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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4)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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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諱源이요 字子漸이요 姓尹氏 與其弟 俱有名於當世하야 其論議文章博學強記 皆有以過人이로되 而師魯好辯하야 果於有爲하고
子漸爲人剛簡하야 不矜飾能하고 自晦藏이라 與人居久而莫知로되 至其一有所發하얀 則人必驚伏이라
其視世事 若不干其意로되 巳而 搉其情僞하며 計其成敗後 多如其言이러라 其性不能容常人이나 而善與人交하야 久而益篤이라
之間으로 予與其兄弟交하야 其得於子漸者如此
其曾祖諱誼 贈光祿少卿이요 祖諱文化 官至都官郞中 贈刑部侍郞이요 父諱仲宣 官至虞部員外郞 贈工部郞中이라
子漸初以祖廕으로이라가 稍遷左班殿直이러라
天聖八年 擧進士及第하야 爲奉禮郞하고 累遷太常博士하고 歷知二縣하고 僉署判官事하고
又知하고 通判하고 知懷州하고 以慶曆五年三月十四日 卒于官하다
하야어늘 大將葛懷敏發涇原兵救之한대
君遺懷敏書曰 賊擧其國而來하니 其利不在城堡 而兵法有不得而救者
且吾軍畏法하야 見敵必赴而不計利害하니 此其所以數敗也 宜駐兵하야 見利而後動이라한대
懷敏不能用其言하야 遂以敗死러라
할새 杖一卒한대 不服이어늘 渙命斬之以聞이라가 坐專殺하야 降知密州
君上書爲渙論直하야 得復知滄州러라 范文正公常薦君材可以居館閣하니 召試不用이라 遂知懷州한대 至期月大治러라
是時 天子用范文正公與今하야 欲更置天下事한대
而權倖小人不便하야 三公皆罷去하고 而師魯與時賢士多被誣枉得罪
君歎息하고 憂悲發憤하야 以謂生可厭而死可樂也라하고 往往被酒하야 哀歌泣下하니 朋友皆竊怪之
已而以疾卒하니 享年五十이라 至和元年十有二月十三日하야 其子材葬君于河南府壽安縣甘泉鄕龍洲里
皆行于世 男四人이니 曰材植機杼
嗚呼 師魯常勞其智於事物而卒蹈憂患以窮死어니와 若子漸者曠然不有累其心而無所屈其志
然其壽考亦以不長하니 豈其所謂短長得失者皆非此之謂歟 其所以然者不可得而知歟
銘曰 有韞于中不以施하고 一憤樂死其如歸 豈其志之將衰리오 不然이면 世果可嫉其如斯로다


03. 太常博士 尹君墓誌銘
은 휘가 이고 자는 子漸이고 성은 尹氏이다. 의 아우 師魯 尹洙와 모두 당세에 명망이 있어 論議文章, 博學強記는 모두 남보다 뛰어났지만 師魯는 변론을 좋아하여 일을 처리하는 데에 과감하였고,
子漸의 사람됨은 강직하고 소탈하여 재능을 과시하거나 꾸미지 않고 스스로 감추었다. 그래서 남들과 오랫동안 함께 있어도 사람들은 의 능력을 알지 못하였는데, 이 한번 發揮하면 사람들은 반드시 놀라고 감복하였다.
이 세상의 일을 보기를 마치 아무런 관심도 없는 듯이 하였는데, 이윽고 실정과 허위를 추론하고 성공과 실패를 계산한 뒤에는 대부분 의 말과 같았다. 의 성품은 常人을 용납하지 않았으나 남과 더불어 잘 사귀어 오래되어도 더욱 돈독하였다.
天聖明道 연간 사이로부터 나는 그 형제들과 교유하여 子漸에 대해 안 것이 이와 같다.
曾祖光祿少卿에 증직되었고, 文化는 관직이 都官郞中 贈刑部侍郞에 이르렀으며, 仲宣은 관직이 虞部員外郞 贈工部郞中에 이르렀다.
子漸은 애초에 祖父蔭德으로 三班借職에 보임되었다가 얼마 뒤 左班殿直으로 옮겼다.
