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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4)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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誌族父如此니라
歐陽氏世爲이라 廬陵於五代時 故歐陽氏在五代無聞者러니
三年 修仲父府君 始以進士中乙科하고 其後爲御史有能名이라
眞宗嘗自擇御史한대 府君 以祕書丞召見하니
見者數人 皆進自稱薦하야 惟恐不用이로되 府君獨立墀下하야 無所說한대
明日拜監察御史 中丞指曰 是獨立墀下者 眞御史也라하다
會絳州守齊化基犯法이라 制劾其事하니 化基 嗣宗素所惡者 諷之하야 欲使蔓其獄한대 府君曰 如詔而已라하니
嗣宗怒하야 及獄上奏하니 用他吏覆之하야 索其家하야 得銅器十數 府君坐鞫獄不盡하야 免官이라
明年 復得御史하야 監蘄州稅하고 又明年하고
居二歲 奏事殿中하니 眞宗識之하야 勞曰 御史久矣 亦勞乎라하고 問何所欲한대 府君謝不任職而已
後數日 眞宗語宰相與轉運使하니 宰相疑其有求하야 而不先白己하고 對以員無闕이라
復使與一大郡하니 宰相召至中書하야 問御史家何在 欲郡孰爲便고한대
對曰無不便이라하니 宰相怒하야
天禧元年 入遷侍御史하고 三年 出知하다
先是 京師歲旱 有浮圖人 斷臂禱雨어늘 官爲起寺於이라 自京師王公大臣으로 皆禮下之하니 其勢傾動四方이요
又誘民男女하야 投淮水死曰 佛之法 用此得大利라하니 而愚民歲死淮水者幾百人이라
至其臨溺時하야 用其徒倡呼前後하야 擁之以入하니 至有自悔欲走者라도 叫號不得免이라
府君聞之하고 驚曰害有大於此邪아하고 盡捕其徒하야 詰其姦民하야 誅數人하고 遣還鄕里者數百人이라 遂毁其寺러라
入轉尙書司封員外郞 三司戶部判官하고 六年 爲廣南東路轉運使
前爲使者物代俸錢하야 其利三倍어늘 府君歎曰 利豈吾欲邪아하고 使直以錢爲俸이러라
今上卽位 就轉工部郞中하고 秩滿 以一弊舟還하니 無一海上物이라
歸朝 賜金紫하고 爲兩浙路轉運使러니 以足疾 求知江州러라
天聖四年又求러니 未得命 以其年二月某日 卒於江州之廨하니 享年六十有八이라 以某年某月某日 葬某所하다
曾祖諱某 祖諱某 吉州軍事判官이요 父諱某 僞唐屯田員外郞이라
娶朱氏하니 封金壇縣君이요 先府君以卒이라 嗣子鑒 爲右侍禁 武昌巡檢이라 女二人이니 長適某 次未嫁
府君 諱載 字則之 性方直嚴謹하며 治身儉薄하고 簡言語
爲政務淸淨하고 平居斂色而坐 如對大賓하야 終日不少懈弛하니 人用憚之
薦擧下吏 人未嘗知 後有知者來謝어든 皆拒不納이라
所至官舍 未嘗窺園圃하야 至果爛墮地하야도 家人無敢取者하니 其淸如此러라
銘曰 唐隳盜猖 土裂四方이요 鍾氏於洪 入州自王이라
歐陽是家하야 世以不章하니
歐陽有聞 始我仲父 以貢中科하고 來者繼武
仲父之材 御史其能이니 廉淸儉恭하야 直躬以行이라 銘以藏之하니 子孫之承이니라


02. 尙書工部郞中 歐陽公墓誌銘
族叔父의 묘지명은 이와 같은 법이다.
歐陽氏는 대대로 廬陵人이다. 廬陵五代시대에 僞吳에 속한 곳이었다. 그러므로 五代시대를 살았던 歐陽氏 중에 명성이 드러난 사람이 없다.
