 되어 있다.
역주22 大纛高牙 : 纛은 수레의 위에 소꼬리털이나 꿩털과 닭털을 사용하여 만든 장식물이다. 高牙는 깃대 위에 상아로 장식한 牙旗로, 지위가 높은 武官의 儀仗이다.
역주23 (挺)[挻] : 저본에는 ‘挺’으로 되어 있으나, 본집에 의거하여 ‘挻’으로 바로잡았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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