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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4)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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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徂徠先生 姓石氏 名介 字守道 人也 而先生非隱者也
其仕嘗位于朝矣로되 魯之人 不稱其官而稱其德하며 以爲이요 先生 魯人之所尊이라
故因其所居山하야 以配其有德之稱曰徂徠先生者 魯人之志也
先生貌厚而氣完하며 學篤而志大 雖在畎畝 不忘天下之憂하야 以謂時無不可爲 爲之無不至
不在其位則行其言이요 吾言用이면 功利施於天下 不必出乎己 吾言不用이면 雖獲禍咎하야 至死而不悔라하다
其遇事發憤하고 作爲文章 極陳古今治亂成敗하야 以指切當世賢愚善惡是是非非하야 無所諱忌하니 世俗頗駭其言이라
由是 謗議喧然하고 而小人尤嫉惡之하야 相與出力하야 必擠之死하되 先生安然하야 不惑不變하야 曰 吾道固如是 吾勇過孟軻矣라하더니
賴天子仁聖하야 察其誣하야 得不發棺而保全其妻子러라
先生世爲農家라가 父諱丙 始以仕進하야 官至太常博士
先生年二十六 擧進士甲科하야 爲鄆州觀察推官 南京留守推官이러니
秩滿 遷某軍節度掌書記하고 代其父官于蜀하야事判官이라가
丁內外艱하야 去官하여 垢面跣足으로 躬耕徂徠之下하야 葬其五世未葬者七十喪하고 服除 召入國子監直講하다
是時 兵討元昊하야 久無功하니 海內重困이라
天子奮然思欲振起威德하야 而進退二三大臣하고 增置諫官御史하니 所以求治之意甚銳
先生躍然喜曰 此盛事也 吾職이니 其可已乎아하고 乃作慶曆聖德詩하야 以褒貶大臣하며 分別邪正 累數百言이라
詩出 太山曰 子禍始於此矣라하니 明復 先生之師友也 其後所謂姦人作奇禍者 乃詩之所斥也
先生自閒居徂徠하고 後官于南京으로 嘗以經術敎授하고
及在大學하얀 益以師道自居 門人弟子從之者甚衆하니 太學之興 自先生始
其所爲文章 其斥佛老時文 則有怪說中國論하니 曰去此三者然後 可以有爲라하고
其戒姦臣宦女 則有唐鑑하니 曰 吾非爲一世監也라하다 其餘喜怒哀樂 必見於文하니 其辭博辯雄偉而憂思深遠이러라
其爲言曰 學者 學爲仁義也 惟忠이라야 能忘其身이요 信篤於自信者라야 乃可以力行也라하야 以是行於己하며 亦以是敎於人이라
所謂堯舜禹湯文武周公孔子孟軻揚雄韓愈氏者 未嘗一日不誦於口하야
思與天下之士 皆爲周孔之徒하야 以致其君爲堯舜之君하며 民爲堯舜之民하야 亦未嘗一日少忘於心이라
至其違世驚衆하야 人或笑之하면 則曰 吾非狂癡者也라하니 是以 君子察其行而信其言하며 推其用心而哀其志러라
先生直講歲餘 杜祁公薦之天子하야 拜太子中允이러니 今丞相韓公又薦之하야 乃直集賢院하고
又歲餘 始去太學하야 通判하야于徂徠라가 以慶曆五年七月某日 卒于家하니 享年四十有一이라
하야 以謂待彼謗焰熄然後 先生之道明矣
先生旣沒 妻子凍餒하야 不自勝이어늘 今丞相韓公與河陽富公 分俸買田以活之러라
後二十一年 其家始克葬先生于某所 將葬 其子師訥與其門人徐遁等 來告曰 謗焰熄矣 可以發先生之光矣 敢請銘하노라하야늘
某曰 吾詩不云乎 子道自能久也 何必吾銘이리오하니 遁等曰 雖然이나 魯人之欲也라하야늘 乃爲之銘曰
徂徠之巖巖 與子之德兮 魯人之所瞻이로다 汶水之湯湯 與子之道兮 逾遠而彌長이로다
道之難行兮 孔孟亦云遑遑이니 一世之屯兮 萬世之光이로다이리오
自古聖賢皆然兮 子雖毁其何傷이리오
唐荊川曰 此文 極其變化로다


05. 徂徠 石先生墓誌銘
徂徠先生은 성이 石氏이고 이름이 이고 자가 守道兗州 奉符 사람이다. 徂徠나라 동쪽 산인데 선생은 은거한 사람이 아니다.
