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4)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誌錯落可誦이라
故尙書比部員外郞陳君 卜以至和二年正月某日 葬于이라
其素所知祕書丞李詡與其孤安期謀하야 將乞銘於廬陵歐陽脩할새 安期曰 吾不敢이라하니 詡曰 我能得之라하야
乃相與具書하야 遣君之客賈繹하야 自長安으로 走京師以請이라
蓋君以至和元年五月某日 卒于長安하니 享年四十有六이라 其仕未達而所爲未有大見于時也
然詡 節義可信之士 以詡能報君하고 而君能知詡하니 則君之爲人 可知也已로다
君諱漢卿이요 字師黯이니 世居이라 其先이러니 이라
其曾叔祖省華 官至諫議大夫하고 生堯叟堯佐堯咨하니 先後爲將相이요 而君自曾祖而下 三世不顯이라
曾祖諱省恭 不仕하고 祖諱堯封 擧進士하야主簿러니 詣闕上書하야 獻破賊策한대 不報
遂退老于嵩山이러라 父諱淵 亦擧進士하야 官至大理寺丞하고 皆以文學知名이라
君生一歲而孤하고 年十三 與其母入蜀할새 過鳳翔 謁其府尹한대 而吏少君하야 不爲之通이어늘
君直入하야 伏庭下曰 陳某請見이라하고 因責尹慢士하고 戒吏不謹하니 尹慙하야 笞吏以謝君이러라
君用叔祖하야 廕補將作監主簿하고 累遷大理寺丞 權知이라
民有兄弟爭田者어늘 吏常直其兄하되 而弟訟不已
君爲往視其田하고 辨其券書하야 而以田與弟하니 其兄謝曰 我悔欲歸弟以田者數矣로되 直懼笞而不敢耳라하고
弟曰 我田故多 然恥以不直訟이라 兄今我直矣 願以田與兄이라하야
兄弟相持慟哭하고 拜而去 由是 縣民有事 多相持詣君하야 得一言以決曲直이라
又知이러니 縣有惡盜十人 已謀 未發이어늘 而尉方以事出한대 君募少年하고하야 夜往捕獲之
明日召尉歸하야 以賊與之曰 得是하니 可以論賞이라한대 賞未及下而尉卒이라 河南儒者魏景山也 老而且貧이라
君爲主其喪事하고 買田宅于하야 以活其妻子러라
通判 治田訟三十年不決者하야 一日決之러니 秩滿 嘉人詣轉運使하야 乞留不得이라
守成都 薦其材한대 而薦者十有五人이라 通判할새 府有妖獄二百餘人이라
君方以公事之他州러니 疑獄有寃하야 召君還視之한대 獨留其一人하고 餘皆釋之러라
累遷尙書虞部員外郞한대 天子享明堂 推恩하야 遂遷하고 通判할새 決疑獄하야 活一家五人이러라
君好學重氣節이라 嘗有負하니 其錢數千萬이어늘 輒毁其券棄之하고
與人交 久而益篤이라 喜爲歌詩하고 至於射藝書法醫藥하야도 皆精妙
尤好奇畫古書하야 每傾貲購之하고 嘗自爲錄하야 藏于家하니 其材能好尙 皆可嘉也
母曰仁壽縣太君王氏 初娶王氏 生一子하니 安期也 後娶又曰王氏
銘曰 在蜀僞時 處昏不迷하니 蜀亡而東하야 高明顯融 莫如陳宗이라
惟陳有聲 自其高曾이요 君世不興이라 이라
實始自君하야 昌其子孫하니 考銘有文이리라


04. 尙書比部員外郞 陳君墓誌銘
墓誌의 글이 錯綜하여 욀 만하다
尙書比部員外郞 陳君至和 2년(1055) 정월 某日京兆府 萬年縣 洪固鄕 神禾原에 장사 지내기로 정하였다.