그러다가 淳化 3년(992)에 나의 仲父 府君께서 처음으로 進士試乙科로 합격하고 그 뒤에 御史가 되어 유능하다는 평판이 있었다.
眞宗 황제께서 御史가 될 사람을 손수 가려 뽑으신 적이 있었는데, 중부 부군께서 당시 祕書丞의 신분으로 부름을 받아 나아가 알현하였다.
알현하러 온 여러 사람들이 모두 나아와 스스로를 천거하면서 어사로 등용되지 못할까 걱정하였으나, 중부 부군은 섬돌 아래에 홀로 서서 말이 없었다.
그런데 다음날 중부 부군이 監察御史拜受되었다. 御史中丞 王嗣宗이 중부 부군을 가리키면서 “섬돌 아래 홀로 서 있던 이 사람이 참된 어사이다.”라고 하였다.
때마침 絳州知州齊化基을 범하여 황제가 조칙으로 그 일을 조사하게 하였다. 제화기는 평소 왕사종이 미워하던 사람인지라 옥사를 부풀려 제화기의 죄를 무겁게 만들라고 왕사종이 중부 부군에게 넌지시 뜻을 전하였으나, 중부 부군께서는 “조칙대로 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왕사종이 노하여, 중부 부군의 獄案이 나오자 황제에게 上奏하여 다른 관리에게 재조사하게 하여 제화기의 집을 수색해 구리 그릇 십여 점을 찾아내었다. 중부 부군께서는 獄事를 미진하게 처리했다는 죄목에 걸려 면직되었다.
이듬해에 다시 어사가 되어 蘄州에서 세금을 감독하였고, 또 그 이듬해에 殿中侍御史 左巡使로 승진하였다.
두 해 뒤 大殿에서 政事를 아뢰던 중 眞宗 황제께서 중부 부군을 알아보시고는 위로하며 말씀하기를 “어사의 직책에 있은 지 오래이니, 또한 노고가 많았도다.”라고 하시고 원하는 자리를 물으셨는데, 중부 부군은 사양하면서 직무를 맡지 않으려 할 따름이었다.
며칠 뒤 진종 황제께서 宰相에게 轉運使의 자리를 주라고 말씀하시니, 재상은 중부 부군이 따로 원하는 것이 있어서 자신에게 먼저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라 의심하여 황제께 缺員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황제가 다시 큰 고을 하나를 맡기게 하니, 재상이 中書省으로 중부 부군을 불러 와서 “어사의 집이 어디인가? 고을 자리를 주려고 하는데 어디가 편하겠는가?”라고 물었다.
중부 부군이 “편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니, 재상이 노하여 海州 자리를 주고 다시 睦州로 옮겼다.
天禧 원년(1017)에 내직으로 들어와 侍御史로 승진하였고, 3년(1019)에 외직으로 나가 知泗州가 되었다.
이에 앞서 도성에 가뭄이 들어 어떤 승려가 자신의 팔을 잘라 비가 내리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관에서 龜山에 사찰을 세워주었다. 도성의 王公大臣들부터 모두 그곳에 가서 예배하니 사방에서 그 승려를 떠받들어 위세가 대단하였다.
또 그 승려가 민간의 남녀 백성들을 현혹시켜 淮水에 투신해 목숨을 바치게 하면서 “佛法에서 이 방법으로 큰 福利를 얻는다.”라고 하니, 해마다 회수에 투신하는 무지한 백성들이 몇 백 명에 이르렀다.
몸을 바치는 사람이 회수에 투신할 때에는 사찰의 무리들이 앞뒤에서 외치면서 투신하는 사람을 둘러싸 물에 들어가게 하니, 후회하여 달아나려고 하는 자가 있어도 부르짖어봐야 빠져나갈 수 없었다.
중부 부군이 이 사실을 듣고 놀라면서 “이보다 더 큰 해악이 있겠는가.”라고 하고, 그 무리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간악한 이를 심문하여 몇 사람을 죽였고 향리로 되돌려 보낸 사람은 수백 명이었다. 그리고서 마침내 그 사찰을 허물어버렸다.