朝廷에서 벼슬하였지만 지역 사람들이 그의 관직을 부르지 않고 그의 덕을 칭송하며 “徂徠 지역이 우러러보고 선생은 지역 사람들이 존중하는 분이다.”라고 하였다.
때문에 그가 거처하던 산의 이름을 가지고 덕이 있는 사람의 칭호를 짝지어 徂徠先生이라 불렀으니 지역 사람들의 뜻이다.
선생의 풍모는 후중하고 기운은 충실하며 학문은 독실하고 뜻이 컸다. 비록 초야에 있으면서도 천하의 근심을 잊지 않고서 이르기를 “때는 할 수 없는 적이 없고 하면 못할 일이 없다.
지위에 있지 않으면 그 말을 실천할 뿐이고, 내 말이 채택되면 公利가 천하에 시행될 것이니 꼭 나에게서 나올 필요 없으며, 내 말이 채택되지 않으면 화를 입어 죽음에 이르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선생은 일을 만나면 發憤하고 문장으로 지어 古今治亂成敗를 극진히 말하여 當世賢愚善惡是是非非指摘하여 숨기거나 꺼리는 바가 없었으니 세속 사람들은 선생의 말에 매우 놀랐다.
이로 말미암아 비방하는 말이 시끄러웠고, 小人들은 더욱 선생을 미워하여 서로 힘을 내 반드시 죽음으로 내몰려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태연하게 미혹하지도 않고 지조를 바꾸지도 않고서 말하기를 “나의 는 본래 이러하고, 나의 용기는 孟軻보다 더하다.”라고 하였다.
불행하게 병을 얻어 하였고, 한 뒤에 姦人 중에 선생이 죽은 것을 奇禍大臣中傷하려는 사람이 있어 오히려 선생을 끌어들여 일을 만들어 말하기를 “죽었다 거짓말을 하고는 북쪽 거란으로 망명하였다.”라고 하면서 을 꺼내 조사할 것을 청하였다.
하지만 인자하고 성스러운 천자께서 그것이 誣告라는 것을 살펴 을 꺼내지도 않았고 妻子들도 보전할 수 있었다.
선생은 대대로 농사짓는 집안이었는데, 아버지 휘 이 처음으로 벼슬하여 관직이 太常博士에 이르렀다.
선생은 나이 26세에 進士試甲科로 급제하여 鄆州觀察推官 南京留守推官이 되었는데, 御史臺에서 선생을 主簿로 불렀다. 부임하기도 전에 글을 올려 사면에 대해 논하다 파직되자 어사대로 부르지 않았다.
임기가 차자 某軍節度掌書記로 옮겼고 아버지를 대신하여 에서 벼슬살이하여 嘉州軍事判官이 되었다.
부모의 상을 당하여 관직에서 떠나 때 묻은 얼굴과 맨발로 徂徠山 아래에서 몸소 경작하면서 5 동안 장사 지내지 못했던 70을 장사 지내고, 복을 벗자 소명을 받고 國子監直講으로 들어갔다.
이때에 군사가 元昊를 토벌하였지만 오랫동안 戰功이 없으니 海內가 몹시 지쳐 있었다.
천자가 분연히 위엄과 덕을 떨쳐 일으키고자 생각하여 두세 大臣을 교체하고 諫官御史를 증원하였으니 治世를 도모한 뜻이 매우 강하였다.
선생이 뛸 듯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는 훌륭한 일이다. 雅頌을 짓는 것은 나의 직분이니 그만둘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는, 이에 〈慶曆聖德詩〉를 지어 大臣을 포폄하고 邪正을 분별한 말이 수백 자였다.
시가 나오자 太山 孫明復이 말하기를 “그대의 는 이 시에서 시작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孫明復은 선생의 師友였다. 그 뒤에 이른바 姦人奇禍로 삼았다는 것이 바로 이 시에서 배척했던 사람이었다.
