有蜀君子
하니 曰蘇君
이라 諱洵
이요 字明允
이니 人也
라 君之行義
는 修于家
하고 信於鄕里
하고 聞於蜀之人久矣
라
當至和嘉祐之間하야 與其二子軾轍로 偕至京師한대 翰林學士歐陽脩得其所著書二十二篇하야 獻諸朝하니
眉山在西南數千里外어늘 一日父子隱然名動京師하야 而蘇氏文章遂擅天下라
君之文은 博辯宏偉일새 讀者悚然想見其人이라가 旣見而溫溫하야 似不能言하고
及卽之與居하얀 愈久而愈可愛하고 間而出其所有어든 愈叩而愈無窮하니 嗚呼라 可謂純明篤實之君子也로다
曾祖諱祐요 祖諱杲요 父諱序는 贈尙書職方員外郞이니 三世皆不顯이라
職方君三子에 曰澹曰渙은 皆以文學擧進士로되 而君少獨不喜學하야 年已壯에 猶不知書한대
職方君縱而不問이어늘 鄕閭親族皆怪之라 或問其故하니 職方君笑而不答하고 君亦自如也러라
年二十七
에 始大發憤
하야 謝其素所往來少年
하고 閉戶讀書爲文辭
러니 歲餘
에 擧進士
하야 再不中
하고 又擧
不中
이라
退而歎曰 此不足爲吾學也라하고 悉取所爲文數百篇焚之하고 益閉戶讀書하야 絶筆不爲文辭者五六年이라
乃大究六經百家之說하야 以考質古今治亂成敗聖賢窮達出處之際하야 得其粹精하야 涵畜充溢한대 抑而不發이라가 久之에 慨然曰可矣라
由是下筆에 頃刻數千言이라 其縱橫上下하며 出入馳驟하야 必造於深微而後止하니 蓋其稟也厚라 故發之遲하며 志也慤이라 故得之精이라
自來京師로 一時後生學者 皆尊其賢學其文하야 以爲師法이러라 以其父子俱知名이라 故號老蘇以別之라
乃以爲霸州文安縣主簿
하야 使食其祿
하야 與
項城縣令
으로 同修禮書
하야 爲
一百卷
이라
書成에 方奏未報而君以疾卒하니 實治平三年四月戊申也라 享年五十有八이라
天子聞而哀之하야 特贈光祿寺丞하고 勅有司具舟載其喪하야 歸於蜀하다
君娶程氏하니 大理寺丞文應之女라 生三子하니 曰景先早卒하고 軾今爲殿中丞直史館이요 轍權大名府推官이라
三女皆早卒이라 孫은 曰邁曰遲라 有文集二十卷과 諡法三卷이라
君善與人交하고 急人患難하야 死則卹養其孤하니 鄕人多德之러라
蓋晩而好易하야 曰易之道深矣라 汨而不明者는 諸儒以附會之說로 亂之也니 去之則聖人之旨見矣라하야 作易傳이라가 未成而卒하다
治平四年十月壬申에 葬于彭山之安鎭鄕可龍里하다 君生於遠方而學又晩成이라
常歎曰 知我者는 惟吾父與歐陽公也라하니 然則非余오 誰宜銘이리오
銘曰
이라 以宦留眉
하니 蕃蕃子孫
이라 自其高曾
으로 鄕里稱仁
이라
偉歟明允은 大發於文하니 亦旣有文이요 而又有子라 其存不朽하고 其嗣彌昌하니 嗚呼明允이여 可謂不亡이로다
蜀에 군자가 있으니
蘇君이다. 휘는
洵이고 자는
明允이니
眉州 眉山 사람이다.
蘇洵(≪晩笑堂畫傳≫) 君의
行義는 집에서
修身하였고 향리 사람들에게 믿음을 받았고
蜀의 사람들에게 소문난 지는 오래되었다.
至和, 嘉祐 연간에 두 아들 蘇軾, 蘇轍과 함께 京師로 왔는데, 翰林學士 歐陽脩가 그들이 지은 글 22편을 얻어 조정에 바치니,
글이 이미 세상에 유포되자 公卿과 士大夫들이 다투어 전하였다. 두 아들은 進士試에 응시하여 모두 높은 등급으로 합격하였고, 또한 문학으로 당시에 일컬어졌다.
眉山은 서남쪽 수천 리 밖에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父子의 명성이 은연중에 京師를 진동하여 蘇氏의 문장이 마침내 천하의 명성을 독차지하였다.
君의 글은 博洽하며 웅장하기에 읽는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그 사람을 상상하다가 만나봄에 온화하여 마치 말을 잘하지 못하는 듯하였다.
가까이서 함께 거처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좋아할 만하였고 간혹 자신의 식견을 드러내면 물을수록 더욱 식견이 무궁하니, 아, 純明하고 篤實한 군자라 이를 만하다.
曾祖는 휘가 祐이고, 祖는 휘가 杲이고, 父 휘 序는 尙書職方員外郞에 증직되었으니, 3世가 모두 현달하지 못하였다.