내직으로 들어와 尙書司封員外郞 三司戶部判官으로 자리를 옮기고, 天禧 6년(1022)에 廣南東路轉運使가 되었다.
전임 전운사가 市舶에서 나오는 貨物俸錢을 대체하여 그 이익이 俸錢을 받을 때보다 3배나 되었다. 중부 부군이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어찌 이익을 바라겠는가.”라고 하고는 돈으로만 녹봉을 받게 하였다.
지금 황제(仁宗)께서 즉위하심에 工部郞中의 자리로 옮기고, 광남동로전운사의 임기가 다 되어 낡아빠진 배 한 척을 타고 향리로 돌아오니, 짐 속에는 바닷가에서 가져온 물건이 단 하나도 없었다.
조정으로 돌아오자 황제께서 金紫를 하사하시고 兩浙路轉運使로 삼았는데, 발의 병 때문에 江州知州 자리를 청하였다.
天聖 4년(1026)에 다시 分司의 자리를 청하였는데, 명을 받기도 전인 그해 2월 某日江州 관아에서 졸하니, 향년 68세였다. 某年 某月 某日某所에 장사 지냈다.
중부 부군의 曾祖 이다. 조부 僞唐에서 吉州軍事判官을 지냈고, 부친 는 위당에서 屯田員外郞을 지냈다.
중부 부군은 朱氏에게 장가들었는데 朱氏金壇縣君에 봉해졌고 중부 부군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아들 右侍禁 武昌巡檢이 되었다. 딸은 두 사람이니 장녀는 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중부 부군은 이고 則之이니, 성품은 방정하고 근엄하며 몸가짐은 겸손하고 소박했고 말은 과묵하였다.
정무를 볼 적에는 청렴하고 평상시 거처할 적에는 마치 중요한 손님을 마주한 것처럼 용모를 가다듬고 앉아 종일토록 조금도 해이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下吏를 천거할 적에는 해당자가 중부 부군이 자신을 천거했다는 것을 안 적이 없었고, 뒤에 해당자가 그 사실을 알고서 와서 사례하면 모두 거절하고 들이지 않았다.
부임한 관사에서 정원을 내다본 적이 없어서 과실이 익어 땅에 떨어지는데도 집안사람들이 감히 줍는 자가 없었으니 그 청렴함이 이와 같았다.
은 다음과 같다. 나라 무너져 도적들 창궐함에 국토가 사분오열 되었네 鍾傳洪州 땅에서 홍주를 차지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네
종전이 죽자 아들 鍾匡時楊渥에게 패하여 신하가 되니 나라 때부터 나라 때까지 廬陵은 거짓 왕조들의 영토였네
歐陽氏들이 이곳에 살면서 대대로 드러나지 않았더니 違命侯의 시대에 여릉이 王土가 되었네
구양씨가 세상에 이름난 것은 우리 중부 어른에서부터였으니 進士로 과거에 합격하고 후손들이 그 발자취 이었네
중부의 재주로 御史 직임을 훌륭히 수행했으니 淸廉하고 勤儉하여 곧게 처신하였네 을 지어 묻으니 자손들이 이어갈 것이로다


역주
역주1 尙書工部郞中歐陽公墓誌銘 : ≪六一居士集≫의 自註에 따르면 이 글은 黃祐 2년(1050)에 지은 것이다. 尙書工部郞中 歐陽公은 구양수의 從叔父인 歐陽載(959~1026)이다.
역주2 廬陵人 : 廬陵은 宋나라 때 江南西路 吉州에 속해 있었다. 지금의 江西 吉安이다.
역주3 僞吳 : 僞는 宋나라의 입장에서 볼 때 정통성이 없는 거짓 왕조라는 뜻이다. 僞吳는 唐나라부터 吳王에 봉해졌던 楊行密(852~905)이 淮水 이남의 땅을 차지하고 세웠던 나라이다. 국호를 吳로 정한 것은 919년 그 아들인 楊隆演 때이다. 후에 양행밀의 부장인 徐溫의 양자 徐知誥(본명 李昪)에게 찬탈당하여 南唐으로 바뀌었다.