先生徂徠山에서 한가롭게 거처하고 훗날 南京에서 벼슬살이할 때로부터 일찍이 經術로 학생들을 가르쳤고,
太學에 있을 때에는 더욱 師道로 자처함에 선생을 따르는 門人과 제자가 매우 많았으니, 太學興盛하게 된 것은 선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선생이 지은 문장으로는 某集 약간 이 있고, 佛敎道敎, 그리고 당시 과거문장을 비판한 것은 〈怪說〉, 〈中國論〉이 있으니, 이 책에서 말하기를 “이 세 가지를 제거한 뒤라야 큰 일을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姦臣, 宦官, 宮女를 경계한 것은 ≪唐鑑≫이 있으니 이 책에서 말하기를 “나는 一世를 위하여 鑑戒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 나머지 喜怒哀樂을 반드시 문장에 드러냈으니, 글은 言辯이 풍부하고 웅장하였고 憂慮는 심원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이라는 것은 仁義를 배워서 실천해야 하니 충심을 지녀야 자신을 잊을 수 있고, 自信篤信한 자라야 이에 힘써 실천할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이로써 스스로 실천하고 또한 이로써 남을 가르쳤다.
이른바 周公孔子孟軻揚雄韓愈 등의 글을 일찍이 하루도 입으로 외지 않은 적이 없어서,
천하의 선비와 함께 모두 周公孔子의 무리가 되어 자신의 임금을 堯舜의 임금으로 만들고 백성을 堯舜의 백성으로 만들 것을 생각하여 또한 하루도 마음에서 조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선생이 세상의 常論과 어긋난 것을 주장해 대중을 놀라게 하는 데에 이르러 사람이 혹 비웃으면 “나는 미치거나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이 때문에 군자는 그 행동을 살펴 그 말을 믿고 마음 씀을 헤아려보고 뜻을 가엾게 여기는 것이다.
선생이 直講으로 재임한 지 1년 남짓 되자 杜祁公(杜衍)이 천자에게 천거하여 太子中允에 배수되었는데, 지금 승상 韓公(韓琦)이 또 천거하여 이에 直集賢院이 되었다.
또 1년 남짓 되자 비로소 太學을 떠나 濮州通判이 되어 바야흐로 徂徠에서 待次하고 있다가, 慶曆 5년(1045) 7월 모일에 집에서 하니 향년 41세였다.
友人 盧陵 歐陽脩를 지어 선생을 하면서 ‘저 비방하는 화염이 사라지기를 기다린 뒤라야 선생의 도가 밝아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妻子가 추위와 배고픔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게 되었는데, 지금의 승상 韓公河陽 富公(富弼)이 녹봉을 나눠 밭을 매입해주어 생활할 수 있게 해주었다.
21년 뒤에 선생의 집안에서 비로소 某所에 선생을 장사 지냈다. 장사를 치르려 할 때에 선생의 아들 師訥이 선생의 門人 姜潛, 杜默, 徐遁 등과 함께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선생을 비방하던 화염이 사라졌으니, 선생의 빛을 드러내도 될 것입니다. 감히 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나의 시에 말하지 않았던가. ‘그대의 도는 절로 오래 전해지리’라고. 그러니 나의 이 어찌 필요하겠는가.”라고 하니, 徐遁 등이 말하기를 “비록 그렇지만 지역 사람들이 바라는 것입니다.”라고 하거늘 이에 을 짓는다.
높디높은 徂徠山과 그대의 덕이여 魯人들이 우러러보는 바이다 넘실대는 汶水와 그대의 여 세월이 지나도 더욱 장구하리라
가 행해지기 어려움이여 孔孟 역시 바쁘게 다니셨으니 一世에 곤경을 당함이여 萬世에 길이 빛나네 나에게 이 있지 않겠는가 어찌 桓魋臧倉에게 달려 있으랴
예로부터 성현들 모두 그러함이여 아 그대를 비록 비방한들 어찌 손상되리오
唐荊川이 말하였다. “이 글은 변화가 지극히 많다.”


역주
역주1 徂徠石先生墓誌銘 : 이 글은 송나라 英宗 治平 2년(1065)에 지은 것이다. 徂徠 石先生은 石介(1005~1045)이다.
역주2 兗州奉符 : 현재 山東 泰安이다.
역주3 徂徠 魯東山 : 徂徠는 山東 경내의 동쪽 산으로 일명 尤來라고도 하는데 현재 山東 泰安 동남쪽 40리에 있고 산에는 소나무와 잣나무가 많다.
역주4 徂徠 魯之望 : 徂徠山이 魯 땅에 있어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보듯이 石介를 魯 지역 사람들이 존중하고 우러러본다는 말이다.