天聖 8년(1030)에 進士試에 급제하여 奉禮郞이 되었고 누차 승진하여 太常博士가 되었으며 芮城河陽 두 현의 수령을 역임하였고 僉署孟州判官事가 되었다.
知新鄭縣이 되었고 涇州慶州通判이 되었으며 知懷州가 되었고, 慶曆 5년(1045) 3월 14일에 재임 중에 하였다.
趙元昊가 변경을 침범하여 定川堡를 포위하자 大將 葛懷敏涇原의 병사를 출동시켜 구원하려고 하였는데,
葛懷敏에게 편지를 보내 “적이 나라의 총력을 기울여 거병하여 왔으니 저들이 노리는 이익은 이나 堡壘에 있지 않고, 병법에 救援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게다가 우리 군은 법을 두려워하여 적을 보면 반드시 달려가 利害를 따지지 않으니, 이 점이 수차례 패배한 이유입니다. 瓦亭에 병사를 주둔하고서 우리가 이로운 기회를 본 뒤에 움직여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葛懷敏의 말을 듣지 않다가 마침내 전투에서 패하여 죽었다.
劉渙知滄州로 있을 때에 한 병졸에게 刑杖을 쳤는데 불복하였다. 劉渙이 명하여 그를 참수하고 조정에 알렸다가 독단으로 병사를 죽였다는 죄에 연루되어 知密州로 강등되었다.
군이 조정에 글을 올려 劉渙의 강직함을 논하여 劉渙이 다시 知滄州가 되었다. 范文正公(范仲淹)이 의 재주가 館閣에 재임할 만하다고 늘 추천하니 불러 시험하였지만 등용되지는 못하였다. 마침내 知懷州가 되었는데, 1년 만에 크게 다스려졌다.
이때에 천자가 范文正公과 현재 觀文殿學士 富公(富弼), 武康軍節度使 韓公(韓琦)을 등용하여 함께 다시 천하의 일을 개혁하려고 하였는데,
富弼(≪萬古際會圖像≫)富弼(≪萬古際會圖像≫)
韓琦(≪萬古際會圖像≫)韓琦(≪萬古際會圖像≫)
權倖小人들이 불편하게 여겨 三公이 모두 파직되어 떠났고, 師魯는 당시의 賢士들과 함께 무고를 당해 벌을 받게 되었다.
은 탄식하고 근심하고 괴로워하여 “사는 것이 싫고 죽는 것이 즐겁겠다.”라고 하고는, 때로 술에 취하여 구슬피 노래하며 눈물을 흘리곤 하였으니 朋友들이 모두 괴이하게 여겼다.
이윽고 병으로 하니 향년 50세였다. 至和 元年(1054) 12월 13일에 의 아들 河南府 壽安縣 甘泉鄕 龍洲里에 장사 지냈다.
평소에 지은 문장 60편이 모두 세상에 유행하고 있다. 아들은 네 명이 있는데, 이다.
아, 師魯는 늘 사물에 지혜를 쏟았으나 끝내 우환을 당해 곤궁하게 죽었거니와, 子漸과 같은 이는 마음이 넓어 얽매이지 않았고 자신의 뜻을 굽힌 적이 없었다.
그러나 壽命은 길지 않았으니 아마도 이른바 長短得失이라는 것이 모두 이를 이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된 이유는 알 수가 없는 것인가.
은 다음과 같다. 내면에 온축하였으나 펼치지 못하였고 한 번 분노하여 마치 돌아가듯 죽음을 기꺼이 여겼네 어찌 그 뜻이 장차 쇠하리오 그렇지 않다면 세상은 과연 이와 같음을 싫어할 것이로다


역주
역주1 太常博士尹君墓誌銘 : 이 글은 작자 나이 48세 때인 至和 元年(1054)에 지어진 것이다. 尹君은 尹源(1005~1054)이다.
