其先曰
니 以武顯於梁晉之間
하고 實佐莊宗
하야 戰河上
하야 取
하니 功書史官
하고 爵有王土
하니 鄆之諸閻
은 皆王後也
라
公生漢晉之間
하야 遭世多虞
하야 雖出將家
나 而不喜戰鬪
하고 獨好學
하야 通
하고 頗習子史
하야 爲文辭
러라
以公鄕里儒者라하야 掠致賊中하야 問以謀略한대 公毅然未嘗有所言이나
而爲人狀貌奇偉하고 擧止嚴重有威儀하니 賊皆憚之하야 莫敢害러라
大宋受命
하야 天下將平
이라 公乃出
하야 하야 한대 皆有吏績
이라
使者還하야 言公可用이어늘 召見奏事에 語音鬯然하니 殿中皆聳動이라
어늘 天子以爲新附之邦
이라하야 乃以禁兵千人
으로 屬公安撫其人
이라 遂知蘇州
하다
越雖名爲臣屬之邦이나 然閡於江淮하야 與中國隔不相及者久矣라
公以齊魯之人으로 悉能知越風俗하야 而揉以善政하되 或摩以漸하고 或革以宜하야 推凡上之所欲施하고 寬凡民之所不堪하야 恩涵澤濡에 民以蘇息이라
陳王徙封許
라 乃詔公還
하야 遷
하야 賜
하고 侍講許王府
하다
王薨
에 公出知
러니 居歲餘
에 以淮陽近鉅野
라하야 乃求知
하다
公雖居許王府나 而眞宗素知其賢하야 數詔訪以經術하고 謂之閻君子러라
眞宗卽位에 問公何在한대 左右具言所以然하니 卽時召之라
其後鄆州守臣某臨遣에 對殿上할새 眞宗問鄆去靑遠近한대 守臣對若干하니 眞宗曰 爲吾告之하라
將召也리라하더니 已而見召하야 行至鉅野하야 遇疾이라
使者臨問慰賜
하고 滿百日
하야 賜告下濟州
하고 伺疾少間
하야 趨就道
러니 已而疾
하야 以某年某月某日薨于濟州
하니 享年七十有七
이라
曾祖諱某는 某官이요 祖諱某는 某官이요 考諱某는 某官이라
公娶孫氏하니 封富春縣君이라가 用子貴로 追封泗水縣太君하다
子男三人이니 長曰某니 某官이요 次曰某니 某官이요 次曰某니 某官이라
嗚呼라 士患不逢時요 時逢矣에 患人主之不知니 知矣而不及用者는 命也라
惟公履道純正하야 生於多艱而卒遇太平하야 以奮其身하고 又遭人主之知하야 嘗用矣나 而不暇於大用以歿하니 歿而無章焉이면 則其遂不見於後世乎인저
景祐五年冬에 其子光祿君이 自光化罷還鄕閭하야 乃謀刻其先德於墓之碑할새 而以其辭屬脩라
그 선조는 태원왕太原王 보寶인데 무공武功으로 후량後梁과 후진後晉시대에 드러났고 실로 장종莊宗을 보좌하여 하상河上에서 전투하여 상산常山을 점령하니 전공戰功이 사관史官에 기록되고 봉작封爵으로 왕토王土를 소유하니 운주의 염씨閻氏들은 모두 태원왕의 후예이다.
후주後周 광순廣順 2년(952)에 운주의 거야鉅野, 운성鄆城을 제주濟州로 삼았으니, 염씨가 지금은 제주濟州의 거야鉅野 사람이 되었다.
공은 후한後漢과 후진後晉시대에 태어나 변란이 많은 세상을 만나 비록 장수의 집안 사람이지만, 전투를 좋아하지 않고 유독 학문을 좋아하여 삼례三禮를 통달하고 자사子史를 자못 익혀서 문장文章을 지었다.
이때에 거야鉅野의 대적大賊이 천여 명이나 되는 무리를 이루었다.
공이 향리鄕里의 유자儒者라고 하여 도적 소굴에 잡아다 놓고 책략을 물었는데 공은 의연한 모습으로 말을 해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외모가 기위奇偉하고 행동이 엄중嚴重하여 위의威儀가 있으니 도적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해치지 못하였다.
도적들이 소탕되자 공은 향리鄕里로 돌아와 삼례三禮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대송大宋이 천명을 받아 천하가 안정되어 가자 공이 비로소 세상에 나와 삼례三禮에 밝다고 추천되어 건륭建隆 모년某年 모과某科에 급제하여, 한주漢州의 금당金堂과 괵주虢州의 호성湖城에서 현위縣尉를 역임하고 복주濮州 복양령濮陽令으로 옮겼는데 모두 관리로서 치적이 있었다.
태종황제太宗皇帝께서 사자使者를 보내 천하를 시찰하게 하였다.
사자가 돌아와 공이 쓸 만한 인재라고 말하자 불러 보고 일을 아뢰게 하였는데 공의 음성이 창달暢達하기에 전중殿中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태종이 훌륭하게 여겨 태자세마太子洗馬 지악주知岳州를 배수하였다.