역주5 不幸……以驗 : 夏竦이 평소 자기를 大姦이라고 지적한 石介에게 앙심을 품고 있다가, 石介가 죽자 그의 墓를 파내 斬屍할 목적으로, 石介가 자기는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거란으로 망명하였다고 모함한 사실을 두고 한 말이다. ≪宋史 권432 石介傳≫
역주6 御史臺……罷不召 : 景祐 2년(1035)에 圜丘에서 천지에 제사를 지내고 크게 赦免令을 내려 五代 및 諸國의 후손들을 사면해주도록 하였는데, 石介가 御史臺主簿에 부임하기도 전에 소장을 올려 사면을 반대하다 파직되었다. 御史臺는 監察機關으로 관리들을 탄핵하는 일을 전담하였다.
역주7 嘉州軍 : 治所는 현재 四川 樂山에 있었다.
역주8 雅頌 : 시를 지어 政敎의 得失을 보이고 盛德을 형용하는 것을 말한다. ≪詩經≫ 〈毛詩序〉에 “雅는 正의 뜻이니, 王政이 이로 말미암아 폐하고 興하게 된다. 정사에 小大가 있기 때문에 小雅가 있고 大雅가 있는 것이다. 頌은 盛德의 形容을 찬미하여 그 成功을 神明에게 告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역주9 孫明復 : 孫復(992~1057)을 말하는데, 明復은 그의 자이다. 晉州 平陽 사람으로 호는 太山이다. 과거에 낙제한 뒤 泰山에 살면서 ≪春秋≫를 연구하면서 강학에 힘써 泰山先生으로 불렸다. 石介 등이 모두 師事하였다. 范中淹과 富弼 등의 천거로 祕書省校書郞에 나가 國子監直講에 올랐다. 范仲淹, 胡瑗과 함께 ‘宋初三先生’이라 불렸다. 陸淳의 학문을 계승하고, 董仲舒를 추숭했으며, 후대의 학자 胡安國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저서에 ≪春秋尊王發微≫ 12편과 ≪孫明復小集≫이 있다.
역주10 曰某集者若干卷 〈曰某集者若干卷〉 : 石介의 저서로는 ≪唐鑑≫ 5卷, ≪易解≫ 5卷, ≪易口義≫ 10卷, ≪三朝聖政錄≫, ≪徂徠集≫ 20卷이 있다. 원문에는 ‘曰某集者若干卷’이 반복되어 나오는데 하나는 衍文으로 보았다.
역주11 濮州 : 治所는 현재 山東 濮縣에 있었다.
역주12 待次 : 옛날에 관리가 관직을 받은 뒤에 차례대로 관직에 補任되었는데, 보임될 차례를 기다리는 것을 가리킨다.
역주13 友人廬陵歐陽脩哭之以詩 : 歐陽脩가 지은 〈重讀徂徠集〉을 말한다.
역주14 姜潛 : 자는 至之이고 石介와 同鄕이다. 陳留縣의 知州事가 되었는데 王安石이 新法을 시행하자 隱居하였다.
역주15 杜默 : 자는 師雄이고 歷陽 사람이다. 詩歌를 잘 지었다.
역주16 吾不有命兮 安在夫桓魋與臧倉 : 桓魋는 春秋時代 송나라 사람으로 관직은 司馬에 이르렀다. 孔子가 일찍이 송나라를 지나갈 때에 桓魋가 孔子를 해치려고 하자, 孔子가 이르기를 “하늘이 나에게 덕을 타고나게 하셨거니, 환퇴가 나를 어찌하겠는가.”라고 하였다. ≪論語 述而≫
臧倉은 戰國時代 魯 平公의 嬖臣이었다. 平公이 孟子를 만나려고 하였으나, 臧倉이 맹자를 비난하며 만나지 못하게 하였는데, 樂正子가 이 사실을 孟子에게 고하자, 孟子가 “행하는 것도 누가 시켜서 행하는 수가 있고, 그만두는 것도 누가 저지하여 그만두는 경우가 있지만, 행하고 그만두게 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노나라 군주를 만나지 못한 것은 하늘의 뜻이 있어서이니, 臧氏의 자식이 어떻게 나로 하여금 만나지 못하게 하였겠는가.”라고 하였다. ≪孟子 梁惠王 下≫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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