역주2 洙師魯 : 1001~1047. 洙는 이름이고, 師魯는 그의 자이다. 仁宗 天聖 2년(1024)에 進士가 되었고 光澤知縣, 陝西帥府判官, 直龍圖閣 등을 역임하였다. 성격이 안으로는 강직하지만 겉으로는 온화했으며 박학하고 도량이 넓었다. 歐陽脩와 함께 古文을 창도하였고 河南先生으로 불린다. 저서에 ≪河南先生文集≫ 28권이 전해온다. 본서 권29에 〈尹師魯墓誌銘〉이 있다.
역주3 天聖明道 : 天聖은 宋 仁宗의 연호로 1023년에서 1031년까지, 明道는 宋 仁宗의 두 번째 연호로 1032년에서 1033년까지 사용하였다.
역주4 三班借職 : 송나라 때에 武臣을 三班으로 나누었는데, 東班, 西班, 橫班이었다. 이 관직에 임용된 사람들은 먼저 三班借職이 되었다가 三班奉職으로 옮겨 차례로 節度使로 옮겼다.
역주5 芮城河陽 : 芮城은 현재 山西 芮城이고, 河陽은 현재 河南 孟縣이다.
역주6 孟州 : 治所는 河南 孟縣에 있었다.
역주7 新鄭縣 : 현재 河南에 속해 있었다.
역주8 涇州慶州 : 涇州는 治所가 현재 甘肅 涇川 북쪽에 있었고, 慶州는 治所가 현재 甘肅 慶陽縣에 있었다.
역주9 趙元昊寇邊 : 趙元昊는 西夏 李曩霄를 가리키는데, 宋나라에서 趙氏로 賜姓하였으므로 이렇게 부른다. 宋나라 신하 노릇 하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다가 仁宗 明道(1032∼1033) 초에 西夏의 왕위를 세습, 顯道란 연호를 쓰고 寶元(1038∼1039) 초에 天授란 연호를 僭稱하여 황제 노릇을 하였다. 뒤에 宋과 싸워 승리하였으나 사상자가 많아 화의를 애걸하여 夏國主로 봉해졌다. ≪宋史 권485≫
역주10 定川堡 : 甘肅 鎭原縣 서북쪽에 있었다.
역주11 瓦亭 : 瓦亭砦로 현재 寧夏回族自治區 固原縣 남쪽에 있었다.
역주12 劉渙 : 자는 仲章이고 保州 保塞 사람이다. 鎭寧軍節度使 觀察留后를 역임하였고 工部尙書로 致仕하였다.
역주13 滄州 : 현재 河北에 속한다.
역주14 觀文殿學士富公 : 富弼(1004~1083)을 가리킨다. 宋나라 河南 洛陽 사람으로 字는 彥國, 시호는 文忠이다. 仁宗 天聖 8년(1030) 茂才로 薦擧되었다. 慶曆 2년(1042) 知制誥가 되어 契丹으로 사신을 가 영토를 할양하는 일을 강력히 항의하고 대신 歲幣를 늘리는 것으로 합의했다. 다음 해 樞密使로 옮겨 范仲淹 등과 함께 慶曆新政을 추진했다. 1056년에 재상이 되었지만 王安石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亳州로 나갔는데, 다시 靑苗法을 비난하다 탄핵을 받아 降官당하였다. 韓國公으로 致仕하였다. 저서에 ≪富鄭公詩集≫이 있다.
역주15 武康軍節度使韓公 : 韓琦(1008~1075)를 가리킨다. 字는 稚圭, 시호는 忠獻이다. 젊어서 進士에 합격하여 知州按撫使로서 四川의 기민 190만 명을 구제하고, 이어 西夏의 침입을 격퇴하여 변경방비에도 역량을 과시함으로써, 30세에 樞密副使가 되었다. 1058년에는 재상에 올라 약 10년간 국정에 참여하였는데, 神宗 즉위 후 다시 지방으로 나갔으며, 王安石의 靑苗法 실시를 맹렬히 비난하고, 또 거란이 요구해온 영토할양에도 반대하며 왕안석과 정면 대립함으로써 관직에서 물러났다.
역주16 其平時所爲文章六十篇 : ≪尹子漸集≫ 6권이 남아 있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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