역주4 淳化 : 宋 太宗의 연호로 990년에서 994년까지 사용하였다.
역주5 王嗣宗 : 944~1021. 字는 希阮, 호는 中陵子, 시호는 景莊이다. 河州通判, 淮南轉運使, 太常少卿, 御史中丞, 樞密副使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에 ≪中陵子≫가 있다.
역주6 殿中侍御史 左巡使 : 殿中侍御史는 御史臺의 殿院에 소속된 관직으로 宋나라 전기에는 녹봉만 받고 실무는 없는 寄祿官職이었다가, 元豐(1078~1085) 연간에 관직개혁 후 관료들의 위법을 규찰하는 임무를 맡았다. 左巡使는 관료들의 감찰을 맡은 어사대의 관직이다.
역주7 與海州 又移睦州 : 海州는 淮南東路에 속하였으며 治所가 지금의 江蘇 連雲港 海州鎭인 朐山에 있었다. 睦州는 兩浙路에 속하였으며 치소가 지금의 浙江인 建德에 있었다.
역주8 泗州 : 宋나라 때 淮南東路에 속하였으며, 治所가 지금의 江蘇 泗洪 동남쪽 盱胎의 맞은편인 臨淮에 있었다.
역주9 龜山 : 지금의 江蘇 盱眙의 경내에 있는 龜山을 가리킨다.
역주10 市舶 : 해외 교역 商船을 가리킨다. 唐나라 때부터 市舶司를 설치하여 해상 무역의 일을 맡게 하였는데, 宋나라 때에도 그대로 따라 廣南轉運使가 그 일을 맡았다. ≪淵鑑類凾 設官部 提擧市舶1≫
역주11 分司 : 宋나라 때 南京(應天府), 北京(大名府), 西京(河南府)에 도성과 같이 御史臺, 國子監 등을 설치하고 관속을 배속시켰던 것을 가리킨다.
역주12 僞唐 : 僞는 宋나라의 입장에서 볼 때 정통성이 없는 거짓 왕조라는 뜻이다. 吳의 승상인 徐溫의 양자 徐知誥(본명 李昪)가 세운 南唐(937~975)을 가리킨다.
역주13 鍾氏於洪……敗(陳)[臣]于楊 : 鍾氏는 鍾傳이다. 唐末의 군벌로 洪州 高安 사람이다. 홍주에서 장교로 복무하여 군공을 세웠고 마침내는 관찰사를 몰아내고 스스로 留侯가 되었다. 당나라 조정에서는 종전을 절도사로 임명하고 南平王에 봉하였다. 天祐 3년(906)에 종전이 죽고 아들 鍾匡時가 종전의 자리를 계승하였는데 얼마 뒤 종전의 養子 鍾延規가 종광시와 후계를 놓고 다투다가 淮南節度使 楊渥에게 귀부하였다. 이에 양악이 군대를 보내 홍주를 함락하고 종광시를 揚州로 압송하여 신하로 삼았다. ≪新五代史 梁傳 鍾傳≫
역주14 (陳)[臣] : 저본에는 ‘陳’으로 되어 있으나, 本集에 의거하여 ‘臣’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5 自梁迄周 廬陵僞邦 : 梁은 五代 최초의 왕조인 後梁(907~923)으로 朱全忠이 세운 나라이며, 周는 五代 최후의 왕조인 後周(951~960)로 郭威가 세운 나라이다. 후주의 장군이었던 趙匡胤이 恭帝에게 양위를 받아 宋을 개창하였다.
역주16 違命之侯 廬陵王土 : 違命之侯는 南唐의 마지막 군주 李煜(937~978)을 가리킨다. 송나라에게 남당이 멸망한 후 汴京으로 압송되어 違命侯에 봉해졌다가 후에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지은 〈虞美人〉이라는 작품이 화근이 되어 사약을 받고 죽었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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