평소 알고 지내던 祕書丞 李詡가 진군의 아들 安期와 논의하여 廬陵歐陽脩에게 묘지명을 청하려 하였는데, 안기가 “저는 감히 청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자, 이후가 “내가 청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이후와 안기가 함께 글과 폐백을 갖추고서 진군의 門客賈繹을 보내어 長安에서 京師로 가서 묘지명을 청하였다.
진군은 至和 원년(1054) 5월 某日에 장안에서 임종하였으니, 향년 46세였다. 벼슬은 현달하지 못하였고 행적도 당시에 크게 드러나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후는 절의가 있어 신뢰할 만한 선비로서, 이후는 진군에게 보답을 하였고 진군은 이후를 알아주었으니, 진군의 사람됨을 알 만하다.
진군은 漢卿이고 師黯이니 대대로 閬中에 살았다. 그 선조는 博州 사람이었는데, 僞蜀을 섬겨 縣令이 되었기에 마침내 낭중에 정착하게 되었다.
曾叔祖 省華는 관직이 諫議大夫에 이르렀고, 堯叟堯佐堯咨를 낳았으니 전후로 將相이 되었고, 진군의 집안은 曾祖 이하로부터 3대 동안 현달하지 못했다.
증조 휘 省恭은 벼슬하지 않았고, 祖父堯封進士에 급제하여 虢縣主簿가 되었는데, 王均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대궐에 가서 글을 올려 적도들을 깨뜨릴 책략을 올렸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마침내 물러나 嵩山에서 여생을 보냈다. 부친 휘 또한 진사에 급제하여 관직이 大理寺丞에 이르렀고, 그 형인 金龜子 과 함께 모두 문학으로 알려지고 명성이 났다.
진군은 태어난 지 한 해 만에 부친을 여의고 나이 13세에 모친과 함께 으로 들어올 적에 鳳翔府를 지나면서 府尹을 배알하려 하였는데, 관리가 진군을 어리게 보고 만나게 해주지 않았다.
그러자 진군이 곧장 들어가 뜰아래에 엎드리고서, “진 아무개가 뵙기를 청합니다.”라고 하고는 부윤이 선비를 홀대함을 책망하고 관리가 근엄하지 못함을 경계하니, 부윤이 부끄러워하면서 관리에게 笞刑을 내려 진군에게 사과하였다.
진군은 叔祖 堯咨의 지위에 의해 蔭補將作監主簿가 되었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大理寺丞 監沙苑監 權知渭南縣이 되었다.
백성들 중에 형제끼리 밭을 두고 다투는 자가 있었는데, 관리가 항상 그 형이 옳다고 판결하였음에도 아우가 송사를 그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진군이 직접 가서 그 전답을 살펴보고서 文券을 판별하여 전답을 아우에게 주니, 그 형이 사죄하면서 “제가 뉘우치고서 아우에게 전답을 돌려주려고 한 것이 여러 번이었으나, 다만 태형을 받을까 두려워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아우는 “저는 전답이 본래 많습니다. 그러나 옳지 못하다고 판결이 난 것이 수치스러워 송사를 하였던 것입니다. 형이 이제 제가 옳다고 하니 형에게 전답을 주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형제가 서로 붙들고서 통곡을 하고 절을 하고서 떠나갔다. 이 일로 인해 縣民들이 일이 생기면 함께 진군에게 와서 진군의 한마디 말로 시비를 결판 짓는 자가 많았다.
登封知縣이 되었는데, 현에 악랄한 도적 열 사람이 도적질을 모의하고 아직 실행에 옮기지는 않은 상태였다. 이때 縣尉가 일이 있어 출타하였는데, 진군이 젊은이들을 모으고 手力을 선발하여 밤에 가서 도적들을 잡아왔다.
이튿날 진군이 현위를 불러 돌아오게 하여 잡아온 도적들을 현위에게 넘기면서 말하기를 “이 도적들을 잡았으니 論賞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미처 상을 내리기 전에 현위가 사망하였다. 현위는 河南儒者魏景山으로, 늙고 가난하였다.
