君
은 諱源
이요 字子漸
이요 姓尹氏
라 與其弟
로 俱有名於當世
하야 其論議文章博學強記 皆有以過人
이로되 而師魯好辯
하야 果於有爲
하고
子漸爲人剛簡하야 不矜飾能하고 自晦藏이라 與人居久而莫知로되 至其一有所發하얀 則人必驚伏이라
其視世事에 若不干其意로되 巳而오 搉其情僞하며 計其成敗後에 多如其言이러라 其性不能容常人이나 而善與人交하야 久而益篤이라
其曾祖諱誼는 贈光祿少卿이요 祖諱文化는 官至都官郞中 贈刑部侍郞이요 父諱仲宣은 官至虞部員外郞 贈工部郞中이라
天聖八年
에 擧進士及第
하야 爲奉禮郞
하고 累遷太常博士
하고 歷知
二縣
하고 僉署
判官事
하고
又知
하고 通判
하고 知懷州
하고 以慶曆五年三月十四日
로 卒于官
하다
君遺懷敏書曰 賊擧其國而來하니 其利不在城堡요 而兵法有不得而救者라
且吾軍畏法
하야 見敵必赴而不計利害
하니 此其所以數敗也
라 宜駐兵
하야 見利而後動
이라한대
知
할새 杖一卒
한대 不服
이어늘 渙命斬之以聞
이라가 坐專殺
하야 降知密州
라
君上書爲渙論直하야 得復知滄州러라 范文正公常薦君材可以居館閣하니 召試不用이라 遂知懷州한대 至期月大治러라
而權倖小人不便하야 三公皆罷去하고 而師魯與時賢士多被誣枉得罪라
君歎息하고 憂悲發憤하야 以謂生可厭而死可樂也라하고 往往被酒하야 哀歌泣下하니 朋友皆竊怪之라
已而以疾卒하니 享年五十이라 至和元年十有二月十三日하야 其子材葬君于河南府壽安縣甘泉鄕龍洲里라
嗚呼라 師魯常勞其智於事物而卒蹈憂患以窮死어니와 若子漸者曠然不有累其心而無所屈其志라
然其壽考亦以不長하니 豈其所謂短長得失者皆非此之謂歟아 其所以然者不可得而知歟아
銘曰 有韞于中不以施하고 一憤樂死其如歸라 豈其志之將衰리오 不然이면 世果可嫉其如斯로다
君은 휘가 源이고 자는 子漸이고 성은 尹氏이다. 君의 아우 師魯 尹洙와 모두 당세에 명망이 있어 論議와 文章, 博學과 強記는 모두 남보다 뛰어났지만 師魯는 변론을 좋아하여 일을 처리하는 데에 과감하였고,
子漸의 사람됨은 강직하고 소탈하여 재능을 과시하거나 꾸미지 않고 스스로 감추었다. 그래서 남들과 오랫동안 함께 있어도 사람들은 君의 능력을 알지 못하였는데, 君이 한번 發揮하면 사람들은 반드시 놀라고 감복하였다.
君이 세상의 일을 보기를 마치 아무런 관심도 없는 듯이 하였는데, 이윽고 실정과 허위를 추론하고 성공과 실패를 계산한 뒤에는 대부분 君의 말과 같았다. 君의 성품은 常人을 용납하지 않았으나 남과 더불어 잘 사귀어 오래되어도 더욱 돈독하였다.
天聖과 明道 연간 사이로부터 나는 그 형제들과 교유하여 子漸에 대해 안 것이 이와 같다.
曾祖 휘 誼는 光祿少卿에 증직되었고, 祖 휘 文化는 관직이 都官郞中 贈刑部侍郞에 이르렀으며, 父 휘 仲宣은 관직이 虞部員外郞 贈工部郞中에 이르렀다.
子漸은 애초에 祖父의 蔭德으로 三班借職에 보임되었다가 얼마 뒤 左班殿直으로 옮겼다.
天聖 8년(1030)에 進士試에 급제하여 奉禮郞이 되었고 누차 승진하여 太常博士가 되었으며 芮城‧河陽 두 현의 수령을 역임하였고 僉署孟州判官事가 되었다.
또 知新鄭縣이 되었고 涇州와 慶州의 通判이 되었으며 知懷州가 되었고, 慶曆 5년(1045) 3월 14일에 재임 중에 卒하였다.
趙元昊가 변경을 침범하여 定川堡를 포위하자 大將 葛懷敏이 涇原의 병사를 출동시켜 구원하려고 하였는데,
君이 葛懷敏에게 편지를 보내 “적이 나라의 총력을 기울여 거병하여 왔으니 저들이 노리는 이익은 城이나 堡壘에 있지 않고, 병법에 救援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게다가 우리 군은 법을 두려워하여 적을 보면 반드시 달려가 利害를 따지지 않으니, 이 점이 수차례 패배한 이유입니다. 瓦亭에 병사를 주둔하고서 우리가 이로운 기회를 본 뒤에 움직여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葛懷敏은 君의 말을 듣지 않다가 마침내 전투에서 패하여 죽었다.
劉渙이 知滄州로 있을 때에 한 병졸에게 刑杖을 쳤는데 불복하였다. 劉渙이 명하여 그를 참수하고 조정에 알렸다가 독단으로 병사를 죽였다는 죄에 연루되어 知密州로 강등되었다.
군이 조정에 글을 올려 劉渙의 강직함을 논하여 劉渙이 다시 知滄州가 되었다. 范文正公(范仲淹)이 君의 재주가 館閣에 재임할 만하다고 늘 추천하니 불러 시험하였지만 등용되지는 못하였다. 마침내 知懷州가 되었는데, 1년 만에 크게 다스려졌다.
이때에 천자가
范文正公과 현재
觀文殿學士 富公(
富弼),
武康軍節度使 韓公(
韓琦)을 등용하여 함께 다시 천하의 일을 개혁하려고 하였는데,
富弼(≪萬古際會圖像≫) 韓琦(≪萬古際會圖像≫)
權倖과 小人들이 불편하게 여겨 三公이 모두 파직되어 떠났고, 師魯는 당시의 賢士들과 함께 무고를 당해 벌을 받게 되었다.
君은 탄식하고 근심하고 괴로워하여 “사는 것이 싫고 죽는 것이 즐겁겠다.”라고 하고는, 때로 술에 취하여 구슬피 노래하며 눈물을 흘리곤 하였으니 朋友들이 모두 괴이하게 여겼다.
이윽고 병으로 卒하니 향년 50세였다. 至和 元年(1054) 12월 13일에 君의 아들 材가 河南府 壽安縣 甘泉鄕 龍洲里에 장사 지냈다.
평소에 지은 문장 60편이 모두 세상에 유행하고 있다. 아들은 네 명이 있는데, 材‧植‧機‧杼이다.
아, 師魯는 늘 사물에 지혜를 쏟았으나 끝내 우환을 당해 곤궁하게 죽었거니와, 子漸과 같은 이는 마음이 넓어 얽매이지 않았고 자신의 뜻을 굽힌 적이 없었다.
그러나 壽命은 길지 않았으니 아마도 이른바 長短과 得失이라는 것이 모두 이를 이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된 이유는 알 수가 없는 것인가.
銘은 다음과 같다. 내면에 온축하였으나 펼치지 못하였고 한 번 분노하여 마치 돌아가듯 죽음을 기꺼이 여겼네 어찌 그 뜻이 장차 쇠하리오 그렇지 않다면 세상은 과연 이와 같음을 싫어할 것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