職方君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澹, 渙은 모두 文學으로 進士試에 합격하였지만 君은 어려서부터 홀로 학문을 좋아하지 않아 장성해서도 여전히 글을 몰랐다.
그러나 職方君은 내버려둔 채 따져 묻지 않았는데, 鄕閭 사람들과 親族들이 모두 괴이하게 여겼다. 어떤 이가 이유를 물으니 職方君은 웃으며 답하지 않았고, 君도 태연하였다.
나이 27세에 비로소 크게 發憤하여 평소 왕래하던 少年輩들과 절교하고 문을 닫고 독서하며 문장을 지었는데, 한 해 남짓 만에 進士試에 응시하였지만 두 번 합격하지 못하였고, 또 茂才異等試에 응시하였지만 합격하지 못하였다.
물러나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는 내가 배울 것이 못 된다.”라고 하고, 지었던 글 수백 편을 모두 가져다 태워버리고는 더욱 문을 닫고 독서에만 매진하여 絶筆하고 문장을 짓지 않은 것이 5, 6년이 되었다.
비로소 六經과 百家의 설을 깊이 궁구하여 고금의 治亂‧成敗와 聖賢의 窮達‧出處를 硏究하고 質正해 精粹를 얻어 온축한 것이 넘쳐흘렀는데 억제하고 드러내지 않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慨然히 말하기를 “그럭저럭 괜찮겠다.”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글을 지으니 잠깐 동안에 수천 마디나 되었다. 자유자재 막힘이 없었고 출입하며 치달려 반드시 깊고 은미한 경지에 이른 뒤에야 그쳤으니, 대개 품부받은 天性이 厚하기 때문에 發露가 더뎠고, 뜻이 성실하기 때문에 얻은 것이 정밀하였다.
京師로 온 뒤로 당대의 後生과 학자들이 모두 君의 현명함을 존중하여 그의 문장을 배워 본보기로 삼았는데, 父子가 모두 명성이 알려졌기 때문에 老蘇라 불러 아들들과 구별하였다.
당초에 내가 그의 글을 올려 紫微閣으로 불러 시험을 치르게 하였는데, 사양하고 오지 않았다. 마침내 祕書省校書郞에 제수되었다. 이때에 太常寺에서 建隆 연간 이래 禮書를 修纂하였다.
이에 蘇洵을 霸州 文安縣主簿로 삼아 그로 하여금 祿을 받을 수 있게 해주고서 陳州 項城縣令 姚闢과 함께 禮書를 편수하여 ≪太常因革禮≫ 100권을 만들게 하였다.
책이 완성되자 바야흐로 조정에 보고하였지만 비답을 받기 전에 君이 병으로 卒하니 실로 治平 3년(1066) 4월 戊申일이었다. 향년 58세였다.
천자가 부고를 듣고는 애통하게 여겨 특별히 光祿寺丞을 증직하였고, 有司에게 배를 준비하여 시신을 싣고 蜀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라고 명하였다.
君은
程氏에게 장가들었는데,
大理寺丞 文應의 딸이었다. 아들 세 명을 낳았으니, 장남은
景先으로 일찍 죽었고,
軾은 지금
殿中丞直史館이고,
轍은
權大名府推官이다.
蘇軾(≪晩笑堂畫傳≫) 蘇轍(≪晩笑堂畫傳≫)
세 명의 딸은 모두 일찍 죽었다. 손자는 邁와 遲이다. 문집 20권과 ≪諡法≫ 3권이 있다.
君은 사람들과 교제를 잘하였고 타인의 患亂을 잘 구제해주어 〈교유하던 벗이〉 죽으면 아비 잃은 아이들을 구휼하고 길러주니 鄕人이 많이들 德이 있는 사람으로 여겼다.
晩年에 ≪周易≫을 좋아하여 말하기를 “≪周易≫의 道가 깊다. ≪周易≫의 道가 어지럽고 분명하지 않은 것은 儒者들이 牽強附會한 설로 본의를 어지럽혔기 때문이다. 이를 버린다면 聖人의 뜻이 드러날 것이다.”라고 하고는 ≪易傳≫을 짓다가 완성하기 전에 卒하였다.
治平 4년(1067) 10월 壬申일에 彭山 安鎭鄕 可龍里에 안장하였다. 君은 먼 지방에서 태어났고 학문은 늦게 이루어졌다.
늘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를 아는 사람은 나의 아버지와 歐陽公뿐이다.”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내가 아니면 누가 銘을 짓겠는가.
銘은 다음과 같다. 蘇氏는 唐나라 때에 현달하였으니 실은 欒城 사람이었다 벼슬로 인해 眉州에 머물렀으니 자손이 번창하구나 高祖와 曾祖로부터 향리에서 仁하다 칭송하였네
훌륭한 明允은 크게 문장으로 발휘하였으니 또한 이미 문장이 있고 또 훌륭한 아들을 두었구나 문장은 보존되어 길이 남겨질 것이고 후손들은 더욱 창성할 것이니 아, 明允이여 죽지 않았다고 할 만하도다