진군이 현위를 위하여 그 喪事를 주관하고 汝州田宅을 매입해 그 妻子가 살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
嘉州通判이 되었을 적에 30년 동안이나 판결이 나지 않은 전답의 송사를 맡아 하루 만에 판결 내었다. 임기가 다 차자 가주 사람들이 轉運使에게 가서 留任을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당시 文丞相(文彥博)이 成都府知事로 있으면서 재주 있는 이를 천거하게 하였는데, 진군을 천거한 사람이 15명이었다. 진군이 河中府通判으로 있을 때 에 요사스러운 獄事에 200여 명이 연루되는 사건이 있었다.
文彥博(≪萬苦際會圖像≫)文彥博(≪萬苦際會圖像≫)
진군이 그때 공무로 다른 주에 가 있었는데, 提點刑獄司가 옥사에 억울한 점이 있다고 의심하여 진군을 불러 돌아와서 옥사를 살피게 하였다. 그러자 진군은 그중에 한 사람만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였다.
여러 차례 승진하여 尙書虞部員外郞이 되었는데 천자가 明堂에서 祭享할 때 은혜를 베풀어 마침내 比部로 승진하였고, 寧州通判으로 있을 때 의심스러운 옥사를 판결하여 한 집안의 다섯 사람을 살려주었다.
진군은 학문을 좋아하고 氣節을 중시하였다. 일찍이 남에게 받을 채무가 있어 그 금액이 수천만 전이었는데, 문득 그 채무 증서를 없애버렸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교유할 적에 관계가 오래될수록 더욱 돈독하였다. 歌詩를 짓기를 좋아하였고 활쏘기, 書法, 醫藥의 경우에도 모두 정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奇畫古書를 더욱 좋아하여 매번 재물을 다 털어 구매하고 일찍이 스스로 그것들을 기록하여 집에 보관하니, 그 재능과 嗜好가 모두 아름다웠다.
모친은 仁壽縣太君 王氏이다. 初娶 王氏는 아들 하나를 낳으니 安期이고, 後娶도 왕씨였다.
은 다음과 같다. 僞蜀 시대에 혼미한 세상을 살면서 미혹하지 않았으니 오직 陳氏가 가장 한미하였네 위촉이 망하고 동쪽으로 가서 부귀하고 현달함이 진씨의 조상만 한 사람이 없었네
진씨가 명성이 난 것은 고조와 증조 때부터이고 진군의 세대에는 흥성하지 못했네 흥성하고 침체하면서 때를 기다리며 덕을 쌓으니 운수가 순환하여 반드시 돌아오네
실로 진군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자손이 창성하리니 묘지명을 살펴보면 글이 있으리라


역주
역주1 尙書比部員外郞陳君墓誌銘 : 이 글은 至和 원년(1054)에 지은 것이다. 尙書比部員外郞은 尙書省 刑部의 屬官으로 형부의 사무를 나누어 관장했던 관직이다. 陳君은 陳漢卿이다.
역주2 京兆府萬年縣洪固鄕神禾原 : 지금의 陝西省 西安 韋曲鎭에서 남쪽으로 2리 되는 지점에 있다.
역주3 : ‘幣’와 통용되며, ≪文忠集≫에는 ‘幣’로 되어 있다.
역주4 閬中 : 縣名으로, 宋나라 때 利州路 閬州에 속하였다. 治所는 지금의 四川省 閬中市에 있었다.
역주5 博州 : 송나라 때 河北東路에 속하였다. 치소는 지금의 山東省에 있는 聊城이었다.
역주6 因事僞蜀……遂留家焉 : ≪宋史≫ 284권 〈陳堯佐傳〉에 “高祖 陳翔이 蜀의 新井 현령이 되어 그곳에서 살게 되면서 마침내 낭주 낭중 사람이 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陳翔 또한 陳漢卿의 선조이다. 僞蜀은 五代 시절에 王建이 세운 前蜀(907~925)을 가리킨다.