오월吳越 충의왕忠懿王이 경사京師에 거듭 조회 와서 그가 소유하고 있던 절동浙東과 절서浙西 땅의 문적文籍을 가지고 와서 유사有司에게 바치자, 천자가 새로 귀부歸附한 나라라고 하시며 금병禁兵 천 명을 공에게 맡기면서 그곳 백성을 안무安撫하게 하시므로 마침내 소주蘇州를 맡았다.
오대五代시대에 강해江海 지역이 다섯 나라로 나뉘어 강대한 나라는 왕호王號를 참칭하고 나머지 나라는 정벌征伐을 마음대로 하였다.
그래서 모든 나라들이 형법刑法을 준엄하게 집행하고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어 그 백성들의 목숨을 틀어쥐었다.
월越이 비록 겉으로는 송에 귀속된 나라라고는 하지만 장강長江과 회하淮河에 가로막혀 있어 중국中國과 격절되어 서로 교통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공이 제노齊魯 지방 사람이면서도 월의 풍속을 자세히 잘 알고서 선정善政으로 바로잡되 점진적으로 교화하기도 하고 시의時宜를 보아 고치기도 하면서 상上이 시행하고 싶어 하는 것들을 헤아리고 백성들이 견디지 못하는 것들을 너그럽게 풀어주어 은택이 스며들게 되자 백성들이 소생하고 휴식하였다.
정사政事가 이루어지자 천자가 국자박사國子博士 지제주知濟州로 소환召還하였고 이어 또 지진주知晉州로 삼았으며, 조정에 들어와 상서수부원외랑尙書水部員外郞 광평군왕부익선廣平郡王府翊善을 배수하고 비의은어緋衣銀魚를 하사하였다.
6년 만에 광평군왕廣平郡王이 진왕陳王으로 진봉進封되어 봉국으로 나가게 되었기에 공이 사문원외랑司門員外郞으로 황주黃州를 맡기를 청하였다.
진왕陳王이 허許에 옮겨 봉해지게 되자 비로소 공에게 돌아오라고 명하여 고부원외랑庫部員外郞으로 옮겨주면서 금자金紫를 하사하고 허왕부許王府에서 시강侍講하게 하였다.
허왕許王이 세상을 떠나자 공이 조정을 떠나 체주棣州를 맡았는데 한 해 남짓 지날 무렵에 회양淮陽이 거야鉅野에 가깝다고 하여 회양군淮陽軍을 맡기를 청하였다.
공이 비록 허왕부許王府에 있었지만 진종眞宗이 평소 공의 어짊을 알고서 자주 조서를 내려 경술經術에 대해 자문을 구하며 공을 염군자閻君子라고 일컬었다.
진종眞宗이 즉위하고 나서 공이 어디에 있는지 하문하자 모시고 있는 이들이 자초지종을 갖추어 아뢰니 즉시 공을 불렀다.
상경하는 도중에 금부낭중金部郞中 지청주知靑州를 배수하였다.
그 뒤 운주수신鄆州守臣 모某가 부임하는 명을 받으면서 전상殿上에서 알현할 적에 진종眞宗이 운주가 청주에서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묻자 수신守臣이 얼마쯤 된다고 대답하니, 진종이 “나를 위해 그에게 고하라.
내 장차 그를 부를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얼마 뒤 공이 소명召命을 받고 상경하는 길에 거야鉅野에 이르러 병에 걸렸다.
그래서 사신이 찾아가 문안하며 위로하고 100일 동안 말미를 주어 제주濟州에 내려갔다가 병이 조금 차도가 보일 때를 엿보아 상경하라고 재촉하였는데, 얼마 뒤 병이 위급해져서 모년 모월 모일에 제주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享年 77세였다.
병부시랑兵部侍郞에 추증되었고 거야鉅野 대서촌大徐村에 장사 지냈다.
증조부 휘諱 모某는 모관某官을 지냈고 조부 휘諱 모某는 모관某官을 지냈으며 부친 휘諱 모某는 모관某官을 지냈다.
공은 손씨孫氏를 부인으로 맞이하였으니 부춘현군富春縣君에 봉해졌다가 현달顯達한 아들로 인해 사수현태군泗水縣太君에 추봉追封되었다.
자식은 아들이 세 명이니 장자는 모某이니 모관某官이고, 둘째는 모某이니 모관某官이고, 셋째는 모某이니 모관某官이다.
손자 다섯 사람은 첫째는 요절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이미 벼슬길에 나섰다.
증손자 열 명 중에 벼슬하고 있는 이가 다섯 사람이다.
아, 선비는 때를 만나지 못함을 근심하고 때를 만나면 임금이 알아주지 못함을 근심하니 임금이 알아주는데도 미처 등용되지 못하는 것은 운명이다.
그런데 오직 공은 정도正道를 따르고 성품이 순정純正하여 국가가 다난한 때에 태어났으면서도 끝내는 태평한 세상을 만나 몸소 분발하였고, 또 임금의 지우를 입어 등용되었으나 크게 쓰일 겨를도 없이 세상을 떠났으니 세상을 떠났는데 표창함이 없다면 끝내 후세에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
경우景祐 5년(1038) 겨울에 그 아들 광록군光祿君이 광화光化 수령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비로소 묘비墓碑에 그 선덕先德을 새길 것을 도모할 적에 그 문장을 나에게 부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