역주7 虢縣 : 송나라 때 秦鳳路 鳳翔府에 속하였으니, 지금의 陝西省 寶鷄 虢縣이다.
역주8 王均亂蜀 : 王均은 宋 眞宗 때 益州에서 神衛都虞候로 있었는데, 咸平 3년(1000) 정월에 部卒인 趙延順이 수탈을 일삼던 益州鈐轄 符昭壽를 살해하고 왕균을 옹립하여 大蜀을 세우고서 반란을 일으켰다. 후에 송나라 군대에게 진압당하고 왕균은 피살되었다.
역주9 與其兄漸所謂金龜子者 : 陳漸은 字가 鴻漸으로 만년에 金龜子로 自號하였다. 天水尉, 耀州節度推官 등을 역임하였다.
역주10 堯咨 : 陳堯咨는 字가 嘉謨, 시호가 康肅이다. 著作郞, 光州知事, 翰林 學士, 諫議大夫, 武信軍節度使 등을 역임하였고 太尉에 추증되었다. 활을 잘 쏘아 歐陽脩의 〈歸田錄〉에 “진 강숙공 요자는 활쏘기를 잘하여 당세에 적수가 없었으니 공 또한 이로써 자부하였다.[陳康肅公堯咨善射 當世無雙 公亦以此自矜]”라고 하였다.
역주11 監沙苑監 : 沙苑은 陝西 大荔縣 남쪽에 있던 지명으로, 渭水에 접해 있고 지역이 넓어 牧畜하기에 알맞았으므로 唐나라 때부터 이곳에 沙苑監을 두어 소와 양 등을 길렀다. 監沙苑監은 바로 이 沙苑監을 감독하던 牧監이다.
역주12 渭南縣 : 송나라 때 陝西路 華州에 속했던 곳으로 治所가 지금의 陝西省 渭南에 있었다.
역주13 登封縣 : 송나라 때 京西北路 河南府에 속했던 곳으로 지금의 河南省 등봉현이다.
역주14 手力 : 官府에서 雜役 등을 담당하던 하급 관리이다.
역주15 汝州 : 송나라 때 京西北路에 속하였으며 치소는 지금의 河南省 臨汝인 梁에 있었다.
역주16 嘉州 : 宋나라 때 成都府路에 속하였다. 治所가 지금의 四川省 樂山인 龍游에 있었다.
역주17 文丞相 : 文彥博(1006~1097)이다. 汾州 介休 사람으로 字는 寬夫, 시호는 忠烈이다. 樞密副使, 同中書門下平章事, 太師 등을 역임하였다. 네 명의 황제를 섬기면서 將相으로만 50년을 재임하였다. 문언박이 성도부지사로 있었던 것은 慶曆 4년(1044) 11월에서 경력 7년(1047) 3월까지였다.
역주18 河中府 : 송나라 때 永興軍路에 속하였으며, 치소가 지금의 山西省 永濟市 蒲州鎭인 河東에 있었다.
역주19 提點刑獄司 : 한 지방의 司法과 刑獄을 관장하고 도적 등의 일을 순찰하던 임무를 맡은 관직이다.
역주20 比部 : 관서의 명칭으로 刑部에 속한 부서이다. 여기서는 比部員外郞으로 승진한 것을 가리킨다.
역주21 寧州 : 송나라 때 永興軍路에 속하였으며 치소가 지금의 甘肅省 寧縣인 安定에 있었다.
역주22 惟陳最微 : 陳氏는 혼미한 세상에 영합하지 않고 낮은 관직에 처하여 한미하게 지냈다는 말이다.
역주23 惟興與伏……其周必復 : 흥성과 침체라고 하였으나, 주된 의미는 흥성에 있다. 때를 기다린다는 것은 후손 가운데 크게 될 자가 있어 그 덕을 본인으로부터 쌓는다는 말이다. 순환하여 돌아온다는 것은 흥성함의 운수가 순환하여 반드시 돌아온다는 뜻이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